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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Oct 20. 2023

오늘 하늘엔 반달이 떠 있어

[강아지와 90일 자전거여행] Day71~73

Day 71 피닉스-위트먼


 피닉스에서 푹 쉬면서(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고 싶을 때까지 자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갈 용기를 되찾기 위해서. 이 길을 나아가는 데 체력보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었다. 멈추거나 앞으로 가거나 하는 결정은 마음, 생각이 내리는 것이므로 가기 싫은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애써 다독여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여행의 마지막 구간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되찾았다.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처음 그때 그 마음으로.


 9시가 거의 다 되어서 일어났다. 왠지 몸이 무겁다. 일어나서 마시멜로 초코스프레드를 수저로 퍼 먹고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호스트 수잔네 집에 가서 집 열쇠를 주고 인사한 뒤 60번 도로를 향하여 페달을 밟았다. 

 오늘 길이 좋았나 아님 며칠 쉰 덕분인가 자전거가 금방금방 앞으로 잘 나갔다. 대도시의 도로라 갓길 없는 구간이 조금 있어서 바짝 긴장할 때가 있었다. 차가 바로 옆으로 쌩 지나가면 정말 오싹하다. 

 금세 30킬로미터 넘게 달린 뒤 웬디스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웬디스에 와 보기는 처음인데 여기가 다른 패스트푸드점보다 나은 것 같다. 인앤아웃 보다 맛있는 것 같고, 바닐라맛 콜라라는 것도 처음 시켜봤는데 너무 맛있다. 먹고 다시 출발. 

 월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데 문 앞에 자전거와 함께 두고 온 포키가 짖어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서둘러 아보카도(50센트. 뉴멕시코랑 애리조나주는 아보카도가 싸서 좋다), 바게트, 땅콩버터를 사고 나와서 다시 출발했다. 

 역시 구글 고도표를 보고 지레 겁먹으면 안 된다. 걱정과 달리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어서 금방 도착했다. 위트만에 도착해서 교회를 찾아갔는데 굳게 닫혀 있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여자 두 명이 타고 있는 빨간 차가 내게 다가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잘 곳을 찾고 있다 하니 저쪽에도 교회 하나가 있고 커뮤니티 센터도 있으니 거기로 가 보라고 해서 갔는데 교회도, 커뮤니티 센터도 닫혀 있었다. 


'음 어디로 갈까.'


저쪽에 사람들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텐트 칠 만한 곳을 물어보았다.


“우리 집은 개가 있어서 안 되는데, 저기 노란 차 세워져 있는 집에 한 번 가봐요. 거기 가면 아마 도와줄 거예요.”

“그분이 목사님이신가요?”

“그건 아닌데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에요.”


반신반의하며 그 집으로 가 보았다. 커다란 사와로 선인장들이 정원에 우뚝 서 있고 마당도 엄청 큰 집이었다. ‘여기 텐트 치면 딱 좋겠는걸.’ 벨이 보이지 않아 그냥 대문 앞에 서서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왜냐하면 큰 개 세 마리가 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아주머니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나오셨다.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이고요. 잘 곳이 필요한데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여기로 가 보라고 해서요….”

“방은 없고 소파만 있어요.”

“상관없어요! 저 텐트도 있어서 마당에서 자도 되고... 소파도 전혀 문제없어요!”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 하시는 아주머니 얼굴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시려는 표정이었다. 


“제발요….”

“우리 개들이 당신의 강아지를 해칠 수 있으니 꼭 안고 다녀요.” 아주머니가 당부의 말을 건네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장갑 벗고 어서 이리 와서 같이 트리 장식해요.”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아주머니의 트리에는 보라색 공이 잔뜩 걸려 있었고, 얼떨결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주머니와 함께 트리를 장식했다. 


“사람들이 이 집으로 가 보라고 했어요.”

“우린 돈은 없지만, 사랑이 있어요. 

We have no money, but have love.”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주머니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알고 보니 76세였다. 이름은 버지니아. 트리를 꾸민 뒤에는 가족사진을 보여주셨다. 지금은 재혼을 하셨고 자식들 몇은 죽고 둘만 남았다고 했다. 그중 아들 한 명은 비행기 추돌 사고로 죽었다고, 아주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가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그때 다른 말로 얼버무리곤 하고, 먼저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얼마큼의 인생 내공이 쌓여야 그녀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마당에 나가 보니 트리에 걸린 공 같은 보랏빛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집에 살고 있다는 50대 남자 둘이 저녁거리를 사서 들어왔다. 제리와 러셀. 제리는 무뚝뚝하고 러셀은 리액션이 최고였다. 러셀이 내게 샐러드를 권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러셀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온갖 종류의 음료수 캔을 내 자리 앞에 죽 늘어놓았다. 콜라, 크림소다, 루트비어, 닥터페퍼, 세븐업, 스프라이트. 


“먹고 싶은 거 골라요.”


루트비어가 뭔지 궁금해서 루트비어를 골랐다.


“내일 아침이랑 점심에 먹을 것까지 골라요.”


아침에 먹을 거 하나만 더 골랐다. 크림소다. 처음 먹어 본 루트비어는 달콤한 가글 맛이었다. 러셀이 준 샐러드를 먹고 버지니아가 준비해 준 터키와 햄, 크랜베리 소스, 버터와 빵을 먹었다. 

 러셀이 영화를 보지 않겠냐며 아바타를 가져와서 우리는 다 같이 거실에 앉아 아바타를 보았다. 러셀과 버지니아는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영화 내용을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하는 말 또한 내가 잘 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천천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번역기까지 써가면서. 덕분에 재밌게 아바타를 봤다. 영화보다는 나를 즐겁게 해 주려는 그들의 마음이 더 감동이었다. 러셀은 내가 재미있어하는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은 듯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영화를 다 보고 씻고 나오니 버지니아의 남편 엘마가 와 있었는데 무언가 심각하게 의논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엘마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내일 10마일 정도 언덕이 계속될 텐데 언덕 끝날 때까지 내가 태워다 주면 어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너무 감사하죠.”


엘마는 오늘 새 기아 자동차를 샀다. 새 차에 자전거를 싣는 게 반가운 일은 아닐 텐데.. 버지니아는 내가 씻는 사이 소파에 시트를 깔고, 얇은 이불과 두터운 담요, 그리고 내가 어떤 높이의 베개를 선호할지 몰라 높은 베개와 낮은 베개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정성스레 마련해 준 잠자리에서 아주 편히 잠을 잤다. 


Day 72 위트먼-아길리아


다음날, 헤어지기 전 버지니아와 엘마가 내게 선물이라며 성경책 하나를 주었다. 모르몬교 성경책이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꽤나 무거운 그 책을 자전거에 싣고 엘에이까지, 그리고 한국까지 가져왔고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볼 때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떠오른다.

 버지니아와 기념사진. 그녀는 꼬질하고 엉킨 포키의 털을 정성스레 빗어주었다. 이제 엘마의 차에 자전거를 싣고 떠난다. 엘마 덕분에 오늘 달릴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연락해 두었던 웜샤워 호스트 집에 도착했다. 노부부가 사는 집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필리스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엔 필리스와 루미큐브를 했다.


Day73 아길리아-호프


 필리스가 사는 곳은 개인 항공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꾸물대기. 헤어짐을 어려워하는 나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그러니까 절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준비를 한다. 그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모양인지, 하이웨이까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같이 아주 느린 속도로 자전거를 탔다. 한가로운 길에서 셋이 나란히. 남편 랜디가 필리스에게 물었다. 


“오늘 뭐 하지 우리?”

“아무것도.” 필리스가 대답했다. 


마침내 하이웨이에 도착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조심히 여행하고 잘 도착했는지 연락 줘요. 엘에이에 머물 수 곳이 있는지 알게 되면 알려줄게요.”


외국인들은 헤어질 때 쿨하게 뒤돌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몇 번이나 다시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뒤돌기 전 필리스가 눈가를 닦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눈물, 사막에서 자야 하는 하루, 가야 할 길, 언덕, 쉼, 포키와의 시간들. 이런 것들을 몇 가지 단어로 어떤 감정인지 설명하기란, 적어도 내겐 너무 어렵다. 

 가는 길에 아트 갤러리 같은 것이 있어서 구경을 했다.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잠시 어디를 다녀오시더니 포키 간식을 건네셨다. 그리고 캠핑장에 도착.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오만가지 감정이 스치면서 눈물이 핑 돈다. 

결코 형용할 수 없는, 붙잡을 수 없는 감정들. 

나를 스친, 내가 지난 풍경의 가짓수만큼이나 많은 감정들이 내 속을 지났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붙잡아 볼 수가 없다.

내가 행복한지, 우울한지, 고독한지, 무료한 지.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늘에 반달이 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생의 빛나는 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

지금은 결코 알지 못해도,

훗날 이 시간을 지독히 그리워할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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