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76~79
Day76 파커-62번 도로 어딘가
어쩔 수 없이 사막에서 자야 하는 하루. 바로 오늘이다. 캘리포니아로 들어서면서 주유소도, 편의점도 아무것도 없는 길이 180킬로미터 정도 계속되는데 내게 하루에 자전거를 180킬로미터 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자는 것도 만만치 않을 듯하긴 하지만..
이런 비슷한 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애초에 내가 미국 횡단을 꿈꾸면서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느껴보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책 <달의 궁전>을 읽다 보면 당장에라도 미국 서부로 달려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릿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가운데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p. 184
모란은 내게 끊임없이 서부 얘기를 했어. 그 사람 말은 이런 거였지. 거기로 가지 않으면 공간이 무엇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여행을 하지 않으면 당신의 작품은 성장을 멈추게 될 거다, 그 하늘을 경험하게 되면 당신의 삶이 바뀔 거다……. p. 219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이윽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결국 사막에서 자게 되었다. 온통 똑같아 보이는 길 가운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고 또 찾았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기엔 미지의 암흑이 두려웠고 도로 가까이에 있자니 지나다니는 차가 무서웠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다. 어딘가에는 텐트를 쳐야 할 시간이다. 텐트가 가려지기에 턱없이 부족한 어떤 기념비 같은 것 뒤에 텐트를 쳤다. 그리고 자전거는 누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기념비와 텐트 사이에 자물쇠를 채워서 놓았다.
텐트를 치고 침낭 안에 들어가 누웠다. 조용하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진다. 내가 겁내던 소리는 아마 바람에 텐트가 움직이는 소리인 듯하다. 찌르르 거리는 전기탑 소리와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아무도 텐트를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
낭만만 가득한 꿈이었지. 황량한 들판 어딘가에 텐트를 치고 혼자 보내는 밤이란 어떤 걸까 궁금했는데, 낭만을 즐길 여유 따위는 없고 두려움에 떨며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다. 모든 소리가 동물 소리 같이 들려서 무섭다. 어디선가 코요테가 강아지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길 들어 본 것 같은데... 포키에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나 생각도 많고 두려움도 걱정도 많다. 하필 오늘 아침까지 너무 따뜻한 사람들 품 속에 있다 와서 사막의 밤이 더 서글프다.
Day77 62번 도로 어딘가-
무사히 자고 일어났다. 텐트 문을 열었더니 산 뒤로 달이 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한 빛 사이로 달이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여기는 지구가 맞나 하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해가 뜰 것이다. 해가 뜨면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사라진다. 안도감이 드는 이 순간을 조금만 더 즐겨야겠다.
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지는 아이러니. 끝을 생각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여유로워진다... 달리다 멈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포키와 함께 사과를 나누어 먹었다. 그늘이라곤 찾을 수 없으니 모자로 얼굴만 가린 채. 그런데 포키에겐 그늘이 없고 포키가 더워서 헐떡이고 있다... 캠핑카를 잡아봐야겠다.
나는 지금 62번 도로를 달리고 있다. 차를 타고. 이 사막에 마침 정말 내 자전거를 싣기에 딱 좋아 보이는 차가 지나갔고, 바로 히치하이킹을 했다.
차에는 중년 남자 혼자 타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어디에 내려줄까요?"
"음.. 어디까지 가세요?"
"샌디에이고에 가요."
"아.. 잠시만 생각해 봐도 될까요?"
조금만 얻어 타고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샌디에이고라는 이름을 듣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샌디에이고..?' 엘에이까지 가는 길에 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캘리포니아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 그냥 여기 어딘가쯤에 내려서 계속 사막을 달려 트웬티나인팜스 쪽으로 가느냐, 아저씨 차를 타고 샌디에이고까지 가느냐.
우연에 의해 생각지도 못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데다, 어젯밤 사막에서 두려움에 떨며 잤던 일, 그늘이 없고 더워서 헐떡거리는 포키, 자전거 타기의 고단함, 계속 반복되는 황량한 풍경 따위를 떠올리니, 갑자기 다가온 해변 도시 샌디에이고라는 선택지가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바다를 보며 라이딩하는 것도 해보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이고, 이 기회에 샌디에이고에서 엘에이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실 당장에 눈앞에 달려야 할 사막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겠지만 어쨌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아저씨 차를 타고 샌디에이고에 가기로 했다.
인생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맞다. 지금 나는 높은 빌딩이 즐비한 샌디에이고의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캐럴을 들으며 중국음식을 먹고 있다. 급하게 에어비앤비로 저렴한 방을 구했다. 하루 40달러에 개인 욕실까지 있는 방이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리사와 거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빅뱅이론을 보며 피자를 먹고 방에 들어왔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막을 그렇게나 걱정했는데 갑자기 바다에 와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어이가 없고 허무하면서도 안도감에 피식 웃음이 났다.
Day78 라 호야 (휴식)
하루 쉬면서 자전거를 타고 라 호야 시내를 구경했다. 언덕길이 많아서 자전거를 타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쩜 이리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었는지 의문이다.
Day79 라 호야 - 샌 엘리호
바닷가를 달린다. 그런데 바다를 달리니 또 놓쳐버린 사막이 아쉽다. 내가 선택한 길. 놓쳐버린 길에 대한 아쉬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지금쯤 사막을 달리고 있다면 어떨까? 트웬티나인팜스는 어떤 곳일까? 어쩜 이렇게 늘 바보 같은지.
사실 나는 이 여행기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카고에서 엘에이까지, 마지막 관문인 사막을 제대로 지나야 만 마침내 짠 하고 '엘에이에 도착했습니다.' 하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여행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늘 미뤄왔던 건 물론 게으른 탓과, 책을 읽으며 만나는 작가들의 엄청난 표현력을 볼 때마다 '아, 난 역시 그냥 읽는 사람만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에 포기해 버린 것만 같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핑곗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 엘에이에 도착하느냐 마느냐, 어떤 방식으로 도착하느냐 하는 건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그 길을 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이 바로 삶 자체니까.
오늘은 캠핑장에서 잔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급하게 정리하고 바다로 향했다. 포키야 이렇게 붉다 못해 새빨간 노을은 언니도 처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