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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모니카 Oct 28. 2020

그 시계는 다신 안 찰 거야


음~맛있는 냄새...! 숙소에 미역국 냄새가 진동을 한다. 거실로 나와 보니 벌써 식탁에 아침이 차려졌다. 매 끼니마다 귀한 한식, 아낌없이 올려졌다. 마른 김에 간장(여기서는 주로 일본식 간장만 있어서 한식간장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말 소중함), 아껴두었던 어묵볶음에 김치까지!

오늘은 내 생일이다. 엄마는 늘 생일이면 아침상을 선물로 주신다. 맛있게 차린 밥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들까지 넘치게 차려주신다. 올해는 순례 중인데도 어김없이 맛난 선물을 주셨다.



자리에 앉아 한 술 뜨려는데 루칠라가 내 숟가락 옆에 작은 봉투 하나를 놨다. 종이를 오려서 직접 만든 게 귀여웠다.

'언니 생일 축하해'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꺄아! 세상에 이게 뭐야~~~

모니카 미니미가 들어있었다. 모자 쓴 모습이며 가방 들고 포즈 잡은 모습까지 어쩜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는지! 루칠라의 사랑스러운 선물에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와 한바탕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만들었니! 언니 진짜 너무너무 좋아. 고마워 찌오야! (내가 동생을 부르는 호칭)'



엄마표 참치 미역국은 언제 먹어도 최고다. 뜨끈한 국물에 밥 딱 말아서 김치를 올려 먹었더니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오늘 생일 선물로 뭐 사줄까?
'선물? 음..... 엄마'
'왜?'
'나 시계 갖고 싶어요'
'시계?'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했다. 야고보 성당 옆에 마련된 고해성사실로 들어갔다. 한 사람 기대면 딱 맞을 만큼 자그마한 나무 책상을 가운데 두고 신부님과 마주 앉았다. 미워했던 일, 용서하기 힘들었던 사람들. 그동안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이 무겁고 오래도록 아팠는지 마음속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짧고 굵게.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신부님께서는 고백을 다 들으시더니 갑자기 종이 한 장과 펜을 책상에 놓으셨다. 지금 가장 힘든 일 10가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 10가지를 쓰라고 하시며. 갑작스러운 지령(?)에도 불구하고 꼭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처럼 써나갔다. 이런 내가 더 당혹스러울 만큼 막힘없이 적었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셨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말기 암 중에서도 말기라고 하실 정도로 중증환자셨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이부터(여섯 살 때쯤) 였으니까 거의 20년 이상 우리는 늘 술에 취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일 년 중에 거의 300일 가까이 술을 드셨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안 살림이며 창문을 부수는 건 기본, 폭언 폭행까지 술주정이 매우 심각했다. 어린 동생은 엄마 등에 업히고 나는 엄마 손을 붙잡고 밤마다 도망쳤다. 하루는 이웃집에, 또 하루는 성당에 아는 자매님 댁에, 그도 어려울 땐 24시간 찜질방이나 빈 집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 갔다.

매일 눈물이 멈추질 않고, 가슴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무서웠던 밤의 나날들이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셨다 보니 자연스레 집안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 매일 먹고사는 일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빚을 지는 일은 갈수록 커졌다.

아버지께선 어릴 때부터 받은 많은 상처로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시고 술만 드시면 밤새 가족을 붙잡고 이야기하기를 수없이 반복하셨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가 아버지께 머무르다 보니 병이 되었
고  우리 가족은 고스란히 이 상처를 함께 떠안은 채 살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하면 몇 배 더 힘이 세지고 눈빛마저 무서운 아버지. 술주정을 말리고 도망치려면 실은 나도 무섭고 감당이 안될 만큼 힘들었지만, 엄마와 동생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상황이 늘 급박하다 보니 그 순간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 날 하루 어디서든 잠을 자고 어떻게든 끼니를 때우며 지날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어서 오늘 밤이 가고 새 아침이 오기 만을 바랐던 나날들. 아파도 아플 수 없었고, 슬퍼도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재. 침묵과도 같았던 고요한 시간들은 우릴 한 없이 멍하게 만들었다. 발 쭉 뻗고 잠을 자도 되련만. 약속이란 것도 해 보고, 밥 한 끼도 편하게 먹어도 되련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아버지와의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는 떠났다. 낡고 덜덜 대는 차라도 굴러만 가면 무조건 몰고 어디든 갔다. 한국에선 거의 일 년, 전국 가톨릭 성지를 중심으로 떠돌았다. 낯선 곳 낯선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유롭고 싶었는지.


신부님께서는 이제 내 마음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책임감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라고. 자유로워지라고.

나는 어디를 가든 아버지가 차시던 시계를 갖고 다녔다. 노동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께 편하게 쓰시라고 선물해드렸던 시계.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물건이었다. 어느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모니카. 아버지가 밉지도 않아요?'
'......'

죽도록 미웠다. 아버지라 부르는 것조차 아팠다. 그런데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니까. 아버지이기에.

나는 미운만큼 아버지가 불쌍했다. 세상 못 할 짓은 다 했다고 사람들이 손사래 치고 혀를 차도. 아버지 인생이. 한 사람의 삶이 가여웠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시계를 차고 다닌 건.


고해성사실에서 나와 야외벤치에 풀썩 주저 았다.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아버지 시계를 풀었다.


아버지 시계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 한 그릇을 뚝딱 맛있게 비우고선 우리는 택시를 불렀다. 숙소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큰 마트를 찾았다. 하얀색과 감색 스프라이트 무늬가 예쁜 시계 하나를 골랐다.

'엄마. 나 이거 하고 싶어요.'
'어디 손목에 차 봐 봐'
'예쁘다'

시계 가게를 나와 맞은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마르게리따와 커피를 주문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음식이었지만 화덕에 구워 불향이 살짝 베인 기름기 없는 담백한 도우와 진한 토마토소스, 부드럽고 고소한 치즈. 오늘따라 유달리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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