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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씨 Jun 14. 2020

친절한 금자씨

효과만점, 주입식교육으로 사랑을 배우다

이미 오래전에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을 검은 염색물에 감추고 살아왔다. 세월을 붙잡으려는 혹은 거스르려는 노력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의미해져버리는 걸까. 내 것이 아닌 검은 머리칼을 버리고 되찾은 백발은 반짝이는 은빛의 매력을 가져다주었다. 금자씨는 사랑스러웠다.     

 

81년.

거의 내 삶의 2배를 살아온 금자씨는 더 이상 젊음에 미련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건강하게 마무리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할 뿐이었다. 팔팔한 30대 청춘에 남편과 사별했다. 초등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그녀는 까막눈이었다. 읽지 못한다는 불편함을 느낄 겨를도 없는 삶이기도 했다. 타고나길 총명한 머리를 가진 그녀는, 아마 공부를 했더라면 대학교수는 거뜬했을 거라고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날 나의 아버지가 평했을 정도였다. 금자씨는 나의 시어머니다. 

    

홀로 5남매를 길러야했던 금자씨는 구두공장에도 다니고 하숙도 치고 농사도 지었다. 먹고 사는 일에 여유가 생겼을 즈음 집에 불이 났다. 반 이상 잿더미가 되어버린 집 앞에서 더 열심히 사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릴 즈음 다시 물난리가 났다. 야반도주 하듯이 동네를 떠나 대도시로 나갔다. 그간 막내를 빼고 4남매는 가정을 이룬 뒤라 미련 없이 떠나올 수 있었다. 나는 금자씨의 막내 아들과 결혼을 했다.   

  

주말마다 금자씨는 광주  막내 아들네를 찾았다. 평일에는 부천 셋째 딸집에서 손자들을 봤다. 토요일 아침을 먹자마자 금자씨는 지하철을 탔다. 친구들이 있는 옛 동네에 놀러오는 것이 휴식이었다. 상주에서 일을 하던 남편은 금요일 밤에 광주로 돌아왔다.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기다린 나에게 낯선 금자씨는 불편한 시어머니였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 집에서 금자씨는 남편과 살았다. 집 앞 노인복지센터에서 한글을 깨치고, 부채춤을 배우고, 게이트볼 대회를 다녔으며 간병인 자격증도 땄다. 배움이 너무 좋았다. 육아로 어렵게 들어간 좋은 직장을 그만두게 된 막내딸네로 가지 않았다면 아직도 각종 취미생활을 하며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며느라사랑해요’

‘며느라르건강해옥하계살거라’

‘모를도행복한하루가되고사랑한다어마가며느라’     


처음 금자씨의 문자를 받았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애정표현 제로인 경상도 부모님 아래서 자란 나는 생애 첫 사랑고백을 받았다. 부모님께. 당연히 나또한 해본 적이 없었다. 가식적인 분은 아닌가, 입에 발린 말을 잘 하는 분인가 오해도 했었다. 나와는 결이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과 하필이면 고부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너는 나한테 할 말 없니?”

“예??????”     


‘우리 며느리 사랑한다’를 늘 마무리 멘트로 들려주시는 금자씨에게 단 한 번도 ‘네’ 이상의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을까? 이 돌 같은 녀석에겐 직구를 날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까?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오늘은 전화를 먼저 끊지 않겠다는 다짐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졌다. 결국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예 어머니 저도 사랑해요.”   

  

꺄아아아악. 손발이 오그라들고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쾅 쿵쾅 뛰었다. 반복학습과 주입식 교육은 역시 효과적이었다. 방목을 하고 있는 친정어머니께는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지만 이제 금자씨에겐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사랑하게 되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그녀였다. 잘하니까 칭찬을 하는 게 아니라 잘할 거란 믿음을 주려고 칭찬을 하는 그녀였다. 미안해서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더 잘해주지 못해 사과하는 그녀였다. 어느새 그녀의 긍정적인 사고는 돌덩이를 조금 말랑말랑하게 했다. 칙칙한 내 회로가 꽃분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남해안 어디메쯤 장녀로 태어나 유년기에 엄마를 잃었다. 아버지가 새장가를 가시자 엄마가 생겨서 너무 기뻤던 금자씨. 동생을 낳고 중품으로 앓아누운 새 엄마의 병간호와 집안일도 힘든 줄 몰랐다고 했다. 엄마가 계신 것만으로 너무 든든했다고 했다. 그런 엄마마저 돌아가시고 열 서너 살에는 서울 사는 먼 친척집으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몇 년 간의 품삯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목돈을 쥐어주는 걸 친척어른은 불안해했다. 금자씨는 얼른 작은 항아리를 들고 와 지폐를 바닥에 깔고 그 위를 쌀로 덮었다.     


“내가 진즉에 너를 학교에 보냈어야 했구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자신의 총명함을 이런 저런 에피소드에 담아내는 금자씨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초년의 고생과 중년의 힘겨운 고비들 속에서도 금자씨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트로트를 사랑하는 그녀는 토요일마다 트로트무대가 펼쳐지는 곳을 찾아갔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갔다. 전국노래자랑,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 가요무대, 각종 지역행사 등 좋아하는 가수가 가는 곳이라면 다 따라다녔다.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지냈던 2박 3일은 딸들과 간 여행보다 몇 배는 더 재밌었다고 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빼고는 유명하다는 도시는 다 다녀왔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친절한 금자씨가, 그런 야무진 금자씨가 이달 초에 치매 진단을 받았다. 작년 말부터 부쩍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가 싶더니, 하루 이틀 전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당신이 치매란 걸 알고 충격이 크셨는지, 병원에 함께 간 큰딸에게 역정까지 내셨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노화란 이름으로 사람을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다. 걸음도 느려지고 생각도 흐려지고 오감도 무뎌진다. 금자씨의 총명함은 노화 앞에서도 끄떡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해왔다.  

    

사랑하는 친절한 금자씨가 천천히 걸어가도 좋다. 어제 전화해서 별일 없냐, 묻고 사랑한단 인사를 남기고 오늘 또 그 일을 반복해도 좋다. 다만 그녀가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느려진 걸음에 속상해하고 자식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금자씨의 걸음걸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라져가는 기억과 잊혀져가는 추억은 우리에게 남아있으니 그저 늘 그 모습으로 계셔주기를 바란다.      


나의 친절한 금자씨 사랑합니다.


꽃을 좋아하는 꽃다운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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