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안경이 투명 렌즈가 되기까지
우리 인생은 매 순간 선택하고 선택을 받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오면 어떤 초콜릿을 집어올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날에는 오늘은 매운 라면? 매운 떡볶이?
기분이 꿀꿀 가라앉는 날, 함께 할 사람도 없을 땐 어떤 맥주에 어떤 안주를 집어올까?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내 기분을 180도 바꿔줄 것을 고대하며 발길이 닿은 곳은 항상 편의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 가는 그 시간이 설레고 좋다.
한 블록만 지나도 또 다른 편의점을 만날 수 있는 현재 우리나라는 편의점 제국이라 불려도 무색하지 않다.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 상관없이 모두가 애용하는 편의점은 우리 생활 속 깊이 파고들어 이제 편의점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다.
취미 생활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우. 독. 클(우아한 독서 클럽)’에서 선정된 이달의 책은 ‘불편한 편의점’이다. 일상 속 일부인 편의점 배경의 소설이라니, 참으로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익숙해서 정겨웠고, 어두운 밤 골목길을 밝히는 편의점의 삽화가 그려진 표지를 보며 읽기도 전에 따스한 기운이 전해졌다.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다양한 연령의 가지각색의 고민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평범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싶어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하며 편의점에서 일하는 시현이부터 성실히 회사를 다니며 젊음을 바쳤지만 탄약이 고갈돼 참호 속 맨몸의 병사 꼴이 된 한 집안의 가장 경만 그리고 사회 부적응자 아들과 소통의 부재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오여사까지, 그들은 고민을 귀 기울여 주는 독고로부터 위로를 받고 해답을 얻는다.
과거의 나는 돈을 벌어야만 하는 중년의 ‘오여사’와 같았다. 독고가 편의점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노숙자의 행색을 보고 그를 어딘가 모자란 인간일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까칠하게 굴었던 것처럼 외적인 기준 그리고 눈에 보이는 조건들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등급을 매겼다.
낡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같은 반 친구를 보며, 저 친구 집안은 가난할 거야. 어울리면 나도 우울해지겠지. 손바닥만 한 교복 치마를 입고 등교하는 친구에겐 재는 발랑 까진 날라리일 거야. 분명 머리도 나쁘겠지. 같이 어울리면 성적도 떨어지고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어.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저 친구는 아버지가 의사니깐, 저 친구는 어머니가 선생님이니깐, 분명 교양 있는 집에서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을 거야. 공부도 꽤 잘하겠지? 저 친구랑 어울리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 같아... 그렇게 성장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난, 오여사의 모습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독고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정이다. 해양경찰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내가 등급을 매겼던 조건들의 귀천과 상관없이 생사를 오가는 경계선에서 그들을 구해줘야 했다.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삶의 희망을 다시 찾아주는 일은 내 직업의 일부이다.
인천대교에서 뛰어내리겠다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아들을 찾아달라 수화기 너머로 울부짖는 어머니, 턱 끝까지 물이 차올라 발끝이 땅에 닿지도 않으면서 우리 엄마 먼저 구해달라 말했던 열한 살 꼬마, 호화로운 요트를 타고 떠났지만 난파되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까지.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 상관없이 생사의 경계에선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한없이 여린 사람들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높은 등급을 매겼을 법한 아주머니는 잦은 부부싸움으로 집 나간 남편을 찾아 헤맸고, 낮은 등급을 매겼을 법한 해수욕장에서 만난 검게 그을린 청년은 여기서 번 돈으로 열심히 공부해 나와 같은 해양경찰이 될 것이라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끼고 있던 색안경은 지금은 반투명쯤으로 변했다. 내가 그들을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내면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고,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품어줄 수 있는 독고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설레는 편의점에서 잘 살고 있다고 나를 칭찬하는 독고를 만날 수 있겠지.
매 순간 선택하고 선택받는 나의 인생, 오늘은 무엇을 선택하러 편의점을 찾을까? 이제는 행복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