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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들과 둘만의 여행

동유럽 음악 여행기(4): 아들의 생애 첫 오페라 "투란도트" 

by 오늘을산다 Jan 28. 2025

4시간짜리 워킹투어를 마치고 잠시 낮잠을 자러 호텔로 간다. 6시에 예약해둔 오페라 <투란도트>를 보기 위한 선제조치다. 피곤을 호소하는 아들래미를 계속 데리고 다니다 공연장으로 갔다가는 쿨쿨 잠을 자는 꼴만 볼 수 있기에. 그런데 사실, 나도 너무 피곤했다. 40대가 되니 시차적응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다. 


찔끔 잠을 자고 나니 두통이 찾아왔다. 애드빌을 하나 챙겨먹고 어둑한 길을 나선다. 4시부터 어두워진 부다페스트 시내. 나름 공연장 예절을 지키고자 챙겨온 코트를 걸치고 걷자니, 시린 공기가 머리를 깨운다. 가는 길에 '리스트국립음악원'을 잠시 들러볼까 했으나, 공연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가는 게 어렵다고 해서 외관만 훑고 패스. 최종 목적지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은 다뉴브 강변에 위치해 있다. 강바람이 골목골목을 휘감는다. 


압도적 외관의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압도적 외관의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
유럽 극장들의 고풍스런 조합 Red&Gold유럽 극장들의 고풍스런 조합 Red&Gold

2024년이 푸치니 서거 100주년이어서 그런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푸치니의 작품이 눈에 띄게 많이 무대에 올랐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음악으로 널린 알려진 <투란도트>가 마침 우리가 부다페스트에 있는 동안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매를 했다. 헝가리라서 좀 쌀까 싶었지만, 괜찮은 자리에서 보자니 두 사람 티켓이 거의 30만 원에 육박한다. 그래도, 이 때가 아니면 언제 헝가리 대표 오페라 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보겠는가.

표를 사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다. 중3 때인지, 고1 때인지 처음으로 오페라를 봤다. 어쩐 일인지 그 맘 때쯤 내 맘에 예술적 허영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예술의전당에 홀로 가서 오페라 <나비부인> - 이 또한 푸치니! - 을 보았는데, 줄거리도 모르는데다 가사를 알아듣지도 못해서 꾸벅꾸벅 졸다 왔던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다. 


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 <투란도트> 티켓헝가리국립오페라극장 <투란도트> 티켓

가기 전부터 아들에게 <투란도트> 줄거리를 찾아보고 예습할 것을 강조했다. 나또한 줄거리를 찾아보고, 몇 개 감상평도 보았다. 여행에 앞서 갔던 어느 출장길 비행기에서 <투란도트> 영상이 있어, 보고 싶은 영화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영상으로 오페라를 대강 훑기도 했다.    


공연의 막이 올랐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지만 인터미션 포함 3시간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놀랍도록 세련된 무대 세팅과 의상, 그리고 테너 Yusif Eyvazov 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 덕분이었다. 오페라가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투란도트> 줄거리가 중국의 전설을 기반으로 했기에 오늘날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PC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반감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나, 스토리의 올드함을 넘어서는 현대적 미와 아름다움이 무대 위에 가득찼다. 푸치니가 결말을 맺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아 결말또한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 이날 무대의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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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를 모두 사로잡는 무대눈과 귀를 모두 사로잡는 무대

아들은 놀랍게도 졸지 않았다. 가끔씩 조는 나의 옆구리를 슬쩍슬쩍 찌르기까지 했다. 앞 좌석 뒤에 붙은 자막화면 서비스가 헝가리어 외에 영어만 있는터라, 이 아이가 얼마나 스토리를 이해하며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졸지 않고 본 게 어딘가! 오페라에서 또 졸음을 이기지 못한 부끄러운 엄마는 아들의 무난한 첫 오페라 경험을 치하하며 부다페스트의 어둑한 밤길을 돌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이쁜 맥날 매장이라는 부다페스트 서부(누가티)역에 자리한 맥날. 호텔 복귀하며 야식.세계에서 가장 이쁜 맥날 매장이라는 부다페스트 서부(누가티)역에 자리한 맥날. 호텔 복귀하며 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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