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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ya Jan 06. 2024

무례함을 이해하려는 시도

춘추야, 여유를 가져라!

고등학교 수학 시간. 


활짝 젖혀진 책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푹 숙인 고개 사이로 떨어진 눈물은 책 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기억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호랑이 같던 수학 선생님은 나에게 모진 말을 던졌다. 그 말이 꽤나 아팠던 것이다. 조용히 숨죽인 학생들 사이에서 나에게만 무방비로 떨어진 공격을 가뿐히 웃어 넘기기엔 난 너무나 어렸다.  



"춘추야, 여유를 가져라."

선생님께서는 당황한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이 꽤나 인상 깊었다. 모욕적인 발언보다 그 말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래서 가끔 그런 무례함에 맞닥뜨릴 때면, 나의 여유를 탓하는 버릇이 생겼다. 무례함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한때는 그리하여 여유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반응 기제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혹은 '내가 여유가 없어서 이런 장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 



최근 응원과 조롱이 섞인 무례함을 맞닥뜨리곤 이러한 발상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례한 데는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일종의 무시, 질투, 비하, 무조건적 이해 같은 폭력성을 띤다. 그리고 이런 말은 너무나 무심코 던져진다. 갑자기 꺼져버린 온수가 냉수로 바뀌어버리듯이, 몸은 경직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어쩌지 못한 나를 내내 탓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움을 느낀다. 물론 내가 충분히 예민하고 여유가 없던 계절도 있다. 마치 겨울철에는 조금만 차가워도 피부가 움츠러들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무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감히 말한다. 



나 또한 무심코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살았을 날들에 반성문을 올린다. 물론 "너 무례했어"라는 말 앞에는 나도 모르게 "아니 그게 아니라..."가 정준하처럼 튀어나오겠지만. 나에게 무례한 감정을 준 그 사람들도 성토의 기회를 준다면 꽤나 억울하겠거니 하며. 흘러가자. 물론 변명 안에 미안함이 녹아날 것을 알지만 나 또한 서로의 불편한 시간에 우리를 가둬두고 싶지 않기에 그렇다. 나 또한 그랬다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담백하게 남기련다.






아무래도 무례함의 반대말은 존중에 가깝다. 존중에는 이해도 필요 없고,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여유보다는 존중이라는 단어가 좋다. 여유는 내가 소유하는 성질이라면, 존중은 내가 베풀 수 있는 성질이다. 그것도 얼마든지!



"춘추야, 여유를 가져라!"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춘추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정도의 덕담 같아 웃음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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