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이 필요한 이유(2)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당신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몇 명이나 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 고민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각해 왔고,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서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가요?"
이 질문에 선뜻 “나는 다른 사람보다 OOO이 특별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왜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있게 정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살고 싶은 삶,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더 적지 않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거나, 그냥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회사에 취업하고, 결혼해서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는 등 확실한 답을 구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자신 있게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집에서나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항상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문화적, 사회적, 교육적인 다양한 이유로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고, 남들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먼저 당신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정의와 다른 사람과 다른 무엇을 찾아서 “나다움”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넘사벽 ‘엄친아’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 치고 ‘엄친아’라는 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들 아는 말이겠지만 ‘엄. 친. 아’는 ‘엄마 친구 아들/딸’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그리고 인물이면 인물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번이라도 듣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엄친아’와 비교당하는가?
‘엄친아’ 와의 비교는 사실 분발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도, 선생님도, 직장의 선배들도 우리의 기를 죽이려고 ‘엄친아’와 비교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특별한 자극을 주고, 그 자극에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긍정적인 의도가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첫 번째 부정적 효과는 ‘학벌지상주의’이다. 우리 사회에서 ‘엄친아’의 첫 번째 조건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성적 1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나 그 수준이 심각하냐면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성적을 위해서라면 학교 공부도 빼먹고, 학원가는 것을 인정해 주고, 성적만 오른다면 장래의 남편 직업과 아내의 얼굴이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두 번째 부정적 효과는 ‘외모지상주의’이다. ‘엄친아’가 되기 위해 첫 번째 조건인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모두 ‘엄친아’가 되지 못한다.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말이 바로 “쟤는 저 인물에 공부라도 잘해야 먹고살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성형과 미용에 관심을 가진다. 그 결과 우리나라가 ‘성형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게 된 배경이다.
세 번째 부정적 효과는 ‘자존감 저하’이다. ‘엄친아’의 의미를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말 세상에 존재할까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그 인물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 기준이 높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엄친아’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엄친아’와 비교당하는 당사자의 대부분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자존감의 저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 부정적 효과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대상(엄친아)과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끝임 없이 비교당하고, 그 비교당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 결과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모르고, 원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인데 말이다.
4지 선다형 교육
2018년 8월 25일이라고 기억한다. BBS의 이각범의 화쟁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인데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교육의 문제’라는 주제로 전문 패널들과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다. 토론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으로는 생각하는 능력을 키울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지금의 교육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 토론 과정에서 전문 패널과 사회자는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서 4지 선다형으로 평가하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4지 선다형 평가로 인해 획일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요구하는 생각하는 힘에 기반 한 창의성, 협업력, 융합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우린 특별한 나를 찾지 못했을까?
우리는 어떤 대학을 다니고, 어디서 일하고, 어디서 사는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좋은 곳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 너무나 만연하다 보니 교육이라는 것도 그런 우리 사회의 요구에 맞춰 수정되고, 변경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사회의 요구에 맞춰 변화되고, 수정된 교육은 한 번도 교육 대상자를 중심으로는 변화되고, 수정되지 못했다. 오직 성적에 의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고, 그 구분을 명확히 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양성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 속담은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말로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두각을 나타내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튀지 말라는 것이다.
이 속담 때문일까? 우리는 너 나할 것 없이 다니던 학교에서, 직장에서, 각종 모임에서 그 어디에서든 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튀어 봤자 돌아오는 것이란 비난의 화살 또는 날카로운 주변의 눈초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모임에서,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르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소리를 적어도 한번 이상 들었을 것이다. “모나면 정 맞는다.” 는 속담을 듣고, “둥글게 살아라!”라는 조언을 들으면서 말이다.
왜 우린 튀면 정을 맞아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고 연구하는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2010년 아는 지인의 추천으로 리처드 니스벳이 2003년에 집필한 저서 <생각의 지도>를 일게 되었다. 그 책에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실험하고 그 결과들을 담고 있었다. 책의 내용 중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의 배경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정한다. 개개인은 독립적이고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나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전체 관점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개인은 집단에서 튀지 않으려 하며, 조화로운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며, 만약 잘난 체하거나, 튀게 되면 그 사람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지, 정말 살고 싶은 삶,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했던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동양문화의 특성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문화의 특성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런 결과는 자신이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특별함’,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성”의 또 다른 이름 “문제아(兒)”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고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까지도 ‘문제아’라고 부른다. 정말 ‘문제아’는 사전적 의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아닌 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개성 있는 사람들까지 ‘문제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편견 때문이다.
편견(偏見)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이 편견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편견은 기대나 태도로부터 생기는 것인데 편견이 주로 사회적으로 학습되며, 객관적이거나 충분한 근거 또는 증거 없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견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머리를 염색한 사람, 몸에 문신을 한 사람,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편견 아래 개성 있는 사람들마저도 ‘문제아’로 여겨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남들과 생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게 하고,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꺼리게 하고, 남들과 다른 것에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을 접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편견이 무섭다고 행복한 삶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삶은 나의 것!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을 가득 실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을 네가 살아 줄 것 아니면 신경 꺼!”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삶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글. 청명(Jin Hyeon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