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잇세이 as 타카하시 사토루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恋せぬふたり)>(NHK, 2022)
+ 약간의 <콰르텟>(TBS, 2017)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소갯말을 읽고 일단, 반가웠다. 그 다음은 익숙한 걱정의 차례였다. 소재를 왜곡하지 않고 다루었을지, 비약이나 대상화는 없을지, 성급한 ‘휴머니즘’에 가닿는 결말은 아닐지. 먼저 본 시청자들이 남긴 긍정적인 감상에 마음을 조금 놓은 채 관람을 시작했고, 몇 분 지나 더욱 반가워졌다. 단정한 태도로 양배추를 수습하는 마트 직원 덕이었다. 개성을 조용히 어필하는 외모가 붉은색 앞치마와 제법 어울린다. 사쿠코의 해맑은 텐션에 어색해하면서도, 그는 세심한 칭찬을 알아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와중 칼날 아닌 칼등으로 천천히 선을 긋는 듯한 거리를 유지한다. 사쿠코의 상사가 그들의 대화를 연애로 치환하자 언뜻 불쾌를 내비친다. 주변에 무관심해 보이지만 늘 귀를 열어두는 자, 팔을 둥둥 걷고 나서는 편은 아니나 가끔 옳은 말을 꺼내 이목을 끌어버리고 마는 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 똑바로 말한 후 곧 사과하는 그의 이름은 타카하시 사토루, 연기한 배우는 타카하시 잇세이다.
그의 출연은 ‘봐도 되겠다’고 판단한 까닭 중 하나였다. 필모그래피를 따라가거나 인터뷰를 살필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가치관은커녕 평상시 말투도 알지 못하는 배우. 그럼에도 왠지 믿음을 가지게 만든 것은 어렴풋한 <콰르텟>의 기억이었다. 그러한 인물을 그렇게 소화했던 배우라면, 적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대강 넘겨짚지는 않으리란 막연한 짐작이 들었다.
다시 찾은 <콰르텟>은 살짝 바래 있었다. 예닐곱 해의 간극은 첫 만남에서 느꼈던 공기의 신선도를 떨어뜨렸다. 사토루가 이 콰르텟과 한집에 살았다면 받았을 스트레스를 상상하게 됐다. 예상했고,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독보적인 각본을 쓰는 사카모토 유지 또한 동세대 다른 일본 작가들처럼 이성애중심주의를 기본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곤 했으니.(그래서 <괴물>이 유독 반가웠고) 허나 여느 철지난 ‘명작’들에 대면 <콰르텟>은 한참 양호하고 여전히 뛰어나다.
이에모리 유타카는 첫 등장부터 낯선 여성과 굿바이 키스를 하고, 여유롭거나 허세로운 태도로 차 뒷좌석에 기댄다. 이어 앞치마를 둘러매고 능숙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만고만하나 마냥 뻔하진 않은 플레이보이 자리를 가져가는가 싶더니, 의외의 민감을 드러내며 첫인상을 뒤집는다. 아쉽게도 유타카의 캐릭터는 사토루처럼 정갈하지는 못했다. 자주 반말을 쓰고, 친근과 무례의 경계에 있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제 기준에 어긋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는 조급해지고 만다. 말싸움에서 지기 싫어 따박따박 지르다 흥분해 오해를 사기도 하나, 옆에서 쿡 찔러주면 금방 가라앉는다. 그의 예민은 주로 (내가 먹을) 가라아게나 (내가 앉을) 변기 따위를 통해 자기중심적으로 발현되지만 완전한 이기심으로 모이지는 않는다.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틈을 감지하고 ‘저기 틈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난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대개 비슷한 타인을 알아채고 배려하게 마련이다. 가장 멀리 있을 듯했던 마키와 유타카의 합이 맞는 지점이 거기 있다.
스즈메를 향하는 로맨틱한 눈빛은 느릿느릿 뻗어 상대에게 닿기 전 굴절되거나 사그라든다. 무리해 곁에 두려 애쓰는 대신 포기하고 흘려보낼 줄 아는 것, 유타카의 장점이기도 했다. 다리를 쩍 벌리고 폼을 잡을 때보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 걸을 때, 능글맞게 플러팅할 때보다는 할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눈웃음을 날릴 때보다는 은근히 눈치를 살필 때- 유타카는 더 매력적이었고, 그다워 보였다. 기억만큼의 민감함은 아니었으나, 역시 이에모리 유타카와 타카하시 잇세이에게선 남다른 감수성과 발전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토루의 실마리 중 하나가 되었을 수 있겠다고 추측해 본다.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으로 돌아와 사토루를 관찰해 보자. 작품의 중심 소재는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이다. 사토루는 스펙트럼에서 밀접한 접촉 자체를 어려워하는 위치에 있다. 그는 섹슈얼리티로 규정되지 않는다. 허나 소수의 성적 지향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그가 타인을 멋대로 규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타카와 나란히 놓아보자는 초기 아이디어는 갖다버려야 했으나, 타카하시 잇세이가 한켠에서 가늘게 엮어온 실타래가 이 유일한 인물을 구체화할 좋은 재료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사토루는 폼 잡지 않고 우아하다. 차분하고 나직하며 발음이 분명하고 발성이 일정한 말투. 그것을 통해 전하는 문장들은 각본집이 있다면 소장하고플 만큼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울린다. 사토루는 기꺼이 민감하다. 설명하거나, 위로하거나, 맞서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태도를 입고 핵심을 건드린다. ‘원래부터’라는 건 아마도 없다. 거듭 배우고 생각하며 길러온 감수성이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이리라. 구부정하지만 정갈한 자세처럼-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 균형을 찾아내곤 하는 사토루는, 오히려 매초 고민하는 듯 보인다. 사토루가 눈을 내리깔고 “최악이다”라고 중얼거리면, 사쿠코와 함께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단순한 맞장구가 아니라, 타인이 겪은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충분히 공감하는 와중 섣부른 재단은 지양하는- 밀도있는 제스처라서다. 이와 더불어 한 박자 쉬고 답하는 버릇, 미소와 무표정의 경계에 있는 입꼬리 등, 타카하시 잇세이가 입은 디테일들은 인물에 입체성과 고유성을 더하며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작품은, 지속적으로 사쿠코를 젊은 남성 동료들과 엮으며 ‘농담’을 던지던 중년 남성 상사가, 사쿠코가 받아치자 “내가 방금 한 게 성희롱이냐”며 걱정할 정도의 의식이 생긴 사회를 다루고 있다. 허나 그가 이어 던지는 대사는 “젊은이들 무섭네”다. 학교에서 ‘LGBT’의 개념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회인 동시에,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쉽게 ‘정상가족’을 단정하고 덕담이라 여기며 ‘사람 좋게’ 강요하는(& 와이프와 합의 하기는커녕 계획적으로 숨기고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현실인 것이다. 일본에서 여성과 남성이 각각 마주하는 편견은 사쿠코와 사토루가 자라온 환경에 녹아들어 그들의 현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느 쪽을 더 압박했다기보단- 개인의 성향과 맞물려 달리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쿠코 자신이 장점이라고 언급한 “애교”-활기차고 붙임성 있는 성격-는 이성애중심주의의 필터를 거쳐 전형적인 여성성, “여지를 주는” 행위로 왜곡돼 왔다. 사쿠코가 ‘무언가를 한다’고 오해받아 왔다면 사토루는 ‘무언가를 안 한다’ 혹은 ‘무언가(남성성, 리더십이) 결여돼 있다’고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토루에게 부재하는 건 유해한 남성성이다. 무슨 일인지 바로 묻기보단 ‘이야기하고 싶냐’고 묻는 단계를 선행하고, 사소한 실수에 일일이 사과한다. 치밀하게 몸에 밴 예의의 대부분은 역지사지에서 출발해 공부하고 사유한 결과일 테다. 사토루는 관습이 비가시화한 영역을 세밀하게 인식한다. 1과 2중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을 때 3의 선택지를 제시하거나, ‘선택을 안 해도 된다’고 일러 주는 이. ‘누구든 그렇다는 말이 맞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를 거쳐 ‘누구든 안 그럴 수 있다’로 나아가는 촘촘하고 유연한 사고의 근육을 지닌 이. 그런 인물을 연기하려면, 배우 본인도 유사하게 사고하는 힘을 길러야 했으리라 짐작한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가가면서도 “굉장한 참견”이라고 어쩔 줄 몰라하는 등 자신의 “무례”는 과장하는 사토루, 사실 그는 타인에게 상당히 관대하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자주 지적하기 때문에 엄격하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사회가 그만큼 무감한 탓이다. 대뜸 일터에서 블로그를 들이미는 사쿠코와 선뜻 대화를 나누고, 가족이 되자는 갑작스런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이니. 소중한 집에 자꾸만 멋대로 들어오는 사쿠코의 주변인들을 그는 억지로 환대하지는 않으나 적당히 손님으로 대접한다.
이러한 면은 ‘카즈 사태’를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끈질기게 “납득”거부 하며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성애로 환원시키는 카즈, 사토루는 지속적으로 그 자발적 무지에 대한 불쾌와 분노를 표출한다. 터트리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춰 꾸준히, 정확하게. 한심하다는 투로 반박하고 설명하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픽션인고로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하는 표현들이다. 타카하시 잇세이가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힘을 빼고 열어두므로, 장면들은 필요에 따라 가볍게 넘어가거나 무게있는 집중을 유도한다. 일련의 시끄러운 에피소드를 지나며 열심히 배우고 나름대로 알아가는 카즈를 보면서- 아직 한참 멀었음을 짚는 대신 발전한 바를 칭찬하는 사토루를 보라, 이 얼마나 대인배인지.
사토루는 삶의 방식을 신중하게 결정하고 실천해 왔다. 조심스럽게 저만의 성을 쌓아온 사람이 지니는 아우라가 그에겐 있다. 클로짓이라기보단 ‘굳이 말하지 않는 편’, 주로 차단하거나 멀어지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 왔다. 반듯한 설명과 질문, 때로는 한숨이나 냉소로- 무례와 몰이해에 대응하며 기꺼이 ‘유난한 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토루가 사쿠코의 멘토, 작품의 기준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인물 간 역학은 그리 일방적이지 않다. 사토루는 사쿠코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균형을 잡도록 돕고, 사쿠코는 사토루가 보다 ‘관련되고’ “최선”을 추구하도록 돕는다. 각자 괜찮은 사람들이고 그것을 상호 인지했기에,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서로의 “아군”이 되어 줄 수 있었을 테다.
그랬기에, ‘힘내는 중’인 카즈가 사쿠코에게 가족이 되자는 제안을 한 후, 사토루는 ‘아무렇지 않지가 않아’진다. 누군가는 겉만 보고 이성애 로맨스의 틀에 끼워버릴 수도 있을 정서에서, 타카하시 잇세이는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운을 걷어내되 보편성은 남긴다.(카즈 역 카마 쇼고에겐 그 기운이 넘친다. 그는 그래야 하는 역할이었다.) 정든 타자가 난 자리를 떠올리면 상상되는 외로움, 독점욕과 연애감정 없는 아쉬움, 더하기보단 덜어낸 섬세한 전달법에는 익숙한 클리셰로 환원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하루의 작은 규칙들을 중요시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을 경우 사과하던 사토루가 ‘균형을 잃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의 균형,을 타카하시 잇세이는 훌륭하게 잡아낸다.
‘퀴어한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거나 받아들인 계기’는 현실에서도 픽션 서사에서도 필수는 아니다. 다만 작가와 감독은 사쿠코의 시선에서 출발해 사토루를 점차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그의 ‘모먼트’를 풀어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듯하다. 사쿠코가 성적 접촉의 불쾌함에 대한 기억을 홀로 품고 있었다면, 타인의 살과 닿는 것 자체가 어려운 사토루는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상처를 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토루는 인연을 찾아다니며 가까이 끌어당기는 자는 아니나, 일상 속 적당한 반경에 소중한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조모의 바람으로 연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하루카를 다정한 친구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심사와 시간을 공유하는- 이런 관계가 부부라면, 이대로 부부가 되어도 아주 싫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루카와 조모의 기대에 맞춰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문장 말미들이 모호한 것은 사토루의 언어로 듣지 못해서다. 타카하시 잇세이의 낯빛을 관찰하며 추측해 보는 것이다. 하루카의 부탁에 반지를 꺼내는 그는 뭐랄까,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가능할 리가. 움직이던 손이 멎고, 떨리기 시작한다. 사토루는 하루카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줄 수 없다. 아마도 하루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없으리란 걸 한 번 더 깨달았을 순간이다. 사과를 반복하는 목소리는 잠기고 흔들린다. 가슴에서 비롯된 잔물결이 만든 미세한 진동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그의 내면에 무수한 빗금을 긋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화, 완전히 “흐트러져” 균형을 잃고 다시 새롭게 세우는 장면이 있다. 사쿠코가 건넨 “좀처럼 없었던 발상”을 듣고 “최선”을 그려보는 사토루. 멋진 대사는 전부 키시이 유키노에게 넘긴 채, 타카하시 잇세이는 오롯이 리액션에 집중한다.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그 고요한 몰입의 흐름은 생소한 파동으로 번져 화면을 채웠다. 말하자면 클라이맥스였으나, 과한 음악이나 집요한 클로즈업을 자제하고 두 사람의 리듬과 공간을 존중하는 연출이 그것을 온전히 담아냈다. 어떤 문장도 성에 안 차리란 걸 알고 있으므로 세부 묘사는 영원히 미룰 것이다.
조금의 판타지를 얹은 결말이었으나, 그늘이 걷힌 사쿠코와 사토루의 낯을 보고 통째로 납득했다. 두 배우의 연기와 맞물려 완성된 명장면들을 보고 작가와 감독, 스텝들도 보람을 느꼈을 것 같다. 사토루의 모든 장면과 대사가 너무나 귀했다. 그가 이리도 드물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바탕은 물론 각본이다. 그러나 그를 스크린에 불러올 배우가 타카하시 잇세이여야만 했음을 의심할 시청자는 별로 없으리라.
내가 바라본 타카하시 잇세이의 강점은 ‘무얼 할 수 있는가’ 보다는 ‘무얼 안 할 수 있는가’에 가깝다. 그동안 목격했던 몇몇 찰나들에서 얻은 인상이 사토루를 살피며 선명해졌다. 내면에 축적한 고민의 흔적이 외면에 자연스레 반영되는, 그런 종류의 ‘안하기’라고 적어본다. 그는 과시하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로맨틱하지 않으면서 다정하고, 전형성을 죄다 털어낸 채 매력적일 수 있다. 사토루의 고유한 표정들은 단지 ‘그럴듯한 연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인물이 ‘되기’보단 인물과 자신의 접점을 파고들어 신중하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타카하시 잇세이가 드문드문 쌓아온 어떤 캐릭터성이 변이와 진화를 거쳐 유일한 모양의 열매를 맺었다고 할까. ‘완결’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 특정한 결실은 오히려, 이 배우가 앞으로 뻗을 가지들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해보게 한다. 그럼에도/그러므로, 타카하시 잇세이가 누구인가라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은 상태로(불가능하기도 하고), 그의 인물들을 선택적으로 관람하고 또 좋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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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시 사토루에 관한 덧말
- 사토루의 불편은 소외된 곳을 감지했을 때 ‘안절부절못함’이 된다. 미노리와 다이스케가 언성을 높여 날선 말을 던지는 동안 사토루는 그들의 딸 마야를 살핀다. 강한 감정이나 커다란 제스처와는 멀어 보였던 그는, 큰 소리로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겨우 견디며 ‘제발 그만’을 부탁한다. 거기서 습관적으로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설득되는 장면. 타카하시 잇세이가 전달한 사토루의 됨됨이는 이 모먼트를 의외의 면 보다는 일관된 성정의 다른 발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 모아둔 쿠폰 유효기간이 모두 오늘이라며 자책하거나, 야채나 가게에 관한 질문을 받고 언행이 슬며시 분주해지는 등, 사토루가 가끔 보이는 작은 틈들도 자잘한 시청 포인트. 사쿠코의 수퍼액션에 머뭇머뭇 리액션하거나 꾸준히 미세하게 곤란해하는 사토루를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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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텟>이 대표적이었으나 다는 아니었다. <민왕>에서조차, 타카하시 잇세이는 문제 많은 세계에 충실하게 녹아들면서도 무해함을 간직했다. 선택적 관람을 결심한 계기는 <나기의 휴식>. 그 안에서 타카하시 잇세이는 너무도 이상했다. 연기가 어색했나, 대사가 작위적이었나. 캐릭터가 지닌 유해한 남성성이 배우의 피부 주위를 겉돈다는 감각이 내내 신경을 긁어, (쿠로키 하루의 곱슬머리에도 불구하고) 도중 시청을 멈추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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