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 근처엔 마트나 편의점이 없다. 뭐든 필요하면 차를 끌고 나가야 한다. 담배가 떨어져 가까운 편의점을 찾았다. 주인이 내게 어디 사느냐고 묻는다. 저 건너 호숫가 어디라고 알려줬더니 “그 동네 텃세가 심하다던데 잘 지내시나 봐요?”한다. “어? 그런 것 전혀 없는데... 왜 그런 소문이 났죠?”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 이웃분께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90년대 후반, 댐 건설로 인공호수가 만들어졌고 수몰지구 이주민 중 몇 분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세월이 흘러 외지인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 내가 사는 집이란다. 처음엔 자주 술자리도 가지며 잘 어울리는 듯했지만, 나중엔 다툼이 잦아지며 반목하게 됐다고 한다.
격화된 싸움으로 살던 이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게 되었고, 나는 그런 사연을 모른 채 이곳에 왔으며, 그 오랜 소문은 시골 구석구석에 긴 꼬리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랫집과의 경계도 그런 다툼의 결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엔 경사진 돌 축대였다는데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직 콘크리트 옹벽으로 바뀌었다.
지금 옹벽 아래로 보이는 아랫집은 누가 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다. 올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작년에 포크레인으로 마당을 갈아엎은지라 검붉은 땅에 새싹이 산뜻했다. 어쩐 일인지 이후로 집주인의 발걸음이 뜸해졌고, 한여름이 되자 휘몰아치듯 성장한 들풀이 거친 행색의 마당을 만들었다.
거침없이 자라던 잡초를 평정한 것은 칡넝쿨이었다. 감아올린 가지마다 넓은 잎으로 다른 초목을 뒤덮어 파도처럼 굽이쳤다. 그 아래에선 햇볕을 갈구하는 식물들이 신음했고 빈집에서의 승부는 그것으로 끝났다. 600평 너른 땅을 점령하는데 불과 몇 달이면 충분했다.
칡넝쿨의 무서운 번식력에 소스라치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선 부조리한 마음이 싹텄다. 포로가 된 이웃 마당에 대한 가여움과 내 뜰은 괜찮다는 안도감이 충돌했다. 옹벽을 넘어오면 어쩌나 하는 옹졸한 염려는 실제가 되었고 허겁지겁 걷어냈다. 어디서 들었는지 언뜻 ‘네 이웃의 불행을 조심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 손 닿은 곳이 자연에겐 고통이고 아물어야 할 상처다. 그러니 개발된 땅이 원래의 숲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자연의 순리겠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를 막아서며 힘을 겨룰 뿐, 애초에 풀은 잘못이 없다. 상처 낸 개발자를 탓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아랫집의 주인은 이 마을에 여러 채 집을 지은 건축업자라고 들었다.
지난날 싸우던 이들이 떠난 마을은 조용하다. 할머니들은 매일 경로당에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해가 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외지인으로 사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가족처럼 지내진 않지만 서로 외면하지 않는다. 가끔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좁은 동네 소식을 금세 꿴다. 아랫집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전언이다. 칡넝쿨은 이미 풍문으로 들었던 것일까?
내가 오기 전 우리 집은 주인이 세 번 바뀌었다. 30년 가까이 된 슬라브 주택과 마당은 그동안 조금씩 달라졌다. 주택과 뜨락 모두 정성의 시간과 옷을 입었다. 나는 안다. 이곳을 거쳐 간 집주인들은 이웃과 서로 다투고 반목했을지언정 다정한 심성으로 집과 마당을 보살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 그 정성이 고스란히 내게로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령 30년 가까운 나무들이 두루 건강하다. 뒤뜰엔 오래된 과실수가 여럿 있어 계절마다 거두어 먹는 기쁨을 누린다. 50여 종이 넘는 나무와 100종이 넘는 초화류, 그 밖에도 텃밭 작물을 키우고 바라보며 수확하는 시간을 즐긴다.
현재의 선택과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끝을 볼 만큼 오래 살 리도 만무다. 과연 나는 텃세를 부릴 만큼 긴 세월 이곳에 터를 잡을 수 있을까? 부동산이 아닌 뜨락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서른 살 다 되어가는 정원에 그저 한 해씩 보태 가다 보면, 국물이 그릇을 닮듯 마당에 내 모습도 담기겠거니 싶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