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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Jul 30. 2023

누가 요즘 인력거를 타겠어

세상 속의 나를 보기

“늘 ‘왜 나는 안 시켜줘?’ 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불만족, 열등감, 질투, 좌절, 무기력,..

만족이 없었고

감사는 잠깐의 단물이 빠지기 전에 먼저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현장에 있는 배우들이

조금씩 똑바로 또렷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많았다.


예전 같으면

‘배우가 x나 많아 내가 설 자리가 없어’라며

속으로 한탄을 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순간엔

그들이 너무 경이롭고

존경받아 마땅한 이들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감사함이 베일을 벗는 느낌이었다.

이들이 있는 이 영역에서

나에게도 주어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이고 얼마나 행운이고 얼마나 특권이며

특별한 혜택인지

새삼스럽게

그리도 당연한 것을

어쩌면 처음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게 인지됐다.


내가 돈을 얼마를 못 벌고

누구보다 몇 개를 덜하는게

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냥 이건 하나하나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내가 맡을 역할이 있다니.

이 세상에서 이 드넓은 세상에 많고 많은 존재들 속에서

나라는 사람 하나에게 ‘너가 한번 해볼래?’ 하고

뭔가를 나누고 공유하고

심지어는 내어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건….


(날짜미상)“





“세상은 나를 배우로 필요로 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이걸 해야 하지?”


이제는 세다가 지쳐버린 오디션 불합격 소식 - 아니, 무소식 - 에 아마도 어느 정도의 눈물이 두 눈에 그렁한 체로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스스로 물었던 것 같다.


오디션을 보고 보고, 또 보고 때론 ‘내 영혼 다 갈아 넣었다!’ 싶을 정도로 열심도 다하고, 실은 돈을 받으면서 공연도 하고 촬영도 하며 지냈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가 닿지 못하고 ‘고도’만 기다리고 있는 듯한 스스로의 모습에 꽤나 센치해졌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득,  그런 나의 모습이 ‘인력거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연습은 하지만 ‘나’라는 배우가, 그 ‘연기’가, 그 ‘작품’이 이 세상 어디쯤에 있는 누구에게 전달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못하고 “세상이 날 원치 않는다”는 사실만 보고 점점 지쳐가고 있는 ‘21세기 서울의 인력거꾼’.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력거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대, 아니 사라진 지 너무나 오래된 그런 세계에서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자 좌절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음을 인지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일만 바라보며 고집스러운 열정과 자부심만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고 있는.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 ‘고 여기는 바보 인력거꾼. 엉뚱한 노력과 엉뚱한 고민만 거듭하고 있는 애처로운 인력거꾼.

 

‘내가 힘을 더 길러야 하나?’


‘내 인력거가 너무 낡았나?’


‘새로운 구역을 선점해야 하나?’


‘누가 내 손님을 빼간 건 아닐까?’


‘내가 마음씨를 나쁘게 써서 그런 건가?‘


하며 자기 속만 파고 있는 바보 인력거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목적인 ‘갓생’은 고립으로 이어질 뿐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인력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얼만큼인진 몰라도 아무튼 돈을 벌었다 치자,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 누군가 인력거를 끌고 다닌다면 아마 한 두 명은 호기심에 타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옛날에 비해서는 수요가 정말 적을 것이다. (마케팅과 브랜딩의 변수는 논외로 하고)


아무리 그 사람이 ‘갓생’을 살며 매일 아침 명상을 하고, 멋지게 차려입고, 인력거를 갈고닦고, 강도 높은 달리기 연습을 한다고 해도 - 안타깝게도 그가 둘러싸인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 않는 이상.


심지어 그런 인력거꾼이 그 사람 말고도 몇 명, 몇백 명 더 있다면 버스나 전철, 택시, 자차 대신 그 사람의 인력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다. 그건 사람이 나쁘거나 부족하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다만 한 가지 놓친 치명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의 원인과 시작이 자기 자신임을 알고, 자신을 갈고닦는 태도는 감히 짐작하건대 어느 시대에 어느 국가에서 무엇으로, 누구로 살아가느냐에 상관없이 그 사람을 성공한, 최소한 행복한, 깨어있는 삶을 살게 하는 가장 본질 중에 하나임을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성찰과 노력의 초점은 ’세상과 동떨어진 나’가 아닌 ‘세상 한가운데 있는 나’에 맞춰져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몇 년 간의 내가 딱 그러했지 않았나 되돌아봤다. 세상에 대해, 적어도 내가 종사하고 있고 종사하고자 하는 필드에 대해 더욱 깊게 알아보고 공부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의 태도와 노력의 방식을 돌아보았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당당할 만큼 ‘열심히’ 했지만, ‘나’를 갈고닦고 ‘나’를 보여주고 싶어 그것을 열심히 하기 바빴지, 그것을 봐줄, 나눌, 사줄 상대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갖고 연구해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직 ‘나’만 있었을 뿐, ‘세상 속의 나‘를 검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 지쳐만 갔고, 저 구석에 스멀스멀 피해의식도 자라나고 있었던 것.


인력거꾼에 비쳐서 나를 생각하니 괜한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이 뻘쭘하니 할 말을 잃고 먼산으로 눈을 돌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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