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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Aug 05. 2023

그만두고 싶다면, 그때가 시작할 때

잘 되려면 진작에 잘 됐겠지 - 라는 생각의 ‘악습’

“도저히 혼탁해 보이지 않을 땐

진흙탕이 가라앉아 맑아질 수 있도록

‘가만히’ 있는 시간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거다.

그게 올해 내가 할 일이다.

안 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필요하면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자.

(2022.01.09 나의 메모장에서)”


“모른다는 걸 알기 시작할 때

(한계에 부딪쳤다고 느낄 때)가,

비로소 그걸 알기 시작한 때 인지도 모른다.

(2023.04 나의 메모장에서)”




뭐 얼마나 해봤다고 좌절을 한대니


입시까지 포함해서 ‘배우가 되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인 지 어언 5년 정도가 흘렀을 시점, 나는 주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뜰 거면 진작에 떴겠지.

-지금까지 잘 안된 거면 앞으로도, 슬프지만 가망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우스운 건, 사실 이 생각들은 내가 처음 한 생각이 아니다. 아마도, 나의 선배의 선배의 선배들의 선배들 중에 누군가가 믿기 시작한 ‘하나의 생각’ 아니었을까?


바꿔 말하면, 마치 암암리 전해져 내려온 악습처럼,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남들이 대부분 그렇게 말하니 그것이 맞겠거니 - 하며 그냥 믿어버리는 꼴이나 다름없는 태도였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니가 얼마나 했다고 포기를 하네 마네를 해. 웃긴다.


그러게. 진짜 웃긴 거다. 대체 뭘 해봤다고 지치고 뭘 해봤다고 질려했던 것인지. 제대로 해보기나 했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초심자의 행운이란 말이 괜히 있나


초심자는 신이 난다. 마치 게임을 하듯. 방향이 명확하며, 첫 도전이니만큼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이 그저 힘차고 재밌고 수월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방금 막 마지막 레벨을 클리어한 사람은? 방향을 잃거나 더 이상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몰라 게임을 그만두려고 할 것이다. 게임이야 그만두면 그만이지만, 인생에서 그런 시점에 도달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었을까?


가장 많이 했던 선택이 스스로를 ’예전보다 못하다‘고 여기기, 혹은 반대로 나는 똑같은데 결과는 안나는 걸 보니 삶(흑은 관계나 일) 자체가 ‘뭔가 잘못됐거나 나랑 안 맞다’라고 여기기.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배우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이야 뭐든지 야심만만하고 패기가 넘치고 모든 것들이 새로우니 즐겁다.

딱히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내 ‘쪼’대로 ‘열심히만’ 하면 ‘어쨌든 발전’은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끝이 아니라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


당황스러운 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발전’이 어느 순간 ‘반복’되기 시작하더니 슬금슬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미 ‘아! 나는 한 물 갔구나!’ 혹은 ‘내 시대는 이렇게 시시하게 저무는구나!’ 같은 한탄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나 스스로를 ‘하향’이라고 여기지만, 조금만 더, 팩트를 잘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당장 어제보다는 일이 적을 수도 있고, 페이도 오르는가 싶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타기도 했던 건 사실이지만,


1년 전, 5년 전, 10년 전의 내 모습, 나의 마인드,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몸에 밴 습관들, 내가 교류하는 사람들, 나를 아는 사람들.. 등 여러 가지 카테고리에서 ‘처음’과 ‘지금’은 같지가 않았다. 분명히 달랐고, 변화가 있었으며, 대부분은 ‘성장’한 모습으로 지금 나와 함께 있었다.


하향이 아니라 이완이었다. 좋은 말이 있지 않은가,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그것을 깨닫고 나니, 내가 가닿고자 했던 훗날의 꿈들을 다시 떠올리고 싶어졌다.


나의 첫 번째 스테이지는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두 번째 스테이지는 이제 막 문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라는 말이 예전엔 더 힘 빠지는 말로 들렸었는데, 이제는 쌓인 피로와 자책감을 가볍게 덜어주는 신기한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새롭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했는데 이것밖에 안 됐어’가 성립되지 않는, 무엇이든지 괜찮고, 모든 게 새로우니 그저 즐기기만 해도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바로 그 ‘시작’인 것이다.


하마터면 이 감사한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둘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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