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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Oct 20. 2023

마지막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Day83 라구나-코스타 메사


나는 지금 크리스탈 코브 쇼핑센터 내에 있는 스타벅스.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그란데 사이즈를 시켜 바다와 야자수, 주차장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여행 막바지에 오니 드는 생각들. 그동안 두려움에서 계속 피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나? 어차피 인생은 괴로워하다 즐거워하다 언젠간 죽는 것인데, 그러니까 누구나 다 때로는 괴롭고 즐겁고 그런 것인데 그 시간을 너무 괴로워하고 너무 걱정만 할 게 아니라 그 순간에 머물며 즐기자는 것. 지금 여기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을 것이지, 이미 일어난 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는 것.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거나 후회스러워하지 말자고. 그저 그게 인생이니까. '왜 이런 선택을 해서...' 혹은 '왜 그때 그래서’라며 후회하지 말고 그냥 걸어가자는 것.... 지금 이어폰 가득 울려 퍼지는 음악에 뭉클하고, 커피의 달콤함에 행복하다. 그냥... 이게 인생이고 길이다. 비록 오늘 잘 곳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뭐 언제는 안 그랬던가? 

 앉아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한 백발의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 여행에 관심을 보이시더니 이런 건 처음 봤다며 매우 인상적이고 어메이징 하다며 감격스러워하셨다. 그러더니 머물 곳이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혹시 오늘도 가능하냐고 했더니 주소를 적어 주셨다. 

 집은 여기서부터 11마일(약 18킬로미터), 할머니는 두 시쯤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시간이 아주 여유 있다. 카페에서 마음 편히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행복해졌다. 역시 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 너무 앞서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때마침 연락해 두었던 코스타 메사의 웜샤워 호스트에게서도 오늘 와도 된다는 답이 왔다. 그러나 오늘은 할머니 집으로 가보기로 한다. 그래서 오늘, 코스타 메사로 간다. 나와 그토록 멀기만 하던 어느 낯선 도시의 이름이 하나씩 내게 의미가 되어 남는 일은 참 멋진 일 같다. 코스타 메사는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산타할아버지가 개린이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계셔서 우리도 찍었다. 

 버벌리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아들이 쓰던 방을 쓰게 해 주셨다.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아들이 엘에이에 산다며 아들에게 나를 재워줄 수 있는지 물어봐주신다며 전화를 걸었는데, 아들이 누군지 알고 아무나 재워주냐고 했나 보다. 정말 맞는 말이다.


Day84 코스타 메사-


길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쉽다 했더니만, 버벌리 집을 떠나 6킬로미터나 달렸을 때 집에 충전기를 놓고 온 게 기억이 나서 다시 돌아갔다 왔다. 어차피 목적지도 갈 곳도 없으니 느릿느릿 해변가를 달리다가 점심을 먹고, 어느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다시 출발하여 가다가 도그비치가 있길래, 서둘러도 갈 곳도 없으니 해변으로 내려가 포키와 함께 태평양 바다에 발을 적셨다. 

 다시 앞으로, 그러나 어디로? 해변가에서 벗어나야 그나마 잘 곳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안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를 들어갔다. 가는 길에 다리 밑에 쳐진 텐트와 홈리스를 보았다. 정원에 나와 일하시는 동양인 아저씨에게 뒷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물어봤는데 안 된다 했고, 한인교회는 문이 닫혀 있고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여긴 강도가 많고 매우 위험한 지역이에요. 여기서 자지 말고 다른 마을로 가세요.”

(도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ㅠ)


이미 해는 저물어가고 있어서 다른 도시로 가기에도 그렇고, 한 번만 더 물어보자 하고 한 주민에게 교회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교회 두 군데를 알려주었다. 그중에 열려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교회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엄청 큰 성당이었다. 성당 옆 작은 건물에 있는 성당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물어보니 예배가 끝날 때까지 신부님을 같이 기다려보자고 했다. 타코와 물과 콜라를 주셔서 먹으면서 신부님을 기다렸다. 마침내 신부님을 만났고, 원하던 답은 해주지 않으셨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여기가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때 지나가다 우릴 본 한 아주머니가 여기 신도중에 클라라 박이라는 한국 아주머니가 계시다며 연락해 주셨고, 잠시 후 클라라 박이 나를 데리러 왔다. 클라라 아주머니,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75세라시던 클라라가 나를 재워주기로 했다.


오늘은 12월 10일, 그리고 한국 가는 비행기는 12월 14일. 엘에이 공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는 내 말에 펄쩍 뛰시며 위험해서 안 된다고, 여기서 출국일까지 지내다가 택시 타고 가라고 하셔서, 처음엔 고집을 부려봤지만 결국 아주머니 말씀대로 하기로 하고 마지막 4일을 그녀 집에서 보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한 첫날 해주신 저녁.

 그리고 다른 날의 음식들. 음식을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클라라 아주머니가 정말 많이 챙겨주시고 도와주셨다. 밥뿐만 아니라 포키를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떼기 위해 동물병원과 검역소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다 같이 가주셨다. 마치 엄마나 할머니 같이 느껴질 만큼 정말 편하게 대해주셨고, 편하게 지냈다. 

 그런데 내 여행에 대해 운이 좋아서 그렇지 정말 큰일 날 짓 한 거라고 정말 위험하다고 다시는 이런 여행하지 말라고 하셔서 사실 조금 서운했었다.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3개월의 시간들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공항까지 자전거 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내가 걱정되어서 하시는 말씀인 줄은 알지만 서운한 마음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 잠시라 할지라도 내 마음을 느끼셨을 게 분명하고 지금 되돌아보면 너무 죄송스럽다. 처음 보는 사람을, 거기다 강아지까지 4일이나 재워주시고 먹여주시고 챙겨주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 

 클라라 아주머니 덕분에 포키 서류 준비도 잘했고, 자전거 박스도 구해 포장도 했고, 마침내 마지막 날이 되어 택시를 타고 엘에이 공항에 도착했다. 아주머니 말이 맞다. 마지막에 그 위험하다는 도시에서 아주머니까지 만난 걸 보니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은 사진들. 포키야, 이제 집에 가는 날이야. 아프지도 않고 씩씩하게 지내줘서 너무 고맙고 대견해



인천 도착. 친구가 핫초코를 들고 마중 나왔다. Day42~44에서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핫초코를 기대하며 20킬로미터를 달려간 카페가 굳게 닫혀 있었다는 글을 보고 친구가 핫초코를 사 들고 온 것이다. 친구와 함께 애슐리에 가서 배 터지게 먹고 마침내 집에 왔다.

 3개월을 비워 놓은 집은 매서운 추위에 냉동실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포키와 나의 공간, 우리의 공간이 있다는 게 새삼 참 감사하다. 추운 겨울 안전하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둘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 포키도 편해 보인다. 기쁜 것 같다. 

 현금 3만 원을 뽑고 코인노래방에 가서 천 원어치 노래를 불렀다. 그런 다음 마트에서 물과 귤, 고구마를 사서 집에 왔다. 온수매트를 틀었다. 따뜻해지니 더욱 아늑하고 좋다. 집이 이렇게 소중하고 감사한지를 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끝과 시작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날' 이라던가 '오늘부터는...'같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오늘은 그저 어제의 다음날일 뿐이다. 

 길 위에서 오롯이 혼자였기에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많이 싸웠고, 때로는 서로 등 돌리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해했다. 내가 아프고 자꾸만 작아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나를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믿어줘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데. 그리고 '괜찮다'라고 말해줘야 하는 것도 바로 나였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자, 나는... 괜찮았다. 거기서부터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여정을 돌이켜 보면 내가 그 길들을 지나왔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데, 무엇보다 가장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길에서 포키가 내 뒤에 있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고 5년 3개월 12일 후, 포키는 강아지별로 먼 소풍을 떠났다. 2022년 3월 26일. 

 여행을 하면 할수록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는 것. 자전거여행이 페달을 밟을수록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 결국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처럼,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분명 너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길이고, 이것만이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 진실을 붙잡고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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