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세바스티앙>
<세바스티앙(Sebastian)>(2024, 미코 미켈레)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성 노동은 말하기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다. 국가, 젠더, 방식에 따라 양상이 천차만별, <세바스티앙>은 그 다양한 갈래 중 하나의 이야기로, 성 노동 ‘보편’(그런 게 있을 수 있다면)의 사례보다는 ‘맥스의 경우’에 가깝다. ‘영국 런던에 살고 있으며 사회/경제/정서적 안전망이 어느 정도 있는 백인 시스젠더 게이 남성,이 다른 게이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기반의, 생계를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닌 성 노동’을, 성 노동자 그 자신의 입장에서 다루는 작품이다. 맥스의 위화감, 수치심, 쾌감,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하거나 그것을 뒤집는 찰나들은 배우의 얼굴에서 포착된다.
영화가 시작되면, ‘세바스티앙’인 채 고객을 만나는 맥스가 등장한다. 일을 끝낸 후, 회상하며 살을 붙여 픽션으로 재구성하는 그는 조금 신나 보인다. 그는 성 노동을 하며 기꺼이 객체가 되고 상대를 객체로 만드는 재미를 느낀다. 영화는 수많은 섹스신들을 연출하며, 맥스가 양쪽 모두 쾌감을 느끼는 순간을 얼마나 좋아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상세히 담는다.(브뤼셀 호텔방, 다니엘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섹스는 정황과 단편적 씬만 보여준다.) 그는 신체 사이의 교감을, 욕망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즐긴다. 영화에는 거울을 보며 자위하는 장면을 포함해 맥스가 거울 속 제 모습을 살피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다른 정서나 의미를 읽어내려 하기보단 주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맥스는 이 일로 자신감을 얻는 동시에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 소설의 화자를 1인칭으로 바꾸라는 제안을 듣고 망설이고, 제 생각을 열띤 태도로 털어놓다가도 꼭 ‘인터뷰’라고 덧붙인다. 맥스는 두 삶을 잘 분리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들은 처음부터 얽혀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작가 ‘맥스’로 참여한 자리에서 ‘세바스티앙’의 고객을 맞닥뜨리자, 맥스의 세계에는 본격적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맥스가 약에 취해 잠들어 일거리를 날리거나 인터뷰 자리를 무례하게 벗어나 고객을 만나러 가는 등의 장면을 보고, ‘주객전도’, ‘위기’, ‘중독’ 등의 단어가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중생활의 균형이 흐트러졌을 때, 해결책은 둘 중 하나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놉시스에는 ‘맥스가 소설 리서치를 위해 성 노동을 한다’는 정보가 있지만, 지금껏 화면 속에서 만난 그는 ‘글을 쓰기 위해 성 노동을 수단적으로 수행하는 맥스’보다는, ‘성 노동자이자 작가인 맥스’에 가까웠다. (엔딩에 이르면 스스로 분명히 정체화한다.)
니콜라스는 맥스가 자신만의 균형을 찾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맥스는 성 노동을 육체의 연결이라고 여겼고, 거기 매력을 느꼈다. 직장에서 일거리를 잃고 관심 없는 주제의 행사에 참여하게 된 맥스는 도피하듯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그가 바로 니콜라스다. 조심스럽고 어색한 태도로 맥스를 맞이한 그는, 뜨거운 눈길과 집요한 손길을 꾸준히 피하며 마실거리를 권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맥스의 욕망은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 재회한 그들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고, 맥스의 소설도 방향을 튼다. 니콜라스는 맥스에게 신선한 영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는 자다. ‘나이든 작가의 뮤즈가 된 매혹적인 젊은이’가 아닌, ‘젊은 성 노동자/작가의 뮤즈가 된 문화예술 애호가 노신사’라니. 이 권력관계가 뒤집힌 판타지는 제법 아름답다. 만남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맥스 쪽이고, 니콜라스는 기꺼이 그 위치를 받아들인다. 다니엘에게 폭력적으로 내쫓긴 맥스가 니콜라스의 도움으로 런던에 돌아오거나(‘구원’), 맥스의 소설을 읽은 니콜라스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응원을 보내는(‘허용’과 ‘지지’) 등의 전개 또한 ‘맥스의’ 욕망에 닿아 있다. 그들이 나누는 언어적, 비언어적 대화의 풍부함은 화면에 쌓여 어떤 파장을 형성한다. 이제껏 수많은 격정적인 섹스가 흘러갔지만, 가장 섹시했던 베드신을 꼽는다면 떠오르는 건 단 하나다. 그것이 소설이든 현실이든, 맥스가 ‘더 머물겠다’고 하는 장면은 나이든 게이 남성의 그것이 아닌 맥스의 환상으로 다가온다.
이 관계는 일대일 로맨스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는 니콜라스를 온전한 서포터이자 뮤즈로 맥스의 역사에 남기며,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분명히 한다. 맥스의 성 노동은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거나 나르시시즘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 또는 일생의 사랑을 찾게 해준 계기로 다뤄지지 않는다. (두 게이 남성간 이루어지는) ‘성 노동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만남, 퀴어의 역사와 유산을 교환하는 매개’라는 맥스의 말은 낭만화에 가깝지만, 그는 메시지라는 가면을 쓰고 스스로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한 것일 테다. ‘조너선’은 맥스가 만든 인물이나, 니콜라스와 맥스 사이에는 진실이 있었음을 영화는 명시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에 대한 안남의 묘사처럼- 직접 겪어야만 쓸 수 있는 종류의 글,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 당시 맥스는 안남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저도모르게 그런 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맥스는 엄마의 조언처럼 경험을 ‘혼자 간직하는’ 것보다는, 글로 풀어내 세상에 공개하는 행위에 더 아름다움을 느끼는 듯하다. 그럴 재능은 충분했고, 이제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분리해냈던 세바스티앙을 다시 품어서 빚어내려는 듯, 맥스는 소설의 시점을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꾼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맥스는 본명을 공개한 채 성 노동을 지속하고, 타인의 집이나 호텔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남자들을 부르고 돈을 받는다. 아마도 글쓰기처럼, 이 일 역시 살아가는 방식으로 택한 듯 보인다. 샤워를 마치고 집을 나선 맥스는 출판기념회 행사장으로 향한다. ‘질문이 너무 사적이지 않냐’고 걱정하는 스텝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말하며, 당당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영화의 엔딩이다.
젠더나 인종으로 인한 파워 다이나믹이 끼어들지 않은 성 노동을 다루었기에, 이처럼 명료한 결말이 가능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세바스티앙>은, 개인에서 출발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결국 다시 개인으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성 노동을 긍정한다. (낭만화까진 아니고) 로맨틱한 상상의 힘을 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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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현대의 성 노동자들이 주로 웹이나 앱을 기반으로 활동한다는 점이 언급된다. 물리적 공간에 머무르며 일하는 대신 온라인 프로필이나 연락처를 바탕으로 고객을 받는다면 얼굴이 쉽게 알려질 위험도 있지만, 비교적 신체적으로 안전할 수도 있겠다고 추측해 본다. 맥스는 대부분 예의를 갖춘 고객을 응대했으나, 다니엘과 같은 자로부터 폭력을 겪기도 했다. 맥스가 성 노동 일터를 바꾼다는 설정은, 본명 공개와 동일선에서 ‘숨기지 않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허나 낯선 장소에서 위험을 감각하지 않아도 되는, ‘호텔방에서 지갑과 랩탑 없이 쫓겨나 낯선 거리를 헤매는’ 상황을 막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도 있다. (조심스러운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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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오종의 <영 앤 뷰티풀>이 겹치기도 했는데, 맥스를 대하는 니콜라스의 시선에서 이사벨을 바라보던 알리스의 눈빛이 얼핏 보여서 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