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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Aug 27. 2021

역치


1.

예전에 학원 알바를 할 때에 중삐리들한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 하지 말라던 말이 - "그냥"이었다. "BTS가 왜 좋은데?" "그냥요." "담임이 왜 싫은데?" "그냥요." "왜 피자 말고 치킨이 좋은데?" "그냥요." "그 친구가 왜 좋은데?" "그냥요." "이유도 모르는데 어떻게 좋아하고 싫어할 수가 있어?" "몰라요, 수업이나 해요."


애초에 삶이 그냥이긴 하다. 그냥저냥, 저냥그냥. 그래도 선생 나부랭이로서(사실 알바였지만) "니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결국 너희들의 취향이 되고, 취향이 곧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는 거야. 남도 나를 모르는데 적어도 나는 나를 알아야지. 내가 뭘 좋아하고, 그걸 왜 좋아하고, 그걸 설명할 수 있어야지. 니들 지금 하는 영어 수업을 떠나서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거야."


라고 길게 떠들었다. 뭣도 모르면서. 예전에 군대 첫 휴가 나왔을 때는 진짜 100일 휴가 나온 신병마냥 - 정확히 그거였다 - 수첩에다가 먹고 싶은 것을 가득 채워 나왔더랬다. 그래봤자 뱃구렁이 적어서 밥 한 끼 먹고 나자마자 뭐든 다 귀찮아졌다. 스테이크니 케이크니 뭐니. 취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있다. 음식도, 음악도, 기타 톤도, 게임도, 소설도. 다만 나라는 인간 자체는 역치가 굉장히 낮다. 성격은 굉장히 예민하지만 까다롭지 않다. 이율배반적인가.


2.

비싸고, 새롭고, 맛있고, 분위기 좋은 가게에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은 있다. 하지만 귀찮고, 돈도 없고 하니까 맨날 가던 그 가게에서 7천원 짜리 백반을 먹는다. 그러고서는 배도 부르니까 만족해 버린다. 기타 톤도 그렇다. 좋은 이펙터, 심혈을 기울인 EQ 셋팅, 픽업 셀렉터를 3단으로 하느냐 4단으로 하느냐 따위를 놓고 40분 동안 기타 선생님이나 밴드 형님이 고민해서 결정한 톤을 들어 보면, 확실히 좋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충 프리셋 잡고 치는 것도 소리가 나쁘지는 않다. 내 귀에는 충분히 괜찮게 들리니까. 야, 너 스피커 좋은 것좀 사라. 어후, 못 들어 주겠네. 귀 썩겠다!라고 Y형이 이야기해도 나는 "그런가요? 노래가 좋으면 됐죠 뭐ㅎㅎ"하고 넘어가 버린다. 비싼 술, 한 병에 12만원씩 하는 위스키를 J가 가져와서 마시면 와, 이거 괜찮은데? 확실히 향이 달라. 그럼 뭐하나. 다음날에는 어차피 맥주나 마시고 있다. 영화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다. 쉽게 만족하고, 쉽게 웃고, 쉽게 감동해 눈물을 흘린다. 그나마 내가 굉장히 까다로웠던 부분이 남이 쓴 글인데, 요새는 나도 글을 아예 읽지도 쓰지도 않으니까(오버워치 패치노트 같은 거 말고는), 남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그냥저냥 들을 만하고, 그냥저냥 먹을 만하고, 그냥저냥 할 만하고, 그냥저냥 마실 만하고, 그냥저냥 볼 만하고, 그냥저냥 살 만하다.


그냥저냥 만족해 버린다.


3.

이게 나쁜 일일까, 생각해 보면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자꾸만 정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세상에는 98%를 99%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극한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새로운 영역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소믈리에라든가, 오디오 매니아라든가, 사운드 엔지니어라든가. 꼭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늘은 여기에 가 볼까?' '이번에는 이런 옷을 입어 볼까?' '오늘은 저쪽 길로 가 보자!'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나는 동경한다. 친숙한 영역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공부를 하면서까지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만큼 더 넓어진 세상에서 새롭게 머무를 자리를, 선택지를 찾기 위함이 아닌가. 익숙함에 속아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내 경우에는 잃어버린다기보다는 잠겨 간다는 기분이다. 어설픈 만족과 낮은 역치 때문에.


조금 더 불만스러워져야 할까. 어떻게 해야 체념과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낮은 역치는 어떻게 올릴 수 있을까. 코로나가 끝나면 좀 괜찮아질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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