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환경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

삶의 지혜 - 23

by 명형인

이번 주제는 환경입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도 환경이 되고, 성장해 온 배경도 환경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환경이 안 좋은 사람들은 그래서 못 살아라는 등 비교하는 말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도 "환경"이죠. 요즘은 더더욱 심해짐을 느낍니다. 유행의 정수인 SNS를 보면 사람들이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는지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환경이 이러면 잘 된다, 환경이 이래서 성격이 나쁘거나 당신이 불쾌한 경험을 한 거라는 무자비한 말이 많습니다.


혹시,

환경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지 않았나요?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이제 너무 진부합니다.

그럼에도 옛날부터 환경은 바꿀 수 있다는 말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반대파가 많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1000년 걸쳐 존재해 온 사실을 보면 분명히 변치 않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이론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경험한 사람들이 생기고 계속 이어져 왔을까요?

분명히 힘든 환경을 스스로 바꿔나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환경은 바꿀 수 있다"라는 말이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있는 신념이나 철학들은 죽은 철학들보다 몇 배 더 강력합니다.


그 존재 자체로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죠.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주제로 글을 쓰려면 솔직히 제가 실제로 환경을 바꾸어낸 경험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을 해도 잘 안 듣는 게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들 만이 그 조언을 잘 흡수하고 실행에 움직입니다. 그릇도 스스로 크게 빚어내는 거기 때문에 그릇이 작은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20대 시절에는 그릇이 훨씬 작았습니다.


가정환경을 바꾸다


흔히 말하는 게 있습니다. 가난을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아빠를 잘못 만나서 그래. 나는 내 엄마를 잘못 만났어. 내가 지금 부모를 안 만났으면 잘 살았는데 부모 때문에 내가 인간힘써도 못 벗어나. 아 진짜 힘든 이 세상... 이런 말을 꼭 합니다. 저도 사람들을 만나보니 안타깝게도 어려운 가정환경에 살아오신 분들이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분명히 악착같이 열심히 사시는데 아직도 뭔가가 안 트이는 상황이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환경에 똑같이 힘들고 부모님 두 분 또는 한 분이 안 좋은 것에 빠지셔서 당사자를 엄청 힘들게 하는 경우를 겪고 있음에도 부모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산다 라는 말을 하지 않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부모님이 해달라는 거, 돈을 벌어다 가져와라라는 등 요구는 내가 안 들어주고 있다 적성선을 넘어선 요구는 이제 안 들어준다라고 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내가 살아야 그분들도 알아서 움직이시고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으셔야 각자 개척을 하시겠지 나는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참 이분은 독하신 분이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됨됨이가 나쁜 분은 아니셨습니다. 사람은 좋으셨지만, 나라도 살아야 형제자매들이 정신 차리고 그들도 살지 않겠냐 라는 본인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었죠. 계속 받아먹기만 하면 부모가 계속 술을 퍼마시거나 노름에 손을 대고, 여색 남색을 즐기고... 자식들에게 계속 손을 벌리고 돈은 계속해서 빠져나갈 거라는 논리였죠. 이 상태로는 희망이나 미래가 없다고 저에게 말한 거였습니다. 이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쪽이 환경을 바꾸는 데 성공할까요? 둘 다 실패할까요?

이제 제 경험을 나누겠습니다.


저는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고 겉 보기에는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원룸 단칸방에서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셨는데 아버지가 아이엠에프 터진 직후에 용감하게 사업을 하시고 나서 집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되게 무모한 도전을 하셨고, 아버지 또한 한국전쟁 피난민으로써 인간 대우를 못 받고 살았던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한사람들이 북한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남한으로 피난 왔는데 그중 하나가 친할아버지 할머니셨습니다. 북한에서 결혼하시고 큰아들 이미 낳고 오셨으니, 이북사람이시죠.


남한에 와서 아주 빨갱이 취급을 받고 일자리도 못 찾고 재산도 몰수당하고 정부 감시를 받았을 거라고 큰 아버지와 가까우셨던 지인분께서 저에게 종종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은 80세 90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세요) 큰아빠랑 부산 판자촌 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내신 분이시고 지금은 각자 군대 장교, 박사, 교수 등 자리에 오르셨다가 은퇴하신 분들이셔서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큰아빠가 아주 독하게 악착같이 살았다 하시네요.


저도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아마 아버지도 그때 인간도 못한 대우를 받지 않았나 추측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너무 겉치레에 관심이 아주 많고 허세가 심한 사람입니다. 허세를 너무 좋아하셔서 똑같이 뺀질거리는 사람을 만나서 사기를 자주 당하셨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이유가 그거겠죠.


지금은 청년들이 허세 부리려고 대출을 한다는 말이 있죠? 아버지께서 살아온 방식과 돈을 불려 온 방식이 때깔 좋은 겉이었습니다. 실제로 사업은 정직하게 하시는 것 같은데, 입는 것 먹는 것은 형편에 비해 과하게 하시는 걸 좋아하시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제가 봐도 신기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돈을 어디다 펑펑 쓰고 다니실 거예요. (저는 원치 않지만)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제가 한국에서 공부하는 게 미래가 없다 판단하시고 미국으로 갑자기 보내셨는데, 전 그게 솔직히 저를 사랑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허세도 솔직히 반은 있지 않았나 싶어요. (2000년도가 미국 유햑 붐이었어요.)

지금은 저에게 그때 투자한 돈을 다 뱉으라고 하니, 저를 캐시카우 보듯 하고 아직도 심한 말을 퍼부으시니까요. 그런데 지금 2025년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라서 저에게 연락을 전혀 안 하십니다. 생일축하도 안 하시고 그냥 무관심입니다. 가끔은 제 아버지가 맞나 싶지만, 다행히 미국 부모님이 계셔서 저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덕택에 형제자매도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갔었을 때 저는 동양여자에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선진국가인 미국이어도 인종차별은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힘든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 제가 한 선생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내가 영어를 배우고 싶다, 아이들이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점심 식사 자리도 안 끼워주는데 내가 영어를 배워야 학교생활을 한다고 서툰 영어로 선생님께 종이 편지를 써서 보여드렸어요.

그때 저도 제가 하필 왜 그 생각을 했는지 이유는 모릅니다.

제가 했던 작은 행동이 큰 변화를 불러왔는데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방과 후 시간이 되면 남아서 영어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 어머니께 직접 잘 말씀드려 줄 테니 네가 방과 후 노는 시간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으면 나도 학교에 남아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신 거예요.


저는 친구도 없던 차이고 영어를 배워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방과 후 1-2시간을 남아 선생님과 영어를 배웠습니다. 영어 배우는 방식은 되게 수준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처음에는 알파벳부터 각각 발음하는 방식이었는데 나무 막대기를 혀에 대거나 사탕을 가져와서 입안에 굴리는 등 갓난 아기기 영어를 배우는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중학생이 초등학교 교재로 영어를 배우니 우습죠. 제가 만난 선생님은 Mrs. Patty 선생님입니다.


그때 제 놀림거리는 금세 유치원 영어를 배우는 아이가 됐습니다. 특히 한인 유학생 친구들이 저를 엄청 놀렸어요. 사교육을 이미 빵빵하게 받은 아이들이라 저는 한국 유학생들 영어를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꿋꿋이 배우니 제 영어는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엄청난 속도로 늘었습니다. 이제 친구들도 영어를 가지고 저를 놀리지 않았고 제 틱장애를 가지고 놀렸습니다. 이건 이미 한국에서 놀림받은 거라 익숙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점심시간 때 점심 먹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중국인 친구들 2명이랑 점심을 함께 먹기 시작했고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백인 1명과 히스패닉 1명과 항상 점심을 먹었습니다. 학교 끝나면 그 친구들과 놀고 같이 공부하며 중학교 시절을 잘 마무리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하면서 닥친 가정문제와 학업 문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올라갔습니다. 고등학교도 부모님은 제가 미국에서 나오길 바라셔서 미국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기 바라셨고 저희 아버지는 같은 마음에 약간 다른 것도 있으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생기부를 쓸 때 가끔 학생이 희망하는 직업과 부모가 자녀가 가지길 원하는 직업을 적는 항목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그런 게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제 생기부에는 제가 꿋꿋이 화가, 작가, 연구자라고 적었는데 부모님이 적는 항목은 제 어머니의 권한이 없었습니다 항상 제 아버지가 쓰시던 거라 제 생기부에 적혀있는 희망 직업(부모님)은 제 아버지가 쓰신 겁니다.


대통령, 변호사, 의사

대통령, 의사, 변호사

대통령, 의사 변호사

대통령

대통령

대통령


초 1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생기부에는 부모가 원하는 제 직업은 항상 대통령이 빠짐없이 들어갔습니다. 고학년이 되니 이제는 변호사랑 의사가 빠지고 대통령 굵은 글씨 하나만이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세상을 구하거나 무슨 세상을 장악하는 대단하신 분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심리학을 공부하시고 계시는 분은 이미 눈치를 채셨을 거니 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한 성깔 하기에 제 생기부에는 제가 원하는 직업이 꿋꿋이 적혀있습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입학 하고 나서 진로문제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이미 제 자신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혼란도 적지 않아 있었지만 제가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었는지 파악했던 사실은 지금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도 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만난 은인은 아닙니다. 저에게 꾸준히 제가 재능이 있다 하시고 저에게 훈육과 칭찬을 과하게 하지 않으신 선생님이 한분 계셨는데, 제가 궁금해서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최대한 많이 걸었어요. 나는 이걸 하고 싶어요. 나는 이 책이 좋아요, 이 책이 왜 좋은지 이유는... 여러 가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인연이 은인을 잡는 큰 행운을 준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은인이신 Mrs. Stiffel 선생님은 저의 귀한 선생님 중 한 분이시자 저의 미국 부모님이 되어주신 분이십니다. 제 진로도 현실적으로 많은 고민을 해주셨고 저의 예술적인 재능을 보고 미술 대학교에 보내면 제가 뭔가를 찾아낼 거라 저희 부모님을 강하게 설득해 주신 장본인이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Mrs.Stiffel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선생님을 아주 미워하게 되신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시험 기간 때 밤늦게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게임을 했던 날이었습니다. 저도 기억하고 있는 밤인데 아버지께서 마침 미국에 오셨을 때라 제가 시험공부를 밤새서 하지 않고 게임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청소기를 들고 와서 저를 빠따 자세 세우고 때렸습니다. 청소기가 다 박살이 나고 어머니께서 그러지 마라 공부 열심히 했다 시험도 잘 보는 애한테 왜 그러냐고 말리는걸 마다하고 효자손을 가져와서 저를 때리고 효자손 2대가 전부 다 부러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새 효자손을 찾으려고 창고를 뒤지시는 틈에 어머니께서 저에게 빨리 나가라고 밖으로 보내시는 걸 도와주셨고, 제가 전화기를 떨리는 손으로 챙겨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저도 너무 무섭고 엉덩이가 피나고 찢겨 나갈 것 같아 Mrs. Stiffel 선생님께 한밤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미국에선 충분히 실례가 되는 일인데도 선생님께서 늦은 시각에 전화를 받으셨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괜찮다고 좀 안전한 곳에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셔서 좀 숨을 고르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미국 경찰차가 집 앞에 와 있었습니다. 미국 경찰 3명이 차에서 내려서 저희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상황 파악해야 한다, 신고를 받았고 이건 미국에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아동학대라고 했습니다.


결국 경찰이 집에 들어오셔서 부러진 효자손 2대와 박살 난 청소기를 검거하고 사진을 몇 개 찍은 후 저희 아버지에게 미국에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아무리 한국 국적이라 해도 감옥은 피할 수 없다고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영어를 모르셨기에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한국계 미국인 경찰도 함께 오셨기에 대화는 통했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경찰들을 두려워하시고 벌벌 떠시면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주무셨습니다.

그 후로 미술 대학은 내가 절대 안 보내겠다, 당장 포기하고 한국 오라고 아버지께서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안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고민하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장학금을 받겠다고 은인이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돈을 안 대 줄 테니 미술대학 가지 말고 법대나 의대를 가라고 협박하시는데, 제가 미술 대학 위주로 장학금을 신청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그럼 좋은 대학교들 몇 군데 추려서 한번 시도해 보자고 용기를 주셨어요. 그때 제가 지원한 대학교는 하버드 대학교 - 미술학부, 메릴랜드 미술 대학교(MICA), 텍사스 주립 대학교(UT),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대학교(RISD), 캔자스 미술 대학교(KCAI)를 지원했습니다. 어머님께서 감사하게도 알바를 따로 몰래 하셔서 저를 미술 입시 학원도 보내주셨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어머님도 저를 밀어주시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셔서 저를 적극적으로 믿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학비가 아주 큰 고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언제든지 학비를 확 끊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대졸도 못 할 수 있는 상황이 큰 리스크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 원서를 넣기로 지원한 학교들이 좋은 학교들이지만 동시에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사립학교였지요. 제 형편에는 그냥 아주 무리하게 넣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랑 너무 힘든 날이나 협박을 당하는 날에는 Stiffel 선생님께서 저를 제 집에 오라고 초대하셨고 묵게 해 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의 피난처가 생겼고, 선생님과 선생님 남편분께서 저를 따뜻이 맞이해 주셨습니다. 가끔씩 선생님 집에서 지내면서 책도 읽고 교양도 배우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부에 대한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시는 분이시고 인생에 대한 교훈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저희 부모님께 선생님 부부가 저를 입양하겠다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도 저희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제가 재능이 있는 아이기 때문에 잘 밀어줘야 잘 된다고 하셨습니다.


입양 제안은 저희 어머니도 많은 고민을 하셨는데, 저희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유는 단순하게도 내 자식을 감히 뺏어간다는 이유였고, 어머니께서는 제가 입양을 해서 호적을 옮기고 선생님 가족으로 입적을 한 다 해도 인생의 변수가 앞으로 많이 생길 상황이라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고민하셨습니다. 단순히 미국시민권을 탐내는 게 아닌 저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해 주셨지요. 저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국 시민이었으면 좋은 점도 있을 테지만 제가 지금의 제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것도 있어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진학 결과가 나왔을 때에는, 메릴랜드 미술 대학교(MICA), 텍사스 주립 대학교(UT), 캔자스 미술 대학교(KCAI) 3군데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의 큰 기쁨과 함께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왔는데 저는 단순히 장학금을 무조건 많이 주는 곳으로 골랐습니다. 한 학기마다 무려 25000달러를 지원해 준다는 조건이라 저에겐 1만 달러도 너무 큰돈이었기에 MICA로 결정했고, MICA는 명성이 좋은 학교에서 선생님도 좋은 결정이라고 두둔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제가 미술 대학교 입학하면 돈 안 대준다고 협박하신 아버지께서도 제가 명문의 미술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니, 명문 학교라서 좋다고 강하게 명문을 강조하시면서 학비를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셨던 겁니다. 실제로 제 대학교 입학 사실을 엄청 여기저기 자랑해 놓으셔서 제가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에도 아주 떠들썩했습니다.


대학교 진학 후 닥친 경제적인 문제


대학교 입학하면서 저는 텍사스에서 매랠랜드 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도 부모님은 걱정하셨는데, 특히 제가 청각장애가 있어 어머니께서 더욱 걱정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직접 아버지께 용돈을 타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왜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생활비가 필요하니 생활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힘들어하시고 몰래 알바를 하며 밤낮으로 일하셨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교는 미술 대학교라서 재료를 이것저것 사 오라는 과제 준비물이 많았습니다. 미술 용품이 돈이 참 많이 듭니다. 왜 미술은 부잣집 자제들의 취미라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저랑 같은 동기들 중에서도 잘 사는 집 자제들도 꽤 많았고 대학교 때부터 저는 현실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돈에 대한 감각은 익히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생활비를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께 생활비가 얼마 필요한지 보고할 때에도 아버지는 기분 좋을 때와 기분 나쁠 때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기분 나쁠 때에는 생활비가 왜 필요한지 내역을 보고 할 때에도 꼬투리를 끊임없이 잡으셨고 학점을 얼마나 받았는지 요구하셨습니다. 제 학점이 좀 내려가면 생활비는 당연히 탁 끊기고 저는 항상 얼음살을 걸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서 한국에서 아버지랑 다투셨는지 저에게 연락 오셔서 아빠가 너 돈 보내준다 하니 꼭 받거라 하는 문자가 오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저랑 아버지 사이를 심화시켰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제가 대학 다니면 아빠는 계속 돈돈돈돈 거리시니까 제가 퇴학하는 게 맞을 거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께서 크게 화내시면서 공부 계속하고 대학교 졸업은 꼭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아빠가 어떻게든 돈을 굴리는 사람이니 아빠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생각을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너는 아빠처럼 살지 않으면 되니 너 할 거에 집중하라고 말하셨습니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저는 알바를 하고 싶어서 알바자리도 구했는데 항상 아버지에게 들켜서, 왜 이런 하찮을 일을 하며 푼돈을 버냐고 매를 맞거나 쫓겨나갈 뻔했습니다. 아버지게에는 지금 청년들이 흔히 하는 알바들이 매우 하찮고 비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저는 대단하고 아주 큰 일을 해야만 한다고 주문을 외우셨는데 그 주문은 저에게 더 이상 듣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포장 알바를 구해서 알바 시작했는데 제가 손이 너무 느려서 2주 만에 잘렸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제가 인터넷에 제가 자작으로 만든 포트폴리오를 올리면서 전단지를 돌렸는데, 구일동 쪽에 시계 만드는 알바자리가 있다고 연락이 오셨습니다. 주변에서는 청각장애가 있는데 뭐 하려 하냐 사람들이 장애 있는 사람을 잘 안 쓰는데 괜히 갔다가 상처받지 말고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면접 보러 수원에서 개봉동 까지 아주 먼 거리를 갔습니다.


거기서 운 좋게도 3년간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저를 불러서 나무를 옮기고 청소하는 등 작은 일부터 시키면서 시계 디자인도 해보라고 일 감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매일매일 수원- 개봉동 열심히 다녔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일부러 시계도 여러 개 맞췄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무를 레이저로 자르고 가공하는 거를 보았고 큰 기계도 보았습니다.

공장을 그때 경험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사장님이 저의 큰 은인이셨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자연스레 끊겨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작은 돈으로 조금씩 급여를 받았습니다.

그때 경험 덕분에 제가 미국에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목공 관련 전공을 듣고 톱질하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무거운 나무 자재도 들고 다녔습니다. (미국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아요)


대학교 졸업한 후에는 전혀 알바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대신 교수님 강아지를 대신 돌봐주는 도그시팅을 하면서 교수님께서 점심을 사주시는 걸로 식비를 아꼈습니다. 교수님 도그시팅을 계속해서 하다 보니 볼티모어 안에 있는 도그 쉘터라고 여행을 가는 미국인들을 위해 강아지를 잠시 돌봐주는 돌보미 서비스를 하는 곳의 소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쪽 사장님께서 한번 와보라 하셔서, 테스트로 하루 종일 일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CCTV로 제가 어떻게 강아지를 돌보는지 학대를 하는지 다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견주들이 아주 기분이 좋다고 도그쉘터 사장님께 새로 온 직원이냐고 많이 물어보신 거였어요.


그때 사장님께서 저를 고용하고 싶으셨는지 저에게 워킹비자가 있냐고 물으셨고 서류를 여러 개 받아 검토하셨습니다. 딱 트럼프 대통령이 첫 집권하던 당시여서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사장님께서 고민한 결과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하시고 점심 샌드위치 한 끼 사주셨습니다. 워킹 비자를 체류 비자로 바꾸려면 자기 같은 작은 기업 보단 대기업 같은데 들어가야 서류나 증빙이 더 확실하다는 거였어요. 불체자로 찍힐 수 있는 리스크가 엄청 컸으니 당연했습니다. 계속해서 대기업도 서류를 넣었고 학교에서 일하는 인턴 자리도 넣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 문제


그때 사람 문제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오은영 선생님 같은 심리학 교수님들이 예능에 많이 나오시고 핫하신데 그분들이 많이 강조하시는 게 부모 자녀 관계가 좋지 않으면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건 자녀들이 나빠서 나쁜 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그렇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게 실제로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겪었고 저는 아버지랑 사이가 아주 안 좋았고 불건강한 부녀 사이의 폐해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아빠랑 딸이 사이가 안 좋고 관계 자체가 건강하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부작용을 겪습니다.

특히 억압하는 아빠를 둔 딸은 남자 문제를 많이 겪습니다.

남자들을 꼭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납니다. 범죄자 남자를 만나 푹 빠져버리는 경우도 실제로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남자 문제가 많았습니다. 청년기 초반 당시에 아버지가 너무 미웠기에 아버지를 싫어했음에도 아빠를 똑같이 닮아있는 착취적인 남자를 만난 거죠. 남자 문제라고 하면, 그때 당시 남자친구들은 금전을 착취하거나, 성적으로 성을 병적으로 착취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망친다는 이유는 실제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도 한번 방탕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힘들면 그냥 막살면 재미있다고 말해서 해보았는데 그거도 좀 아니더라고요.


제가 남자 문제를 겪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방황하던 시기에 만났던 대학원생 언니가 있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Shin 언니였습니다. 저는 한국 유학생 친구들이랑은 어울리기 어려워서 한국인 친구가 없었습니다. 보통 주변에 보면 중국계 친구들이나 미국 백인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백인이라 하면 다양하지만, 저는 특히 유럽계 뿌리인 네덜란드계 미국인과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친구를 많이 만났습니다. 좀 고지식한 면이 있지만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고 본인만의 가치관이 확고한 사람들이죠.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면 차가움이 좀 더 강하다는 점이 아닐까요? 노르망디계 사람들이 가까워지기 전에는 좀 차갑게 느껴집니다.


제 인생에 많지 않았던 한국계 미국인 언니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남자 문제로 힘들어할 때 다른 사람들은 저를 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는데 Shin 언니가 저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가 질이 나쁜 거 같은데 거리 두는 게 좋지 않냐는 말에 저는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나중에 당하고 나서 제가 힘들 때에 언니가 저에게 아무런 말이나 위로도 하지 않고 저에게 밥을 직접 요리해서 제 기숙사에 와준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 3시 돼서도 아무것도 안 먹는 저를 위해 음식을 요리해서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Shin 언니랑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도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그 언니도 전에 안 좋은 남자를 만났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고 저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였어요. 지금은 그 언니가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지금은 결혼하셔서 공주님 두 명을 낳고 미국 LA 쪽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어쩔 줄 모를 때에도 Shin 언니는 용서를 하는 법과 묵묵히 경청하는 것을 저에게 모범을 보여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침내 용서하게 된 것도 좋은 멘토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언니는 저에게 용서를 너의 아버지를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용서를 하는 건 너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너 인생을 그렇게 망치지 말라고 제 손을 잡고 말하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저는 멘토의 말이 공감이 가지 않아도 일단 들어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보니 진짜 맞는 말이어서 지금도 가끔씩 그 언니랑 연락하면서 그때 그 일이 있었지 하고 담소를 나눕니다.


그 후 저는 이상한 남자들을 다 끊었습니다. 이제 남자에게 애정을 바라지 않고 제 자신을 사랑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남자들이 처음에 집착을 했지만 흥미가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흥밋거리를 금세 찾았습니다.

제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멈추고 제 내면을 단단히 쌓았습니다. 졸업을 하고 제 졸업 파티에도 Shin언니는 바로 달려와주었고 제 일인 마냥 매우 기뻐해주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휴학의 공백기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제가 휴학했을 때 겪었던 일을 말합니다. 제가 어느 날 중요한 과목인 수업시간 동안 이젤에 큰 스케치북을 걸고 스케치를 하다가 돌연간 울음 터뜨리고 호흡 곤란이 왔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엄청 놀라셔서 건장한 사람을 불러 저를 따로 부축해 보건실로 데려가셨습니다. 휴학하기 전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2014년 봄학기 이후 휴학을 1년 했습니다.

휴학하기 전 겨울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왔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제가 엄청 막 돼 먹은 아이라며 돌연간 저를 불러 현금 1억짜리 다발을 식탁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 계셨습니다. 대리석 식탁에 배치된 큰 소파라서 마치 권위 있는 사람의 구조였습니다. 저에게 학교를 더 이상 안 보내 줄 테니 미국유학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미국 대학교에 다시 가고 싶으면 자기 발 밑으로 기리고 했습니다.


아버지 말로는 제가 아버지 말에 100% 복종을 하면서 모든 것에도 아버지 의견을 따르고 대학교 수업부터 모든 것들을 아버지 마음에 드는 대로 따라야 하는데 저는 제 인생을 제가 주도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드셨던 겁니다. 아버지는 저를 막을 방법은 돈을 모조리 다 끊어서 저를 퇴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돈 1억 현금 다발이 얼마나 두툼한지 신사임당으로 꽉 차있음에도 빵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힘이 없으면 강자의 발 밑을 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약육강식을 일찍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발 밑에 쭉 넙죽 엎드려서 모든 게 다 제 잘못입니다라고 저 스스로를 부정하는 순간 아버지는 통쾌하다는 듯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나아갔습니다.


제가 2014년 봄학기 때 갑자기 공황장애가 와서 호흡곤란이 와 보건실로 실려간 날,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서 휴학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지만 저는 제가 이번에 나 자신에 집중하고 내 인생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빠도 돈이 너무 궁한 거 같으니 돈돈돈 하는 상황에서 휴학을 하면 아빠도 나쁠 게 없지 않으냐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엄청 속상해하셨지만 제 의견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휴학하고 집에서 쉬는 동안 저는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때가 저에게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책을 아주 많이 읽고 한국에 있는 공공기관도 많이 방문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던 시기였습니다. 뭐라도 찾으려고 고민을 많이 하며 휴식기를 보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랑 많이 다퉜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못난 것 하며 냅다 뿌리는 물 한 바가지도 뒤집어썼습니다.


복학 후 졸업 하다


휴학하고 나서 복학을 2015년 봄 학기 때 복학했습니다.

그때 사람 관계를 다 정리하고 남자도 더 이상 만나지 않고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좋은 교수님들을 많이 만났고 옥스퍼드 대학교 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다가 한번 미술대학교에서도 인문학을 가르치고 싶다며 이직하신 Ruth 교수님 수업을 2학기 동안 계속 수강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Ruth 교수님의 수업은 학생들이 혹평을 하던 과목이었습니다.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하는데 그 교수는 꼭 학생들에게 D나 C점을 준다는 이유로 너무 못된 교수라는 거랍니다. 미술대학교에 와서 무슨 하버드에서 학생 가르치듯 한다고 하고 A+를 받는 우등생도 그 교수님 수업을 들으면 C+로 강등 당한다는 겁니다. 한국 유학생들도 그 교수님 수업을 호기롭게 신청했다가 수업을 바꿀 수 있는 기간 동안 다른 과목으로 교체했습니다.


저는 하버드 대학교에 제가 갈 기회가 진짜 없을 것 같은데 이게 오히려 하버드 대학교를 맛볼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Ruth 교수님의 수업은 매우 지루했습니다.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수업 첫 성적은 아주 호기롭게도 C-를 받았습니다. F를 안 받은 게 감사해졌습니다. 교수님께서 피드백이나 도움이 필요하면 악속시간을 요하라고 하셔서 저는 이메일로 교수님께 매주 메일을 보내 약속을 잡아 만남을 가졌습니다. Ruth 교수님 덕분에 이메일을 쓸 때 정중히 쓰는 영어 어투도 교정받았습니다. 이메일을 이렇게 무례하게 보내면 아무도 안 봐줄 거라는 독설 덕분에, 정중히 사과를 드렸고 이메일 쓰는 법 강의도 받았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 즈음에는 Ruth 교수님께서 A-를 종합 점수로 주셨습니다. A+는 절대 안 주셨지만 그 정도면 저를 아주 좋게 봐주신 겁니다. Ruth 교수님도 저의 은인이십니다. 강아지 돌보미도 저에게 믿고 맡겨주시고 점심 사주시는 거로 일당을 주셨으니까요. 물가가 비싼 미국에서 밥 한 끼 아끼는 건 아주 큰 은혜입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하는 날 졸업식 때 저는 아주 울었습니다.

그때 졸업식 영상을 학교 측이 갖고 있었을 텐데 제가 울음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졸업식 때 아주 기뻐하고 환호하고 서로를 붙들고 웃었는데 저는 아주 목 놓아 울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기쁜 날에 울면 못생겨진다고 눈물 닦아주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감사함과 설움이 북 받쳤습니다.


눈물의 졸업식은 저에게 의미가 참 깊었습니다.

제가 졸업 후 1년을 더 미국에서 지내다가 취업이 안되니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할 땐 제 친구들이 저를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다시 꼭 놀러 오라고 약속도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중소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바로 취직이 되지 않고 1년의 기다림과 끊임없는 두드림 끝에 취직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시고 저랑 아버지의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이혼하신 건 솔직히 쌓인 것도 있으셨지만 제가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이 뒤집히셔서 저를 목 졸라 죽이시려는 걸 저희 어머니가 목격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말리시다가 불똥이 어머니께로 튀어 어머니 얼굴이 온통 보라색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혼 후 지식들은 보통 경제력이 있는 부모에게로 갑니다. 미성년자인 아이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저는 성인이었지만 거처가 아직 마땅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돈을 모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댁에 남았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끝없는 분노는 저에게 미쳤고 저는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사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여서 틈틈이 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는데 넷마블문화재단 출판사에서 저에게 출간 제의가 왔습니다. 그렇게 클라라와 몬스터 책 2권을 출간하기로 했는데 넷마블 편집자분께서 3권을 추가로 더 내면 좋겠다고 제안 주셔서 총 3권을 출간했습니다. 3부작은 제가 만들어 둔 책이 아니어서 콘티부터 새로 짜야했습니다. 중소기업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어서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바로 컴퓨터를 켜서 콘티 짜고 그림을 그려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집에서 빨래하고 요리하는 등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엄마의 빈자리(?)를 제가 어쩔 수 없이 채우던 때여서 넷마블 작업할 때 아버지랑 훨씬 극심하게 부딪혔습니다. 아버지께서 화가 나 제 노트북을 부수어버리겠다고 효자손으로 노트북을 가격하는걸 제가 대신 맞아서 장이 파열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노트북을 지켜내고, 저는 당분간 편의점 음식을 사 오거나 반찬 상점에서 반찬을 사 와 슬쩍 냉장고에 넣고 저도 끼니를 때우며 작업했습니다. 당연히 다음날 되면 아버지가 반찬을 왜 밖에서 사 왔냐고 반찬을 다 꺼내 제 방문 앞에 던져놔 쉽게 상하는 반찬은 상한 채로 있었습니다. 제가 밤 9시 늦게 퇴근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몰래 반찬 사 와서 제가 먹어치우고 숨기고 새벽 3시까지 작업을 반복한 결과 제 책 3권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클라라와 몬스터 시리즈 3권 출간 덕분에 제가 아버지 집을 떠나 분당으로 이사가 작은 원룸에서 첫 독립생활을 시작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제 독립에 위 책 3권이 제일 큰 기여를 해서 저에겐 고마운 작품입니다.


독립 후 중소기업에 1년 반 더 다니다가, 모종의 이유로 퇴사를 했습니다.

퇴사 후 하이데버라는 굿즈 브랜드를 창업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이데버를 운영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닥쳤고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3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저를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며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때 제 형제자매들이 아버지랑 연락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독립을 하지 못한 형제자매들이 다시 아버지 없으면 안 된다고 목을 매는 동안 다시 아버지는 저에게 관심이 사라지셨습니다. 저는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지금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허락해 준다는 전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얻어다 준 집으로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집의 계약권은 제 이름으로 계약을 해서 월세 방을 빼라는 성화에 저는 안전합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아버지가 기분이 나쁘셨는지 이미 방을 빼고 월세금 안 대준다고 협박을 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상황입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은인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아버지 회사가 갑자기 잘 안되고 재정이 나빠지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저에게 욕설도 하지 않고 그냥 무관심합니다. 애초에 제 생일날 축하한다 말씀해 준 적도 없으신 분입니다. (목적이 있을 때에만 축하한다고 챙겨주더라고요) 오히려 제 사람들이 저를 진심으로 축하해 줍니다. 미국 친구와 미국부모님이 저를 잊지 않아 주십니다.


좀 더 힘내고 방법을 찾아서 지금 아버지가 월세로 얻어준 집을 빠져나올 생각입니다.

제가 처음에 제안했던 월 50만 원짜리 집 보다 훨씬 몇 배 비싼 집이고

때깔은 아주 좋고 호화스럽지만 제 장기적인 생활에는 맞지 않는 집입니다. 응원부탁드립니다.

사람은 그릇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너무 일찍 깨우쳤고 인생의 멘토를 많이 만났기에 저는 독한 사람입니다.

제가 잘 되어도 제가 아버지는 적정선을 넘어선 도움을 주지 않고 저를 우선시할 것을 아버지도 깨닫으셨기에 요즘은 다른 사람에게 엄청 간과 쓸개를 다 내어주고 있습니다. (자존감을 채워 줄 희생자를 찾고 계신 거겠죠) 그럼에도 제 자신이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을 때마다 환경을 바꾸어준 사람, 용기, 기회들이 무수히 찾아왔습니다.

그 기회를 제가 잡았기에 운을 얻었습니다.

실행해보지 않고는 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제 삶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잘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고 낙심하기보다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가길 바랍니다.



keyword
이전 22화지피지기 백전불태 - 백전백승이라는 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