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질문하는 임정아 May 02. 2024

당신은 곧 죽습니다

산후 우울증과 불면이 시작되다

"남편분 모셔 오세요. 꼭 전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외래진료 이 주일 만에 의사 선생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억지로 쭈뼛거리며 담당의를 만나고 나오는 남편의 표정은 양미간에 주름이  잡혀 울그락불그락했다.

" 다시는 이 의사 만나지 마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진료실로 들어선 남편에게 의사는 '이대로 두면 아내분은 일주일 내로 자살합니다'라고 말했단다.

 당시 나는 두 돌이 갓 지난 첫째와 생후 7개월 된 둘째를 연년생으로 키우는 엄마였다. 둘째를 가지고 임신 16주 차 접어들었을 때 자궁무력증으로 조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8주를 병원에서 꼼짝없이 누워 보냈다.  큰애가 보고 싶어서 억지로 퇴원을 하고 친정에서  다시 8 주를 버티다 결국 32주 만에 아이를 조산했다.  7월 말 한여름에 아이를 낳았는데 삼칠일이 지나고부터 온몸이 떨리고 으슬으슬 춥고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 BCG접종을 위해 병원 가는 택시 안에서 에어컨을 꺼 달라고 말하는 나는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산후풍으로 근 한 달 동안 밤마다 잠을 못 잤다. 가족 모두가 잠든 시간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 잠든 아이를 내려놓으면 무릎이며 손목 발목 온몸 관절이 쥐어짜듯 아파서 10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 이어졌다. 밤을 새웠으면 낮잠이라도 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잠깐 잠이 들려고 하면 다시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깼고 젖을 먹였다. 한의원,산부인과를 전전했지만 산후풍이라는 말만 해 줄 뿐 지어온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 가는 것도 사실 힘들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병원으로 겨울 외투를 입고 들어서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싫었다. 결국 엄마는 마지막 방법으로 무속인을 찾았다. 당시 고향 섬 안에 점괘를 잘 보는 유명한 보살이 있어 원인이라도 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동네에 있던 박수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시간이 흐른 덕분인지 굿을 한 덕분인지 밤에 잠을 자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아이도 한번 잠이 들면 새벽 4시까지는 깨지 않고 잘 잤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 이제 너희 집으로 가라. 네가 낳은 아이니 네가 키워야지. 언제까지 엄마가 봐줘야 되겠니 ?"

어느 날 아침 식탁에서 엄마가 한 말이다. 남편은 창원에서, 나와 아이들은 거제에서 떨어져 지낸 지 두 달이 되어갈 때 엄마가 내린 결론이었다. 사실 엄마는 넉 달을 나와 아이 둘을 보살피고 있었다. 둘째를 낳기 전 두 달, 낳고 나서 두 달이니 말이다. 집에 가야 하는 건 맞는데 자신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다 상해서 아이들을 혼자 키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후우울증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 친정에 있을 때 조금 나아진 불면이 밤마다 다시 찾아왔다. 집안일은 버거워서 설거지는 쌓여 가고 세탁기 빨래도 넘쳐났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큰 아이 밥을 챙겨 먹이고 둘째는 젖을 먹여야 하는데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던 탓에 모유 수유가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느리게 가는 시간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아이가 얼른 자랐으면 좋겠다 하루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매일 기도했다.


"아침 설거지는 하셨나요?"

 전날 밤을 새우고 멍하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보다가 우울증 체크 항목에 표시를 하다 보니 10개 중 일곱 개가 해당되었다. 가까운 상담센터에 전화를 해 보라고 해 전화를 걸었다. 3분 통화 끝에 상담원 병원 진료를 권했다.' 지금 당장 가까운 병원에 가 보세요. 꼭이요.그러고 있으면 죽을 수도 있어요' 큰아이를 데리고 둘째를 업고 정신없이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분에게 가장 가까운 신경정신과로 가 달라고 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병원을 묻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걱정 말라고 친절한 병원을 안다고 다독여 주고 병원 근처까지 내려다 주었다. 마음속으로는 불안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나더러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병원 사람들도 다 이상한 건 아닐까?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병원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설문지를 건네며 체크해 보라고 한다 .'자율신경계 검사'라는 것도 있었다. 상담하고 약을 처방받을 때까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런저런 질문이 이어졌고 4일치 약을 주며 다시 내원하라고 했다. 병원에 찾아온 산후 우울증 환자 중 70%는 자살 시도를 한다며 다시 꼭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6개월 정도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고. 2주를 다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을 들었다. 심각한가? 그 정도로 내 상황이 엉망이란 말인가 ?그나마 나아진 건 수면제가 들어 있어 잠을 잘 수 있으니 밤을 새우지 않아 머리 아픈 증상이 사라졌다. 불면이 오면 잠만 못 자는 게 아니라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 번은 제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평소에 잘하던 나물무침 명태 전 굽는 순서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밤새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생각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도라지나물에 쓴맛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시어른들께 지청구를 듣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다투는 모습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별별 상상이 이어져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우유를 데워 마셔 보기도 하고 발끝 부딪히기도 수백 수천 개를 해 보았지만 머리는 점점 더 나쁜 기억들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눈꺼풀은 가볍기만 했다. 약을 먹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했지만 약 때문에 모유 수유를 못 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남편의 말이 한몫해서 결국 병원 치료를 그만두게 되었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우리 마누라는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보기엔 그 의사가 더 우울해 보이더라 "


사내 연애 5년 만에 결혼한 우리는 서로 생각이 잘 통했다. 밝고 사교적인 내 모습이 좋았다는 남편은 나에게 붙은 우울증이란 꼬리표를 믿지 않았다. 지금 겪는 마음의 혼란은 연년생을 키우느라 못쉬어서 그런 거다. 우울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앞에서는 힘들다는 내색을 거의 하지 않았다. 회사 일도 힘들 남편에게 나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하루 종일 굶다가 하루에 한 끼 저녁만 남편과 같이 먹는다는 말도 아예 하룻밤을 꼬박 잠들지 못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이것도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사고의 왜곡'이라고 말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럭저럭 살아졌다. '살았다'는 게 아니라 '살아졌다'는 말이 맞는 표현이다. 우울증이란 말이 내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아이 엄마가 어린아이를 안고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내렸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는 이사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겼을 무렵이었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자꾸 생각이 났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누가 키우지? 천덕꾸러기가 될 텐데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과일을 깎다가 과도를 손목에 대어 보기도 하고 베란다에서 이불을 털다가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상상을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넥타이로 목을 졸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멍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다행히 용기가 없어서 겁이 많아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지금은 감사할 뿐이다 )혼자 있을 때면 자꾸 그런 생각이 났다.


 커피를 마시다가도 눈물이 나고 해 지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났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심리 상담을 해 주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창원시에서 하는 (건강가정지원센터) 프로그램이 있었다. 접수한 인원이 많아서 길게는 두 달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부부간 문제. 고부갈등 사연도 다양하다고 했다. 간곡하게 매달렸다. '제가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요 부탁입니다 최대한 좀 당겨 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병원에도 다녀 봤지만 약은 부작용만 심하고 너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아직 아이들이 어려요 제발 부탁합니다' 부끄러운 마음도 없었다. 살고 싶었다. (그동안 했던 죽고 싶다는 말은 정말 살고 싶다는 뜻이다.  죽고 싶다는 말은 정말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던 내가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기를 잡고 살려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마음이 전해졌던지 다행히 2주 만에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편안하게 내 말을 다 들어주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 주었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해지고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엄마와 관계 회복을 해야 한다고 엄마한테 듣고 싶었던 말 하고 싶었던 말을 속 시원하게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엄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무덤가에 가서 그 무덤을 두드리면서라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한다고 그래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이다. "엄마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뭔가요?"

"사랑 한다 잘했다는 말이요"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 나 부탁이 있는데 매일 저녁 8시에 나한테 전화를 해서 한마디만 해 줘 "

"뭔데? 무슨 말?"

"정아,사랑한다 우리 딸 참 잘했다"

" 미쳤나? 갑자기 전화해서 뭐라는거니? "

엄마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는 만날 첫날 내가 못 해 준 것만 말하네 남들 못 보낸 대학도 보내고 이만큼 잘 키웠으면 됐지 뭐가 못나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키워라'

" 엄마는 그 춥고 깜깜한 밤에 할아버지 보건소 갈 때 큰오빠도 있고 작은 오빠도 있는데 왜 나를 보냈어? 난 고작 아홉살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 몰라,기억이 안 난다"

 요즘으로 치면 전립선 비대증 정도 병을 앓고 계셨던 할아버지는 한밤중에 소변을 못 본다고 꼭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자다가 일어나 영문도 모른 채 나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웃 마을에 있는 보건지소까지 20분을 넘게 걸어서 가야 했다.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걸음이 느려지면 어떤 때는 가는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고작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간호사가 소변줄을 연결해서 뽑아내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잠시 누웠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 어떤 날은 날이 훤히 밝아 올 때도 있었다 .

"그러면 밥 해 놓고 마루까지 반들반들 닦아 놓았는데도 잘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왜 나한테만 부지깽이로 때렸는데?"

" 뭐라고? 내가 언제 ?너는 참 쓸데없는 기억도 다 하네 ."

엄마한테 섭섭하고 서운하고 서러운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와도 잘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 상장을 메리야스 통에 담아 놓았다가 소주 끓이는데 불쏘시개로 썼다. "넷이 다 받아오니 장롱 위에 넘쳐서 그랬지?" 시골 작은 학교다 보니 상도 많고 4남매가 받아온 상이 많기도 해서 그랬다고 한다. 사실 엄마가 나를 위해 희생한 것도 사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한 것도 안다. 알지만 순간순간 섭섭했던 일들이 내 기억의 방에 너무도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어서 원망도 크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우울하게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어 곱씹고만 있을 순 없다. 나도 엄마니까 내 아이들을 잘 키워야 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뭐냐 물어본다면 배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알고 있는 것을 더 깊이 배우는 것이 좋다.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M 대학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독서지도사, 어린이 영어 지도사,신문 활용 논술지도사 ,동화구연 지도사 과정을 두 학기 동안 공부했다. 그중 두 가지는 심화반을 통해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늘 지각이었다. 스스로 지각을 하지 않을 명분을 찾았다. 반장을 맡았다. 한산도로 문학기행도 가고 동기들과 소풍도 갔다. 뱃길에서 만난 갈매기, 파도를 가르는 물결조차 나를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 가까운 정병산으로 간 소풍이 중학교 때 처음 가본 수학여행보다 더 설레었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인원수를 챙기는 과정이 모두 즐겁기만 했다. 온 세상이 나를 환대하는 기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고와 최선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