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뜰이 있다. 군락을 이룬 식물은 없다. 그래서 단출하고 소박하지만, 다양하다. 계절에 맞춰 모종을 심지 않아도 철마다 여기저기 다른 꽃이 핀다. 같이 산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얼마나 내가 좋아하는지 알아주면 좋겠다.
간혹 식물을 심을 땐 적당히 간격을 둔다. 나중에 커지거나 번질 걸 염두에 두어서다. 사이사이 희붉은 빈 땅이 거슬리지만, 시간을 두고 식물이 스스로 채우길 기다린다. 기대와 달리 잡초가 먼저 꼬이기도 하지만, 그 배려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계획을 세우고 그림을 그려 내 생각 그대로 뜰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비와 바람, 태양과 흙 속 사정까지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일 가위와 호미를 들고 설친다 해도 결국 풀꽃들은 저들이 생겨난 대로 자랄 테니까.
같은 정성을 쏟아도 어떤 식물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뿌린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자라는 게 아니라 각자의 조건에 맞춰 생장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기준에 길들지 않는 건 본래의 성질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사람이 뜻한 대로 맞춰진다면 식물이 아니라 구조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의외의 모습에 감동한다. 겨울을 나지 못하는 '서향'이 맨땅에서 아기처럼 자라거나, 존재를 몰랐던 '붉나무'를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다. 다락같이 피어난 '치자꽃' 향에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고, 바닥에 누운 '애기땅빈대'처럼 엉뚱한 잡초에 매료되어 한눈을 팔기도 한다.
이처럼 내가 사랑하는 건 생명이다. 뜨거운 햇볕의 열기, 열기만큼 왕성한 생기, 생기 도는 색깔은 그걸 지켜보는 나에게 생생하게 전해져 씨알 굵은 감자 만드는 법 따윈 잊게 만든다. 그렇게 여유로움에 기대다가 훌쩍 자란 '바랭이'에 힘겨워하는 건 나중 일이다.
생명은 서로 다른 경로를 동시에 밟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누구는 운명이라 하고, 누구는 선택이라고 하는 데, 그 말엔 돌이킬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다.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흘러온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 말이다. 지나가 버린 그 순간,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고, 현재의 질이 달라졌을 것만 같은, 돌아가고 싶은 그때 말이다.
뜨락엔 리셋이 있다. 엄밀히 말해 다른 세상이지만 재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겨울을 따라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간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채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상상을 펼치는 이 새로운 삶은 내가 살아 움직이는 동안 해마다 열린다.
물론 식물을 통한 대리만족이다. 마당은 일 년 사계절이라는 오묘한 시간을 통해 지금 안되면 나중에 다시 해보는 걸 허락한다. 피었던 자리에서 다시 볼 수도 있고, 아예 새로 시작할 수도 있다. 또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욕심도 내려놓게 된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살지 못했던 지난날이 있었고, 이제 걱정할 미래가 줄어드니 현재의 의미가 점차 선명해지는 듯하다.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 순 없지만, 아름답게 보면서 사는 방법을 익히며 살 수는 있다. 그런 면에서 뜨락은 세상을 아름답게 볼 기회를 준다.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속도가 아니라 정도다.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뜰은 모든 생명 안에 각자 알맞은 한도가 있고, 다른 능력이 담겨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인시켜 준다. 길들지 않은 채로 지금을 사는 아름다운 뜰, 이 땅이 사랑스럽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