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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Oct 01. 2023

92세 할머니의 후회

미래와 자녀 or 현재와 나

오랜만에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올해로 86세. 자녀 다섯을 키우셨다.

당뇨를 앓고 계시며 무릎과 허리가 특히 안 좋다.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혼자 몇 발자국 걷기도 힘드시다. 그래서 거의 늘 집에만 계신다.

병원 가는 날이 거의 유일한 외출이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가을이라 날씨도 좋은데.

제 차에 휠체어 싣고 어디 바람 쐬고 오실까요?"

많이 힘드시다고 답하신다.

"그럼 저 최근에 이사 갔으니 집 보실 겸 놀러 오세요"

그것도 쉽지 않다고 하신다.

가더라도 짧게 다녀와야 한다 말씀하신다.

이유는 무릎 상태나 당조절도 번거롭지만..

무엇보다 요새 화장실 가는 횟수가 많아지셨다고.

그래서 외출이 꺼려진다고 하셨다.



​​

최근에 "92세 할머니가 살면서 가장 후회했던 점"

이라는 글을 봤다.

결국 말하고자하는 건 <중용>인 거 같다.


​너무 미래와 자식에게 희생하지 마라.

현재. 너부터. 행복하게 살아라.​


미래와 자식.

현재와 나.


이 둘의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것.

이 둘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것.

그러지 못하면 후회하게된다.

​​



우리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생각났다.

먼저 울 아버지.

58세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자유로운 성격 탓에 우리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고

저축의 개념도 거의 없으셨지만. 그만큼 본인께서 하고 싶었던 시도들은 충분히 하셨던 것 같다.

큰 심장 수술을 두 번 받으셨는데 그때마다 내게 말씀하셨다. 자기는 언제 죽어도 딱히 아쉽지 않다고.

물론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하신 말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진심으로 들렸었다.

반면 울 장인어른. 62세에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억울하다고. 이제야 자식 셋 외벌이로 키워냈고 조금 쉬려 하니 이렇게 병에 걸렸다고.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다.

흔한 외식도 여행도 거의 없던 삶.

일과 집의 반복. 그것도 주말부부.

장모님 속 썩이신 적 없고 정말 성실하고 자상한 가장이셨다. 젊은 시절부터 하고 싶으셨던 모든 도전 다 뒤로 치우고 오롯이 가족을 위해 사셨다.

​​



죽음 앞에 미련 없다는 울 아버지. 반대로 억울하셨던 장인어른.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두 분의 삶 모두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것 같다.

울 아버지는 자유로우셨던 만큼 이혼과 경제적 불안정을 겪으셨다. 장인어른께서는 가족을 챙기시느라 본인의 삶을 충분히 즐기시지 못하셨다.

​​



다시 우리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와서.

울 할머니의 일상을 보고 있자면 슬프다.​


자녀들이 할머니를 신경 쓰고 계시지만

정작 주로 챙기는 자식은 정해져있으며,

챙기는 자식도 본인 삶이 여유롭지 않아 힘들어한다.

자녀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이미 건강이 상한 뒤라 혼자 할 수 있는 활동도 제한적이다. 보통 드라마 시청 정도.​


윗글의 92세 할머니가 왜

"애지중지 키운 자식도 지 가정 차리면 그만이여"

"이제 좀 놀아볼까 했더니 옘병.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어" 라고 하는지 알 거 같다.




윗 세대에서는 자식은 최소 둘 이상씩 낳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게 당연했다. 내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선택할 수 있다.

결혼을 할지. 자식을 가질지. 희생은 어느 정도 할지.

동시에 지금 세대는 본인의 취향. 내가 무엇을 할 때 웃고 즐길 수 있는지 안다.

내 경우 이미 가정을 꾸렸고 자녀가 있다. 내 삶에는 이미 가족의 미래와 자녀를 위한 희생이 필연적임을 안다. 그래도 <현재의 내가 웃을 수 있을 때>라는 전제는 가능한 지키려 한다.

이유는 지금까지 쓴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삶은 짧고 한번 밖에 못 살기에. 건강한 시간은 더 짧고 언제 악화될지 모르기에. 죽으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기에. 자녀도 결국 부모를 떠나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야 하기에 그렇다. 이 말들이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내가 겪고 보아온 바로는 공감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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