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 74~76
Day74 호프-파커
아침에 일어나 매트를 접고 텐트를 정리하는 동안 포키는 보통 여전히 자고 있다. 엘에이까지 어떻게 가느냐를 두고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I 10(프리웨이)을 타고 갈까,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차가 비교적 적고 느리게 달리는 62번 도로로 갈까. 프리웨이의 위협적인 차들 옆을 달리는 일은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캠핑장을 나서는 순간 바로 I 10과 62번 도로로 가는 길의 갈림길인데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결국 62번 길로 가 보기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얼마간 가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다시 길을 되돌아왔다. 근데 또 아무래도 62번 길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처음 가던 길로 향했다.
'이 길로 가면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저 길로 간다면?'
모든 운명이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고 작은 차이가 다른 운명을 만든다는 것을 길 위에서 너무도 많이 느껴서였을까, 결정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마침내 선택한 62번 도로로 가기 위해선 오늘 출발하는 곳인 호프에서 북쪽에 있는 도시인 파커에 우선 가야 했다. 그렇게 파커로 향했고, 어느새 파커에 도착했는데 자전거에 펑크가 나서 맥도널드 옆 커다란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자전거 펑크를 때웠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누가 신고한 건지 경찰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도움이 필요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자전거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수리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알겠어요." 경찰은 이렇게 말한 뒤 떠났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경찰차가 내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자전거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수리하고 있어요. 아! 그런데 혹시 여기 텐트 칠 만한 곳이 있나요?"
"저기 블루워터라는 곳이 있는데 강 앞쪽에 텐트를 치면 될 거예요. 나는 그 블루워터 RV파크에 살고 있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처를 알려줄 테니 전화해요. 나는 제리라고 해요." 제리가 그렇게 말한 뒤 차를 몰고 떠났다.
그런데 펑크를 분명 때웠는데도 다시 타 보니 펑크가 여전히 나 있었다. 이 부분은 사실 일기를 쓰지 않았는데(그 이유는 뒤에 나오겠지만) 아마도 내가 제리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다. 그런 다음 월마트로 내가 자전거를 끌고 간 건지 아니면 어떤 차에 싣고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월마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고 제리의 친구가 와서 펑크 때우는 것을 도와주었고, 제리의 아내 마리아도 왔다. 어쩌면 내가 제리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청한 게 아니라 월마트에 장을 보러 온 그들과 우연히 다시 마주친 것일 수도 있다.
마리아, 제리, 그리고 제리의 친구. 자전거 수리를 마친 뒤, 제리가 자신의 RV 앞에다 텐트를 치고 RV파크 공용 샤워실도 사용하라고 했다.
제리와 마리아는 멕시코인으로 멕시코와 미국 국경 쪽이 원래 살던 동네고, 거기까진 이곳에서 2시간이면 간다고 한다. 어느덧 12월 1일이다. 내일은 콜로라도강에서 노을을 봐야겠다.
Day 75 파커(휴식)
지금 있는 이곳은 애리조나주 파커. 눈앞에 콜로라도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은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캘리포니아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가는 동시에 180km 정도 아무런 서비스 없는 사막이 시작된다. 지금껏 내가 하루에 달린 최고 거리는 90킬로미터 남짓. 긴 사막을 앞두고 파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뭔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어제 i10과 62번 도로 중 어디로 갈까 엄청 고민 끝에 62번 도로 방향으로 온 건데, 제리 말로는 62번 도로가 위험하고 갓길도 없도 나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니 i10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한다. 또다시 갈림길에 섰다. 잘 고민해 봐야겠지만 여기까지 이미 와 놓고 다시 i10쪽으로 되돌아가도 아쉽지 않을 수 있는 건 파커에서 제리 부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껴서일까, 아님 생각할 시간이 많아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주어져서일까, 지난날의 내가 떠오르면서 얼마나 가시 돋쳐 있었던가, 얼마나 마음에 여유가 없고 날이 서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하필이면 텐트에서 자다 깬 순간 별안간 들이닥쳤다. 무언가 나를 건드리면 바로 가시를 돋치고 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엇에 그리 경계를 했던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아마도 나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순간 매우 부끄러우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바로 치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따뜻함 속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치유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제리와 대화 중 제리가 말했다.
“너 정말 용기 있어.”
“그렇지만 자주 두려워져요.”
“두려워지는 건 좋은 거야. 그게 널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니까.”
어제는 혼자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만의 우주를 떠돌다 보니 그동안의 나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콜로라도강. 마리아. 제리. 잊을 수 없기에 일기를 쓰지 않았다. 부부는 6시 반쯤 출근한다. 제리는 경찰이고 마리아는 키즈스쿨 급식소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한 뒤 1시 반쯤 퇴근한다. 나는 잘 만큼 자고 8시쯤 일어나 텐트를 정리했다. 낮에는 접어두고 자기 전 다시 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맥도널드에 가서 캐러멜마키아토와 팬케이크를 아침으로 먹으며 일기를 썼던가, 그랬을 것이다.
한참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마리아가 퇴근할 즈음 다시 RV파크로 돌아왔다. 마리아가 아직 오지 않아서 포키와 강변으로 산책을 갔다. 지역 이름이 블루워터인 만큼 콜로라도강은 파스텔톤 하늘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호수처럼 잔잔해서 오리가 많았다. 12월인 지금은 이토록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여름이면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진다고 한다. 강에서 돌아오니 마리아가 와 있었다. 치즈케이크와 아이스티를 먹고, 다시 강가에 가서 앉아 있는데 제리, 마리아 부부가 손을 잡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마스 장식할 대나무 구하러 가는데 같이 갈래?” 잠시 걸으니 대나무가 있다. 가지 세 개 정도 꺾어 들고 집으로 돌아와, 함께 중국음식을 먹을 갔다. 몽골리안 비프와 스팀드라이스. 젊은 중국인 여자가 서빙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내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는데 포키를 놓고 가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내일 떠나려면 짐정리도 해야 한다며 사양했다. 영화까지 보면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아서…. 부부는 영화를 보러 갔고 나는 그 사이 씻고 짐을 정리했다. 잘 시간이 되어서 밖에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영화관에서 돌아온 제리가 캐러반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자는 게 어때?”
이 제안 역시 너무 감사했지만 그래도 텐트에서 자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텐트에서 자겠다고 했다. 제리는 알았다고 했다가 밖에서 자는 게 영 마음이 불편했는지 다시 한번 안에 들어와서 자도 된다고, 거실에 있는 소파를 펼치면 침대니까 거기서 자면 된다고 이야기했고 결국 텐트를 접고 안에 들어가서 잤다. 침대에 앉아 그동안 지나온 길을 표시한 지도를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나는 매일이 불확실한 이 여행을 좋아하듯이, 인생이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것이라 좋다.
Day76 파커-62번 도로 어딘가
결국 그냥 62번 도로를 계속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 선택은 나를 또 어떤 길로 이끌게 될지. 사막을 향해 떠나는 날 아침, 제리와 마리아가 맛있는 멕시코식 아침을 사주었다. 차를 타고 아침 먹으러 가는 길, 마지막으로 강을 보러. 너무 맛있었던 칠라킬레스. “다음에 놀러 오면 같이 멕시코 우리 집에 가자. 가서 더 맛있는 거 사줄게.” “우리에겐 큰 집이 필요하지 않아. 이 정도 공간이면 아주 충분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다른 이에게 베푸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커 보였다.
제리가 집안을 뒤져 사막에서 필요할 용품들을 챙겨주었다. 자전거 타면서 바로 물을 마실 수 있는 물 배낭(?)과 헤드랜턴.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리고 두려움을 가득 품은 채 사막으로 향했다. 웰컴 투 캘리포니아!
부질없는 탐사, 실패할 운명인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이 그 당시의 내 정서와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탐사를 할 것이지만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동굴을 찾아간다는 사실 그 자체일 뿐, 결국은 그 야망이 헛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동안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은유, 늘 꿈꾸어 왔던 공허로의 도약이었다.
<달의 궁전>, 폴 오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