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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과 춤을 허락한 건 벌레다

by 잼스

아내가 지네에 쏘였다. 소독했지만 독이 있어 금세 부었다. 붉은 다리를 가진 왕지네. 이름만큼이나 커서 15cm가 넘는다. 곤충이나 거미, 때로는 개구리 같은 작은 동물도 먹는다니 잘못했으면 엄살 보태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길고 검은 20개의 등짝에 40개 다리가 꿈틀거리면 본능적으로 질겁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TV 프로그램 ‘한국기행’에 지네가 나왔다. 지네를 잡아 파는 ‘안마도’ 이야기다. 오래전 기억 속 한약방 쇼윈도가 떠올랐다. 뱀과 함께 나란히 다발로 전시되어 있던, “애들은 가라”는 미지의 묘약 말이다. 막연히 정력제라고만 짐작했는데 그건 아닌 듯하다. 맞다면 멸종되었을 텐데 말이다. 아토피에 효능이 있단다.


이번엔 내 차례다. 밭에 나갔다가 개미에게 여러 군데를 물렸다. 가려워서 긁었더니 여기저기 빨갛게 부어오르고 열도 난다. 내 잘못이다. 밖에선 옷차림을 단정히 해야 하는데. 수확의 기쁨에 취해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마당을 쏘다녔으니.


개미는 폭력적인 동물이다. 자칫 개미집을 밟고 섰다면 봉변을 피할 수 없다. 작다고 깔보며 한눈 판 사이, 순식간에 떼로 기어올라 깨문다. 파괴적인 벌레다. 마당의 정자와 그네를 꾸준히 쏠아서 넘어뜨린 건 커다란 짐승이 아니었다. 나무마다 썩어가는 부위엔 어김없이 개미 떼가 들락거리고 있다. 불행히도 시골엔 개미집이 지뢰밭처럼 널렸다.


그리마 한 마리가 화장실 구석으로 부리나케 도망간다. 지네 보고 놀란 가슴 그리마에 펄쩍 뛴다. 해충은 아니지만 외양이 징그럽다. 돈벌레라 불리는데 어디에 쌓아놓은 건지 도통 찾기 어렵고, 배수관마다 트랩이 설치되어 있건만 어디로 드나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밤엔 주방에서 작은 바퀴벌레와 마주쳤다. 다급히 휴지를 찾는데, 두세 걸음 떨어진 곳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다행히 잡았지만,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사실 정원의 풀과 나무, 습기와 그늘은 벌레에게 더없이 살기 좋은 서식지다. 실내의 청결 상태와 상관없다. 틈이 있으면 드나드는 거다. 전문가의 분석이다.


거미줄도 사방에 널렸다. 줄을 따라가 보니 그 거리가 상당하다. 족히 2~3미터는 되는 것 같은데, 타잔처럼 줄타기를 하는 것일까? 처마, 나무, 꽃을 가리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간 얼굴에 칭칭 감긴다. 어떤 날은 밤새 CC TV에 출연하기도 하고, 센서등을 켰다 껐다 희롱하기도 한다.


고추, 오이엔 진딧물이 잔뜩 꼈다. 양배추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눈앞을 가리는 날벌레도 집요하게 쫓아오고. 모기들이 귓전에서 연신 앵앵거린다. 나방쯤은 나비처럼 여기고, 노린재에도 둔해졌지만, 깍지벌레나 미국선녀벌레 등은 나무와 풀꽃의 건강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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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벌레들의 세상이다. 꿈틀대며 흙을 숨 쉬게 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며, 성장해선 꽃가루를 퍼 나른다. 이런 움직임은 애당초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태어났으니까 살겠다는데, 생명이 있으니 꿈틀거리고 애쓰는데, 모조리 잡아 없애려는 게 할 짓인가 싶을 때가 많다.


의도한 것도 아니다. 물리고, 쏘이고, 붓고, 긁적거리고... 한 해에 몇 번은 겪게 되는 일이지만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벌레는 없다. 적당한 거리를 만드는 건 사람 몫이고 풍요로운 자연을 가까이하고 싶다면 감내해야 하는 불편한 동거다. 너그럽게 불청객과의 춤을 허락한 건 내가 아니라 벌레들이니까.


장마철이다. 이 녀석들, 제 세상 만났다 싶겠는걸? 그래, 오래 살아 보니 사람에게 쏘이고 물린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가더라. 그래봐야 너희는 한철 아니냐? 그래도 더는 안 된다. 건드리지 않을게. 싸우지 말자. 내 먹을 건 조금 남겨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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