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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모니카 Oct 31. 2020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메주고리예에서의 일정이 이제 나흘 남았다. 두 달 가까이 있다 보니 이제는 숙소가 아니라 그냥 우리 집 같다. 이동하려면 짐을 싸야 하는데 손에 안 잡힌다. 마음이 시원섭섭하다.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메주고리예를 순례하면서 썼던 글입니다)


두 개의 종탑이 나란히 있는 야고보 성당에서 매일 오후 6시 미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메주고리예에 울려 퍼진다.


요즘 날씨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오늘 낮 기온이 37도씨. 이런 날씨에 돌아다녔다가는 쓰러지기 십상일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오후 3시를 넘어서 슬슬 나왔다. 으... 살이 뜨거웠다. 몇 걸음 안 걸었는데 땀이 비 오듯 흘렸다. 엄마는 거북이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겨우 걸으셨다.



메주고리예는 6월부터 땡볕더위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성당 앞에서 택시를 탔다. 지난번 갔던 발현산을 다시 찾았다. 매번 비 오는 날만 다녀온 것 같아서 해가 쨍쨍한 오늘, 다시 가고 싶어 졌다.


발현산 입구 블루크로스 앞에 내렸다. 돌이 반질반질한 데 해가 비춰 반짝거렸다. 원래 발현산은 석류나무가 많아 '석류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후로 <발현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파란 십자가, 블루크로스 앞에는 늘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블루크로스에 올라갔더니 그새 석류나무에 꽃이 폈다. 나무 한 가득 붉은빛이 더운 줄도 모르고 한껏 뽐내고 있었다. 십자가 앞에 앉았다.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사람도 별로 없고 간간이 바람만 살살 불었다. 고요했다.


석류를 열매로만 알았지 꽃은 처음 본다. 빨간 열매 만큼 예쁘다


기도를 거의 마칠 무렵 갑자기 한국어가 들리면서 부산스러웠다. 한국에서 오신 몇몇 분들이 성모님 상 앞에서 사진을 바쁘게 찍으셨다. 어떤 분은 눈이 그렁그렁하면서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셨다. 무슨 일인가? 한국 여행사에서 패키지로 오는 팀들은 여기까지 오지 않던데.. 궁금하던 차에 엄마랑 서로 인사를 나누셨다. 알고 보니 가톨릭 신자.

원래는 산에 오는 일정이 없었는데, 가이드가 '여기 혹시 가톨릭 신자 분 계세요?' 하고 묻길래 손을 들었더니 발현산에 들를 수 있게 배려해쥤단다. 아... 세상에. 이렇게도 오시는구나! 우리는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잠깐이었지만 이야기도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해외로 나가면 한국어 한 글자만 봐도 좋다! 한국분들과의 우연한 만남 짧았지만 반가웠다!


산을 내려와서 슬슬 걸어갔다. 엄마가 걱정됐는데 한 번 가보자고 하신다. 뜨거운 날씨에 금세 지쳤다. 저녁 6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식지 않는다.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커피 한 잔에 정신이 좀 난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얼음 가득. 시원한 아메리카노 주욱!


카페에서 나와 흙길로 들어섰다. 포도밭이 있는 길을 지나야 성당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하루아침에 바뀐 날씨 덕분인지 곳곳에 못 보던 꽃들이 많았다. 제일 반가웠던 건 라벤더! 포도나무도 많이 컸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너무도 갖고 싶었던 쪽파 밭도 봤다. 아직 수확을 안 했다. 탐난다. ㅎㅎ 고사리밭은 우리 키를 훌쩍 넘어섰다.


라벤더는 언제봐도 행복해
메주고리예에서는 귀하디 귀한 싱싱한 쪽파!
작은 키지만 우리를 훌쩍 뛰어넘은 고사리밭


더워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장사 나온 할머니들도 안 계셨다. 한산한 흙길을 셋이 맘껏 누리며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희생으로 걸었다. 특히 로사맘 걸음은 크~은 기도가 될 것 같다. 기도 부탁하신 분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걸음들이 좋은 몫으로 그분들을 위해 쓰이면 참 좋겠다.


발현산 가는 길은 원래는 이런 모습이다. 걷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겨운 흙길


돌길, 흙길을 걸었다. 빗길도 걸었다. 웅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넘어지기도 했다.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기도 했다. 지난 메주고리예에서의 두 달 여정이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그동안 수많은 길을 걸었다.
걸을 때마다 손에 쥔 것보단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했다.


내 마음이 평화로울 땐 그 길이 평화의 길이 되었고, 웃음을 담고 있을 땐 서로에게 행복이 되었다. 그리고 한 뼘 넓어진 마음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인사를 나누니 작은 기쁨이 되었다.



우리가 걷는 길, 그 길이 꽃길이다. 그렇게 믿으니 그렇게 되어 간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니 그 날을 지날 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부족해도, 느려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라 여기니 우리가 걷는 길이 복된 길이 되었다.


지금도 믿는다.
어떤 길이라도 우리에게
감사한 길이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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