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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Jul 27. 2023

내일부터 넷플릭스 주연, ‘쌉‘가능?

시켜만 주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의 모순

“겸손이란 - 택시아저씨가 말했다..

나를 저평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2022.06.05. 나의 메모장에서)“



  


억울 플레이리스트


그래, 네가 원하는 것.


정확하게는 네가 원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 좋은 배역, 아니 좋고 나쁜 배역은 없으니 그저 좋은 사람들과 작품을 하고 싶다고. 꾸준히.


주연을 원치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에서 ‘미리 정해진 사람들’이 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네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난 다만 ‘연기가 하고 싶을 뿐’인데 세상이 네게 기회를 주지를 않는다고, 넌 그냥 기회 한 번이라도 얻으면 억울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대학교를 졸업한 지 약 2년 차부터 4년 차 정도까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억울함 플레이리스트정도라 할 수 있겠다.


마치 모든 것이 준비된 나를 몰라주는 세상 속에서 독립투사라도 된 듯한 정의감과 비련의 주인공이 한 번쯤은 느낄법한 피해의식 그 사이 어딘가를 붙잡고, 실체 없는 적군에 대해 투쟁했던 시간들.





내일부터 넷플릭스 주연, ‘쌉 가능’인 거지?


때로는 내가 나를 다뤄내고, 달래는 데에는 아주 시니컬 (cynical)하게 다이렉트로 꽂아버리는 질문, 그러니까 ‘직문(直問)’이 직빵일 때가 있다.


그래서 날려봤다. 징징거리는 나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직접적인 질문을.


- ‘좋아, 내일부터 넷플주인공, 책임질 수 있어?’

- ‘내일부터?’


나는 망설였다.


몇날며칠, 아니 몇 년을 그렇게 ‘세상이 나를 알아봐 주기만 한다면..’ 이라는 노래를 불렀더라면 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쁜 미소를 띄고 ‘응!’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시켜주면야.. 하긴 하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고..’


‘지금은 아직 준비가 안되긴 했지.. 새벽부터 촬영하면 아마 몸이 아프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들켜버렸다.


팩트는,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변명 없이 준비할 각오가, 신체, 심리, 실력, 경제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을 직면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며, 그것을 미루는 것에 대한 핑계로 나의 실패를 계속 쏠쏠하게 ‘써먹고 있었다’라는 것을.


‘왜? 진짜로 시켜준다니까?’

‘마음이 어때?’

‘네 실력은?’

‘체력은?’


‘….’


그때 알았다.

난 ‘준비된 인재’가 아니라 ‘꿈꾸는 게 자신의 일이라 착각하고 있는, 겁쟁이 만년 주연 지망생‘이었다는 것을.




시켜만 주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의 모순


“시켜만 주면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기회가 오질 않네”


굉장히 익숙한 말이다. 귀에도 익숙하고, 입에도 익숙한 말. 딱히 위로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그런, 만능 문장.


그런데, 과연 그럴까?


넷플릭스 주연을 내일부터 할 수 있냐는 질문에 ‘YES’라고 바로 답하는 대신에 그럴 수 없는 이유의 목록을 읊어대기 시작한 나 자신의 모습만 봐도, 위 문장 또한 어쩌면 의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세계적인 스타가 된 배우들은, 누가 그들을 ‘오늘부터 스타 하세요~’ 하고 시켜줬기 때문에 스타가 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연기를 원했고 사랑했으며 두려움보다는 용기가 컸고, 불분명한 것에 도전하고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수용하고 드러나는 것에 따라오는 것들을 감내했기 때문에 스타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 또한 ‘누군가가 스타로 인정을 해주었다‘는 그 사실 자체를 동경했다기보다는,


최소 1년에서 길면 20년, 30년까지도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연기 자체를 궁금해하고 사랑해 온 그 열정과 확신, 때로는 밤을 새 가면서 몇십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촬영을 해내었을 그 끈기와 체력, 짧은 기간 내에 다양하게 바뀌는 환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자기 자신의 색깔을 찾아낸 그 존중심과 독립심의 조화,


이러한 ‘능력’과 ‘미덕’들을 갈고닦아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가지게 된 사람임이 부러웠던 거 같다.


닭과 달걀, 무엇이 먼저인지 과학도 논리도 정답을 내놓지 못하겠지만, 나의 삶을 펼쳐가는 데에 있어서 ‘누군가가 시켜주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라는 엄청난 함정이자 착각에서 한시 빨리, 그리고 자주 벗어나고 깨어나야 하겠다.


우리의 과정과 결과를 성공이라 부르든 실패라 부르든, 최소한 그것을 정정당당하게 마주하고,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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