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80~82
Day80 샌 엘리호-샌 클레멘테
도시에 와 오랜만에 달려보는 자전거길. 일기를 제대로 안 쓴 지 대체 며칠째인가. 피곤하다. 가진 식량을 거의 다 먹어서 먹을 것도 없다. 주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크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던 라이더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우리 집에 오기로 했던 Hoki 맞나요? 제가 켄이에요.”
웜샤워 호스트 켄이었다. 그는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테니 먼저 집에 가있으라고 했다. 서퍼들이 서핑을 마친 뒤 몇은 보드를 들고 걸어서, 몇은 자전거 보드랙에 보드를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언뜻 본 일몰이 아름다워 바다 쪽을 향해 서둘러 페달을 밟았는데 도착한 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수평선에 걸려 있던 붉은 해는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 배고파. 켄이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 같이 멕시코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포장해다 먹었다.
Day81 샌 클레멘테-라구나 비치
다음날. 자전거를 타다 우연히 들른 아티스트샵에서 친구에게 줄 선물로 이름 모를 한 예술가가 어딘가에서 열심히 만들었을 작은 드림캐쳐를 샀다. 길 위의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마음이 이상하다. 내 서른 살의 9월부터 12월까지 낯선 미국 땅에서 떠돌던 날들. 요즘 자전거를 타면서 대체 저런 집(태평양이 내 것인 양 집 앞에 펼쳐진 집들)은 얼마나 할까, 저런데 사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느긋이 켄 집에서 출발해서 달리다가 바다를 보며 간식으로 초코피넛버터칩을 먹고, 또 달리다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달려 오늘의 목적지 라구나 비치에 도착해 스타벅스 캐러멜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오늘은 어제의 호스트 켄이 소개해준 친구네 집에서 자기로 했다. 물가 비싼 라구나 비치에서도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집이었다. 켄의 친구 빌네 집 도착. 지하에 게스트 공간이 따로 있었다. 빌은 아내와 사별한 뒤 어린 딸과 둘이 살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뒤 방으로 들어왔다. 빌은 포키를 절대로 침대 위에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배변실수는 하지 않는지 재차 확인했다. 오늘 그래서 포키는 바닥에 있는 방석에서 잔다. 포키는 침대에 있으면 절대 배변실수를 하지 않지만, 미국 가정집 실내에 흔히 깔려 있는 카펫에 몇 번 실수한 적이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채로 잠에 들었다.
여행온 이후 처음으로 떨어져서 잔다. 잘 자 포키.
Day82 라구나 비치(휴식)
사막에서 무사히 아침을 맞이하고 달이 지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몇 시간 후 태평양 코 앞에, 그리고 바다를 보며 자전거를 타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사막을 어찌 통과할지, 잠은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걱정했었다. 그런데 별안간 바다에 와 있는 것이다. 뜻밖의 일에 기쁘기도 하면서, 걱정하고 또 걱정했던 내가 가엽다. 코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인데. 그런데 오늘, 라구나 비치에서 또다시 내일을 걱정 중이다. 가엾어라.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걱정 말고 길을 나서 보자. 잘 곳도 구하지 못했는데 저녁 6시까지 월마트에서 여유롭게 장 보던 나는 어디 갔니.
여행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토록 고대했고, 불안한 만큼 빛나던 순간들이 과거가 되어 가는 길목에 있다. 6일 정도 남았다. 80여 일간 잘 해내 왔으면서, 남은 며칠 어디서 잘 지 여전히 걱정이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도 여전히 어렵다.
오늘은 라구나 비치, 캘리포니아 해변 중에서도 비싼 곳으로 꼽히는 라구나 비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를 걷고, 비치에 앉아 바다의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포키 털을 빗었다. 비치타월이 있었다면 누워서 한숨 자고 싶은 날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변은 한산하다. 바다, 야자수, 캘리포니아, 태평양. 예쁘고 멋지다. 열대 식물들이 복잡하거나 소란스럽지 않게 잘 정돈된 채 군더더기 없이 바다와 어우러진 풍경이, 잘 사는 동네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 자신이 정돈되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라 그런지, 이런 풍경도 좋긴 하지만 거칠고 황량한 사막 풍경에 왠지 조금 더 마음이 간다.
사실 오늘 라구나 비치를 구경하러 나오는 길에 빌의 서재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 포키가 그만 빌의 서재 카펫에 응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빌이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
“Don’t bring your dog on the carpet!”
(네 개를 카펫 위에 데려오지 마!)
미안하다고 하는 내 말에 그는 'Bad ***'라고 하며 화를 냈다. 오늘 하루종일 이 일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는 참 즐겁게 대화했는데 한순간에 그와 어색해졌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딸과 함께 트리를 꾸미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트리 참 멋지네요.'라고 했는데 그는 나와 눈도 안 마주친 채 '고마워요'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방으로 내려왔다. 근데 포키가 또 응아 묻은 엉덩이를 카펫에 쓸었다.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강아지와 여행할 때 이렇게 종종 난처한 일들이 있다. 주로 짖음 또는 배변문제. 곧 집에 간다. 집에서는 배변 실수 전혀 하지 않는 포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90일 중 이제 겨우 6일 남았지만 남은 6일도 소중히 여겨야 해. 내일 다시 길을 떠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