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ck split Oct 26. 2020

비행기 타는 남자

소소한 일상에 관하여

3박 4일짜리 비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면 대체로 이틀 정도 쉬게 됩니다.

누가 보기엔 부러울 정도의 이틀이지만 우리 승무원에겐 이틀의 휴식으론 일상으로 돌아오기엔 짧은 시간임을 알고 있습니다.

10년 이상의 베테랑 승무원에게도 시차 적응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닌지라, 이틀 만에 시차를 적응하고 일상의 일을 하기엔 남들보다 더 단단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고, 아침 식사 반찬으로 달걀 프라이 하나 만들 때도 결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엄마 승무원에게는 집안일이 비행보다 더 힘들게 여겨질 만큼 우리 승무원에겐 일상의 소소함이 낯설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비행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일상의 소소함만큼 비행의 소소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 당일 아침에 일어나 씻고 화장하는 일은 힘들고 짜증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설 때는 좀 전과는 반대로 설레기까지 합니다(물론 비행이 싫어지는 경우엔 유니폼 입는 순간이 가장 힘들 수도 있겠지만...)

힘든 비행을 마치고 호텔에서 갖게 되는 혼자만의 시간은 비행경력이 오래될수록 더 포기하기 힘든 일상이 됩니다.

익숙지 않은 해외에서의 브런치 시간.. 누구의 간섭도 없이 편안하게 쇼핑할 수 있는 시간들.. TV나 달력에서나 볼 수 있는 해외 관광지 탐방..

아주 드물지만 정말 멋있고 마음이 따뜻한 승객과의 만남...그리고 우연 인연이 있는 비행의 소소함...

이런 일상이 익숙해질 때 비로소 승무원의 여유가 몸에 배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 유행으로 이젠 이러한 소소한 일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침에 등교 준비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설어 우왕좌왕하던 일들이 이젠 익숙해졌고, 아침 식사 후 동네 한 바퀴 산책은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한 꺼풀씩 반듯하게 펴주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거실 전체를 비추는 석양의 붉은 기운이 어쩔 땐 환희로 다가오고, 동네 치킨집에서 마시는 맥주가 맛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뉴 노멀 시대라고 합니다.

승무원 사회도 많이 달라지리라 여겨집니다.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이 이젠 각자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해외에서의 투어는 웬만한 체력이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행 스케줄이 타이트 해 졌습니다.

선 후배 관계도 예전처럼 돈독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원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한층 더 쉽고 다양해졌지만 스 연락 가능성 만으론 좋은 관계가 만들어 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세대 간 차이는 한층 더 다양해져 자칫 잘못하면 오해와 갈등이 빚어질 확률이 커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리더십은 규정과 절차에 밀려난 유연성 부족으로 보기 드문 자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변화가 예견되는 이 시점에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비행은 희망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유니폼을 입게 되면 푸른 하늘을 다시 만나 비행 생활의 소소함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도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소소한 일상을 붙들고 그 안에서 휴식과 기대를 다시금 모아 얼마 후의 내일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소소한 일상이 주는 희망에 고마워하며..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집 청소를 시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비행기 타는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