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자녀 or 현재와 나
오랜만에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올해로 86세. 자녀 다섯을 키우셨다.
당뇨를 앓고 계시며 무릎과 허리가 특히 안 좋다.
어딘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혼자 몇 발자국 걷기도 힘드시다. 그래서 거의 늘 집에만 계신다.
병원 가는 날이 거의 유일한 외출이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가을이라 날씨도 좋은데.
제 차에 휠체어 싣고 어디 바람 쐬고 오실까요?"
많이 힘드시다고 답하신다.
"그럼 저 최근에 이사 갔으니 집 보실 겸 놀러 오세요"
그것도 쉽지 않다고 하신다.
가더라도 짧게 다녀와야 한다 말씀하신다.
이유는 무릎 상태나 당조절도 번거롭지만..
무엇보다 요새 화장실 가는 횟수가 많아지셨다고.
그래서 외출이 꺼려진다고 하셨다.
최근에 "92세 할머니가 살면서 가장 후회했던 점"
이라는 글을 봤다.
결국 말하고자하는 건 <중용>인 거 같다.
너무 미래와 자식에게 희생하지 마라.
현재. 너부터. 행복하게 살아라.
미래와 자식.
현재와 나.
이 둘의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것.
이 둘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것.
그러지 못하면 후회하게된다.
우리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생각났다.
먼저 울 아버지.
58세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자유로운 성격 탓에 우리 어머니 속을 많이 썩였고
저축의 개념도 거의 없으셨지만. 그만큼 본인께서 하고 싶었던 시도들은 충분히 하셨던 것 같다.
큰 심장 수술을 두 번 받으셨는데 그때마다 내게 말씀하셨다. 자기는 언제 죽어도 딱히 아쉽지 않다고.
물론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하신 말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진심으로 들렸었다.
반면 울 장인어른. 62세에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 내게 말씀하셨다.
너무 억울하다고. 이제야 자식 셋 외벌이로 키워냈고 조금 쉬려 하니 이렇게 병에 걸렸다고.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다.
흔한 외식도 여행도 거의 없던 삶.
일과 집의 반복. 그것도 주말부부.
장모님 속 썩이신 적 없고 정말 성실하고 자상한 가장이셨다. 젊은 시절부터 하고 싶으셨던 모든 도전 다 뒤로 치우고 오롯이 가족을 위해 사셨다.
죽음 앞에 미련 없다는 울 아버지. 반대로 억울하셨던 장인어른.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두 분의 삶 모두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것 같다.
울 아버지는 자유로우셨던 만큼 이혼과 경제적 불안정을 겪으셨다. 장인어른께서는 가족을 챙기시느라 본인의 삶을 충분히 즐기시지 못하셨다.
다시 우리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와서.
울 할머니의 일상을 보고 있자면 슬프다.
자녀들이 할머니를 신경 쓰고 계시지만
정작 주로 챙기는 자식은 정해져있으며,
챙기는 자식도 본인 삶이 여유롭지 않아 힘들어한다.
자녀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이미 건강이 상한 뒤라 혼자 할 수 있는 활동도 제한적이다. 보통 드라마 시청 정도.
윗글의 92세 할머니가 왜
"애지중지 키운 자식도 지 가정 차리면 그만이여"
"이제 좀 놀아볼까 했더니 옘병.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어" 라고 하는지 알 거 같다.
윗 세대에서는 자식은 최소 둘 이상씩 낳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게 당연했다. 내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선택할 수 있다.
결혼을 할지. 자식을 가질지. 희생은 어느 정도 할지.
동시에 지금 세대는 본인의 취향. 내가 무엇을 할 때 웃고 즐길 수 있는지 안다.
내 경우 이미 가정을 꾸렸고 자녀가 있다. 내 삶에는 이미 가족의 미래와 자녀를 위한 희생이 필연적임을 안다. 그래도 <현재의 내가 웃을 수 있을 때>라는 전제는 가능한 지키려 한다.
이유는 지금까지 쓴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
삶은 짧고 한번 밖에 못 살기에. 건강한 시간은 더 짧고 언제 악화될지 모르기에. 죽으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기에. 자녀도 결국 부모를 떠나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야 하기에 그렇다. 이 말들이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내가 겪고 보아온 바로는 공감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