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지. 흡연은 명상과 비슷하다고. 무슨 쌉소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흡연자나 금연자라면 알겠지만, 담배를 피울 때만큼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호흡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끽연의 습관이야 저마다 다를지라도 연기를 나긋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위에서 우리는 심리적 안녕과 쾌감을 미량이나마 느끼잖나. 니코틴이라는 각성제나 향미를 내는 첨가물 때문이 아니라, 어떤 애연가들은 그저 그 순간의 행위, 그 동작이 조성하는 어떤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자 담배를 피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상은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줄 모르는 게으른 사람들이 아주 간편히 잠시나마 다른 방식으로 호흡하게 해주는 것, 그게 흡연이라고. 근래에는 베이퍼라는 기발한 기구가 연초를 대체해 가고 있지만, 이것저것 피워봐도 베이핑의 증기와 스모킹의 연기는 그 형태부터가, 그것의 입자나 색감 따위부터가 서로 너무 다른 것 같다. 물론 나는 베이핑의 '건강한' 대중화와 무궁한 연구 발전에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내일은 아빠의 첫 번째 기일이고, 나는 가끔가다 담배를 피울 일이 생길 때면 아빠 생각을 한다. (굳이 담배가 아니어도 아빠 생각은 자주 하지만.) 아빠는 평생을 헤비 스모커로 살았다. 죽기 몇 년 전부턴 전자 담배를 피웠는데,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는 그 모든 걸 단칼에 끊었다. (당연히 잘한 일이다.) 하지만 중학생 때부터 아빠의 가장 친한 벗이었던 담배를 그렇게 서운시리 끊어버린 그 일이, 나는 아빠의 마지막 6개월을 조금 더 헛헛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죽이기 전까진 죽지 않아>에는 저자 본인의 조모를 비롯한 흑인 할머니들의 흡연을 떠올리며 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경찰관의 총이 그분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이 그분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소외받고 침묵당한 흑인 남성들의 폭력이 그분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남은 그분들을 이 땅에서 쉽고 빠르게 해방시켜 주는 수단이 들이마신 담배 연기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불쌍한 인생을 살았던 우리 아빠가 마지막 짧은 나날을 그냥 담배를 피우며 지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