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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Aug 01. 2023

80번째 실패에서 100번째 실패로

거절 앞에서도 식지 않을 열정

“잘 안되면. 실수. 어쩌면 실패를 했을 때

망했어! 혹은 난 안돼!

하고 screw it up 해버리는가.

나는 그래왔다.

근데

그때, 바로 그때

유레카! 를 외치며

이게 내 다음 챌린지구나!

하고 눈을 번뜩 혹은 반짝일 수 있다면

당신은, 나는, 그 사람은

성장이라는 성공을 또 이뤄낼 것임에

틀림없다.


(2022.08.16. 나의 메모장에서)“





Success is the ability to go from failure to failure without losing your enthusiasm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에서 실패로 나아가는 바로 그 능력이다.


영국의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이 성공에 대해 남긴 유명한 문장이다.


80번째 오디션 지정대본을 파일에 꽂으며 생각했다. 여기에서 100번째 실패까지 열정을 잃지 않고 나아갈 나만의 방법은 무엇일까. 이건 굉장히 ‘빡센’ 질문이다. 스무 번의 실패를 더 ‘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답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최소한 이 질문을 품지도 않는다면, 100번째까지는 고사하고 81번째 실패라도 제대로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의 ‘성공’은 무엇인가? 실패에서 실패로, 열정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나만의 무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정신적인 면에서, 그리고 실력을 키워나가는 면에서 아주 실질적인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집요하게 꾸준하게 스스로 질문하고 탐색해 나간다면, 적어도 처칠이 정의한 ’성공‘에 우리는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거절? 마치 룸메이트


배우들의 일상은, 오디션과 연습과 관리, 드러나기 (show-up)와 평가받기, 그리고 ’거듭해서 거절받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80번째 거절에서 100번째 거절까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자기만의 해답이 있어야 한다. 없다면 찾아야 하고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숙명’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일부’라고 부르고 싶다. ‘숙명’처럼 우리가 힘쓸 수 없이 ‘처해있는’ 무언가라기보다는, 우리가 선택한 일의 ‘일부’인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얘기다.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운이 나쁘거나 내가 특출 나게 못나서 겪는 저주 같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배우로 살아간다면 ‘선택되는 사건’ 만큼이나 자주, 아니 그건 좋은 케이스고, 그 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나게 될 사건이 바로 ‘거절받는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절을 ‘당한다’고 여기며 한번 한 번의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든 하늘이든 둘 중 하나를 무너뜨리고 있다. 나는 그랬다.


그런데 애당초 ’거절‘이라는 사건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었나? 아니, 늘 그 사건들을 매우 ’개인적‘으로 받아들였을 뿐, 그 ’구조‘를 공부해 보려고 한 적은 없었다.


‘거절’에 대해서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직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든 싫든 계속 함께 살아가야 할 룸메이트 같은 존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어떻게 대처할지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하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그것을 마주 할 때마다 에너지의 손실을 겪는 것은 물론 아주 쉽게 ‘애처로운 인력거꾼’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거절의 구조


일단, 거절에는 이유가 있다. 이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근데 그 이유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경우도 꽤나 많다는 건 유념해 둘 가치가 있다.


거기에는 ‘내 탓’도 있고 ‘네 탓’도 있으며 ‘구조’와 ‘시대’ 그리고 굳이 언급하자면 ‘운’이라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며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이해관계’라고 부르고 싶다.


먼저, 가장 명료한 ’숫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매우 심플하게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작품이 찾는 배우는 1명인데, 지원하는 배우는 1000명이다. 그러면 999명은 ‘거절’을 겪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고 다 아는 얘기일까?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막상 자신이 오디션 낙방을 겪을 때는 이 숫자를 떠올리지 못한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을 먼저 하고 이 사건을 검토하는 범위를 ‘나’ 하나로 좁혀버린다.


나의 태도, 실력, 경력, 조건 등등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유익한 일이지만, 고려하는 범위를 ‘나 하나‘가 아닌 ’1000명‘으로 넓히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이것만 해도 이미 관점이 넓어져 어쩌면 캐스팅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보다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 언급한 ‘내 탓’은 우리가 너무 가장 많이 분석하는 영역이기에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싶다.


간단히 말해서 ‘기본은 기본‘이다. 실력, 태도, 이미지, 작품에서 요구하는 경력, 필요한 내/외적인 조건등은 정말 ’기본‘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살 때 안전하고 튼튼하며 기름을 넣었을 때 잘 나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멈추나 안 멈추나 걱정하고 검토하면서 어떤 차를 살지 결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그렇다면 ’네 탓‘은? 선택권자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다. 그런 경우는 당사자가 범법 행위를 한 게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오디션은 ‘만남‘과 ’선택’의 과정이고 그 기준은 ‘주관적’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탓’이라는 다소 거친 표현을 굳이 쓴 것은 당사자의 ‘몫’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짚어보기 위해서다. 여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당일의 컨디션’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더 큰 구조의 영향을 받는 ’시장‘이나 ’자본(돈)‘의 요소까지.


우리가 오디션을 보러 가서 만나는 사람들이 마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여기고 그들을 어떻게 꼬셔볼까 설득시켜 볼까 잘 보여볼까 속여볼까 궁리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배우라면 누구나 하는 ‘노력’이겠지만, 실은 우리가 ‘선택’ 혹은 ‘거절’을 받기까지의 프로세스는 1:1 관계 그 이상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그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 꼭 필요한 투자를 하는 입장인 사람들이 꼭 함께 해야만 하는 다른 배우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며, 연기도 이미지도 ‘찰떡!’이라고 평가받긴 했으나, 모두가 합의한 인물의 연령대가 아무래도 스토리상 맞지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 이 모든 조건을 뛰어넘어 캐스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맞다. 그것을 향해서 가는 것을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연기만 잘하면 돼’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가 자기 방안에서만 그 실력을 펼친다면 ‘돼’지가 않을 것이고, 경쟁자가 1000명이라고 해도 자신만의 연기를 특출 나게 잘하는 배우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해당 작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예술활동을 어디서든 펼쳐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이 오디션이라는 ‘만남’은 실제로 변수 투성이이며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면서도 여러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그러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을 꼭 통하기 마련인 인간관계와 많이 닮아있다. ‘이해관계’라는 표현이 내게는 퍽이나 와닿는 이유이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고, ‘거절당하고 실패해서 낙오되는’ 패턴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성장’하는 패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구조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디션이 설레는 만남인 이유


“때로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들

속에서 온전해지기보다

처음 만난 누군가

편견이 없는 시선을 가진 존재 앞에서

더욱 진실해질 때가 있다 - 는 것을


오디션장에서 문득.

(2022.08.16. 나의 메모장에서)“


뻔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오디션은 시험이 아니라 만남이다.


비즈니스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다. 소개팅을 할 때 어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에 설레고, 그 사람에게 기왕이면 좋은 평을 받기 위해 고민하고 준비함과 동시에, 내가 가진 잣대들도 한 번쯤 훑어보게 되지 않는가?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지금까지 만났던 경험으로 봐서 어떤 조건은 특별히 피하고 싶은지, 외적으로 선호하는 것과 내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 오디션도 똑같다는 생각을 한 어떤 날, 오디션이 정말 즐거웠다. 당당할 수 있었다.


왜? 내가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잘 맞을지 만나보는’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선택이 되고, 합격이 되고, 캐스팅이 되면 우리는 만사가 ’해결‘ 될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팩트는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시작‘에 가깝다. 이제 팀원들을 매일 같이 마주하게 될 것이고, 한 줄이든 수백 줄이든 당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텍스트가 생길 것이며, 그것은 변수가 있지 않는 이상 수많은 사람들 앞에 훤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짜 ’걱정‘할 가치가 있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떤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체 이 작품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내게도 의미가 있는지, 하다못해 재미가 있는지, 돈을 벌기 위한 거라면 그들이 과연 나의 기여에 얼마만큼의 값을 쳐줄 것인지. 그런 것들을 살피고 알아봐야 하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듯 ’한번 붙으면 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당당해지자. 그러기 위해서 넓게 보고 공부하고, ‘내가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지’ 아주 보잘것없는 이유든 거창하든 상관없다. 아주 솔직하게 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먼저 잡자.


그리고 마음껏 설레보는 거다.


‘구조’를 보는 눈을 가지고 ‘거절’을 ‘시행착오’라는 자양분으로 둔갑시켜 나만의 방향성을 갈수록 예리하게 깎아나가면서 ‘만남’을 지속해 나간다면, 어쩌면 지금은 매달려서라도 붙잡고 싶었던 대상이, ‘안타깝게도 거절’ 해야 하는 대상으로, 달리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다음 실패로 나아갈 명백한 이유


마지막으로

‘거절’이 ‘그만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의 나에게, 그리고 어디선가 나와 같은 입장에 서 있을 누군가에게 이 질문을 전하고 싶다.


당신이 실패를 맞이했을 때 열정을 조금도 잃지 않고 그다음 실패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당신만의 ‘근거’가 있는가?


거절 앞에서 내가 ‘멈출 이유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난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기 위해 매일매일 나를 탐색하고 세상과 연결하고 시멘트바닥에 헤딩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답을 해냈을 때, ‘거절’에서 온전히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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