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아이들과 함께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아이들과 얼마동안 함께 책을 읽다가 몇권의 책을 추려 무인대여기쪽으로 걸어갔다. 도서관 이용자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무인대여기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가장 짧아보이는 줄 맨 뒤에 섰는데도, 그 날은 평소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듯 느껴졌다. 줄서기가 재미없어진 아이들은 책을 더 읽겠다며 열람실로 흩어졌고, 나 혼자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십여 분 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앞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곧 내 차례가 오겠거니 기대하며 무심히 앞에 계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손에 두 권의 책을 들고 계신 할아버지는 목화솜같기도 하고 흰 깃털같기도 한 멋진 머리카락을 갖고 계셨다. 도서관과 노인아파트의 통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서관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뵙는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할아버지 뒤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예상한 시간이 훨씬 지나도 내 차례가 오지 않음을 그제서 깨달았다. 한발자국 옆으로 나와 무인대여기 화면을 힐끔 보니, 도서관증에 있는 바코드를 스캔하거나 도서관회원번호를 입력하는 단계에서 멈춰있었다. 할아버지는 도서관증을 한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는 화면 여기저기를 눌러보시며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계셨다.
‘그래, 연세가 많으시면 저런 기계를 사용하는건 어려우실수도 있지. 알고 계셨다 하더라도 자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안나실수도 있고. 도와드리는게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좀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어봤다.
여전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고, 이전보다 입을 더 꾹 다문채로 화면 이곳 저곳을 누르셨다.
‘혹시 귀가 잘 안들리시는건 아닐까, 그럼 내 말도 못들으셨을텐데’ …
“저 버튼을 누르시면 되요!”
곤란한 상황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빨리 나서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미치지 마자,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도서관증 스캔하기 버튼을 손가락으로 망설임없이 재빨리 누르자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몸을 획 돌려 나를 바라보셨다. 아차 싶었다. 할아버지의 눈빛은 날카롭고 강렬했고, 나는 뻗었던 손을 주춤거리며 내 쪽으로 당겼다. 아무말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할아버지의 그 눈빛은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는걸 눈치 챈 사람들은 다른 줄로 옮겨가서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나 누가 봤을때 싶어 부끄러웠다. 아이들이 옆에 있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그 후 짧은 시간을 머쓱하게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고, 할아버지가 책을 대출하고 자리를 떠날때까지도 난 풀이 죽어 있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도서관을 나오는데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에게 친절하게 다가간것 뿐인데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여러권의 책을 손에 들고 무거워하며 빨리 책을 빌려 집에 가고 싶던 내가, 내 마음처럼 빨리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답답했던것이 사실 내 속마음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할아버지의 기분도 나만큼이나 개운치 않긴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했다.
친절이나 도움이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셈이었다. 어쩌면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을 나 혼자 짐작해서, 친절이라는 허울을 쓰고 상처를 준적이 더 많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어땠을까. 숟가락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를 대신에 입에 밥을 넣어주거나 숟가락을 쓰지 않아도 먹을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내가 참 배려심 많은 엄마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까. 내 기준과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일들에 나는 얼마나 관대하지 못했을까. 나의 배려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늘 나에게 고마워 했을까. 아니, 때론 불편하고 기분이 상했을까.
그때 갑자기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스쳤다.
외국살이를 한지 얼마 안되었을때의 일이다. 의료보험 업무를 처리하러 관할 사무실에 찾아가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답해야할 질문이 수십개였다. 어떤 질문은 바로 대답할수 없어서 생각하거나 기억을 더듬어야했는데, 나를 담당하던 외국인 직원은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본인이 짐작하는 대답을 이것 저것 말하며 추측했다.
“이거 말이니? “ 아님, 저거 말이니?” “아, 네가 이나라 말이 서툴어 그렇구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라며, 내가 대답할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끼어드는 그 사무관이 나는 괜찮지도 않았고 고맙지도 않았다.
그는 친절했지만, 내가 대답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 언어가 서툴어서라고 짐작해버렸고, 자신이 원하는 속도에 맞춰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쉴틈없이 재촉했다. 원어민처럼은 아니겠지만 질문에 대답은 할수 있는 정도였고 그저 나는 나의 속도대로 대답을 하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르는게 아니라 조금 느린것 뿐이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느린사람을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해버린 그 사람에게 기분이 꽤 많이 상했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난, 그 날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든 사람과 똑 같은 일을 해버린 것이다. 친절과 무례는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간만의 차이로 일어날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외국이라는 사실로, 상대가 노인이라는 사실로 지레 짐작하여 의도했던 친절이 무례함과 불쾌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친절은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히 베풀어야 빛이 난다. 내 시선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는 일도 혹은 과대평가하는 일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할아버지. 짧지만 강렬하고 개인적으로는 얼굴을 붉히는, 그러나 두고두고 떠올리게 되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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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이번달 에세이스트 원고모집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기억'에 응모하려고 썼던 글이었으나 해외거주자로서 본인인증이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