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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Jan 02. 2021

인턴이 회의 중에 들어와서 커피 머신을 닦은 이유

대학생 인턴일 때의 이야기다. 상사의 수퍼바이징 없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개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금요일 퇴근 전에 커피 머신을 닦는 일이었다. 그곳에는 금요일에는 한 시간 일찍 근무를 마치는 훌륭한 정책이 있었다. 게다가 주말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커피 머신을 닦을 때,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간 수도 없이 커피를 내리느라 후줄근해진 커피 머신을 깨끗이 닦으면, 노동의 성과가 눈에 즉시 보이니까 보람차기도 했다.


어느 금요일 오후 4시 반, 나는 커피 머신 부품을 가지러 탕비실에 들어가려다가 탕비실 문 유리창 너머로, 사장과 부사장이 식탁에 앉아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본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한다.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다른 일을 좀 해 본다. 정기간행물을 인쇄소에 넘기기 전에 잘못 쓰인 게 있나 점검하는 종류의, 기계가 할 수 있다면 30초 안에 끝낼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기다린다. 고민한다. 커피 머신을 닦지 않고 집에 갈까? 그건 좀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도 없는데 커피 머신을 닦자고 30분이고 1시간이고 늦게 퇴근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커피 머신을 얼른 들고 나오면 되겠다. 30초면 될 일이다. 회의실이 멀쩡히 비어있는데 굳이 탕비실에서 회의를 하는 걸 보면, 이 정도의 짧은 방해는 예상했을 것이다.


나는 퇴근 시간 5분 전까지 기다리다가 커피 머신을 꺼내려 간다. "실례합니다." 나는 커피 머신의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그냥 평범한 커피 팟이었으면 그냥 주전자를 쑥 뽑아갈 수 있었으련만, 그 아이는 반자동 머신이라 자기 나름의 클렌징 루틴이 있었다. 푸슉 퐈아아아가 구루루루루~~ 정말이지 길어야 30초였을 텐데 그 소음은 영원같고 시끄러웠다.


"그거 좀 이따가 하면 안 되나요?" 50세 전후 교양 있는 엘리트 남성인 부사장이 심기 거슬린 듯, 그러나 역시 스마트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제가 들어가 봐야 해서요...." 나는 미안한 목소리로 (안 미안했지만) 말한다. "그냥 두세요. 제가 할게요." 부사장은 여전히 교양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답한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도 되나? 부품 분리하는 법은 알까? 이건 내 일이다. 내가 하고 가는 게 맞다. 게다가 이미 종료 프로세스가 시작됐는데, 여기서 내팽개치면 오히려 낭비 아닌가. "금세 마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나는 커피 머신의 부품을 마저 분리한다.


약 20초 뒤, 커피 머신 부품꺼내서 나왔다. 부품들을 잘 씻어서 탕비실 문 근처에 널어놓았다. 5시 10분 퇴근했다. 할 일이 별로 없고 (회사에서는 0원을 주지만, 단지 정부에서 조금 지원금 나와서) 최저임금의 절반을 받는 인턴으로서 퇴근이 늦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차간격이 1시간은 되는 열차를 놓쳤다. 기분이 나빴다. 퇴근을 10분 늦게 해서라기보다는 그 부사장의 태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실용주의자 상식적인 사람이다. 위아래를 따져 나를 나무란 게 아니었다. 그의 태도가,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너는 굳이 지금 우선순위가 아닌 일을 해서 나를 방해하느냐, 는 태도였기에 싫었다. 나는 매주 금요일 4시 반에 커피 머신을 닦았다. 그러니까 탕비실에서 그들의 회의보다도 내 업무가 먼저 예정되어 있었다. 예정된 일을 못하게 한 쪽이 미안한 척이나마 하는 것이 상식이다. 부사장은 부하직원에게도 매너 갖추는 사람이었다. 그가 전혀 미안해 하지 않은 이유는 다만 내 업무가 커피 머신을 닦는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커피 머신을 안 닦는다고 죽을 일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그 둘이 탕비실에서 회의를 하지 않아도 죽지 않고, 30초간 잠시 방해를 받거나 말을 쉬어도 갑자기 큰일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부사장과 사장이 회의를 할 때마다 방해를 받은 만큼 떨어질 생산성이 커피머신을 책임지고 닦는 사람이 없을 때 떨어질 생산성보다 클지 안 클지 누가 계산이나 해 봤느냐는 말이다. 우습게도 커피를 제일 많이 마시는 사람이 사장과 부사장이었다. 워커홀릭인  둘에게 커피는 필수 연료였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저절로 되어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공간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일은 하나하나가 사소한 노동이지만, 모이면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고, 또 큰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그 사무실에는 매일 밤마다 청소하는 사람이 왔고, 며칠에 한 번은 생수 배달하는 사람이 왔다. 한 달에 한 번씩 IT 관리 업체에서 와서 사무실의 모든 컴퓨터와 보안 상태를 점검했다. 총무부에서는 커피콩과 간식이 비지 않게 채워 놨다. 뭐가 제대로 안 되거나 조금만 더러워져도 즉각 반응해서 고쳤다.


마트에 가서 과자를 잔뜩 사 오는 일이, 깜빡이는 전구를 갈아달라고 건물 관리실에 전화를 거는 일이 그리 긴급하거나 거창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을 안 해도 그만이라고 볍게 여기는  없 철저히 해내는 직원이 없으면, 사무실 꼴은 일주일 내로 엉망진창이 된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이 없어서 편의점에 내려가 생수를 사야 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흐름이 끊어지는 게 싫어서 편의점에 못 갔더니 소변 색깔이 너무 샛노란 걸 매일같이 겪는 직장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 커피 콩이 한 달에도 일주일 씩은 비어있는 사무실에서 일해야 한다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나는 그런 데 있어 봤다. 화장실에 휴지도 며칠씩 떨어졌다.




나는 커피 머신을 닦는 일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가 실수로 카펫 바닥에 커피를 엎질렀을 때, 세탁소에 카펫도 세탁해 주냐고 문의하는 일이 싫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이었고,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노동의 결과가 언제나 정직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명시적으로 내 일이 아닐 때는 그런 일을 내게 맡기지 않기를 바란다. 기싸움 같은 거 잘 못하고 싫어하데, 아무튼 기싸움도 한다. 그런 일을 할 때마다 크레딧과 보상을 받는 '진짜 일'에 쏟을 시간과 노력이 '낭비'되니까. 이 곳의 생태계에서 내가 '사소한 일'을 하는 '사소한 사람'이 되니까.


나는 그 어떤 인턴도 커피 머신을 닦지 않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턴이 안 닦는다면, 다른 누군가 닦게 되어 있다. 돌아가면서 닦아도 누군가는 책임자여야 한다. 사무실 청소 서비스를 신청할 때 커피 머신 세척도 주문할 수 있겠다. 근데, 청소하는 사람도 사람이다. 그 사람의 업무도 업무다. 나는 커피 머신 닦는 일의 중요성과 그 일에 드는 책임감과 정신적 노력, 시간 투자를 누구나 충분히 인지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청소와 유지 관리는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누구나 해야 하고, 누구나 하려면 할 수는 있는 일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 그런 일은 돈으로도 감사로도 제대로 보상 받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할 선택권을 덜 가진 사람에게로 미뤄지고 또 미뤄지는 그 일을, 그런 일임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대로 해내는 사람이 세상에 정말 많다. 그 사실에 나는 종종 놀란다.


최근, 모 대기업의 모 대형 사옥에서 청소를 하(지만 용역업체를 통해 파견됐으므로 그 기업을 돌아가게 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는 교묘하게 박탈당한)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니까, 사실 '모 대기업'에 아무 거대 조직의 이름을 골라 넣어도 좋다. 길게는 10년간 최저임금을 주면서 부린 노동자들을 한 달 기한을 두고 (따지자면 용역 회사와 계약을 해지 한 거지만, 사실상) 해고해 버렸다. 청소가 필요 없어져서 해고했을 리는 없다. 노동조합이 임금 협상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10년 동안 쪼잔하고 구질구질하게 최저임금만 주는데도 매일 그곳에 출근해서 성실히 자신의 담당 업무를 해낸 사람들을 그렇게 대접했다는 거다. 자진해서 사직서를 쓰라고 회유하면서 수백만 원의 위로금을 제시했다는데, 편법 없이 제대로 고용했더라면 퇴직금으로 나왔을 금액에 못 미친다. 그마저도 존엄성을 계산에 넣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난 청소 노동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세상에 살기 싫다.


그러니까, 이건 내 문제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문제.


깨끗한 커피 머신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걸 닦는 사람(도구가 아니고, 사람)의 존재에 감사하는 세상, 커피 머신을 닦는 일의 중요성을 모두가 알도록 가르치는 세상을—궁극적으로는 모든가 자기의 재생산 노동을 스스로 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세상을 목도하고 싶다. 그러니까 커피 머신을 닦아야 되는데 탕비실에서 사장과 부사장이 회의를 하고 있는 사태가 다시 한번 벌어진다고 해도 나는 사과하지 않고 커피 머신을 청소할 것이다.




모자란 글이 과분하게도 어딘가 노출 된 듯 합니다. 비유적이고, 논리적 비약이 있는 글입니다. 네*트 판의 호흡으로 읽고 댓글을 다시면, 제 공간이 네*트 판이 될 것 같아 댓글을 닫습니다. 시간을 들여 능력이 허락하는 최대치 만큼 진솔하게 쓴 글이니 마찬가지로 시간을 들여 의견을 나눠 주실 분은 메일 주세요. (sunyool핫메일.com)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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