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 존 Aug 07. 2023

무대를 떠나 있었던 이유

처음부터 끝까지 신뢰 비즈니스

“그렇구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인성’이구나.


그 ‘인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회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하나의 챌린지를 마주했을 때

내면에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

직면하는지 하지 않는지,

무언가가 잘 안 될 때 어떻게 하는지,

원치 않는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어떻게 핸들링하는지,


즉 개인의 ’내면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흡, 분석, 표정과 움직임,

발성과 발음, 암기력과 음감, 박자감, 체력 등등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이면서도

그렇기에 아무나 습득할 수 없는

이러한 요소들은 결국

위의 인성을 다져나가고자 할 때

함께 얻어지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역으로 기본이 매우 탄탄한,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성을 갈고닦는

노력과 정성의 시간이 없고서는

그러한 기본으로 불리우는 요소들을

체득할 수 없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2020.11.02 나의 메모장에서)“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죄송하지만, 조정이 안되시면 배우를 대체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미 극장 대관 다 확정 났어!”


청천벽력이라는 말의 뜻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실제로 한 개인에게 닥쳐왔을 때 그 사람이 어떤 느낌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무대공연에서의 시간개념과 매체촬영에서의 시간개념에 대한 경험 및 이해 부족으로 인해 초래된 상황이었다.


공연과 촬영 날짜가 겹친 것이다. 말 그대로 ‘민폐’였다. 그것도 아주 중대한.


더욱 곤란했던 것은

공연은 배우 세명만이 출연하며 내가 주인공이 작품인 데다가 오직 3일 동안만 공연을 하기에 오히려 대체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 리 없었고, 가장 큰 비용이 들어가는 부분 중 하나인 극장대관은 물론 홍보까지 이미 완료된 상황이었으며,


촬영은 내가 처음으로 감독님 오디션을 보고 나름의 배역으로 캐스팅된 첫 작품인 데다가 당시 말 그대로 ‘핫한’ 감독님의 작품이었고, 조감독님의 “감독님이 배우님이 그 배역에 딱 맞다고 생각하시고 뽑으신 거라 꼭 같이하면 좋겠어요” 하시는 그 고운 마음씨까지 가세해 이것을 포기하면 오랫동안 후회와 원망을 하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말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게 맞다. 결국 공연 연출님께서 정말 호랑이 같이 화를 내시며 “한 번만 더 이러면 너 다시는 안 볼 거야”라고 하셨고,


전에도 후에도 본 적 없는 (없어야 하는) 극장 대관 일정을 변경해 주셨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울었고, 촬영도 공연도 열심히, 그리고 아주 신나게 임했다. 감사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불평불만 없이 감사만 하면서 연기할게요!’ 이런 기도를 했던 것 같다. 그새 잊고 있었다. 간사한 나의 마음이다. 다시 새겨야겠다.


아무튼,

이것은 절대 누군가에게 본이 되면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나의 경험이지만 나는 정말 아무 경험 없는 어리숙한 나에게 손을 뻗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양쪽 연출님들 덕을 한껏 입고서 ‘책임’과 ‘신뢰’라는 큰 교훈을 온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욕심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일을 돌아보며 얻게 된 또 다른 교훈은 바로 ‘욕심’에 대한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 위 사건은 100%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도 속일 수 있을 만큼 미세한 순간이었을지는 몰라도 나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당 영화 오디션을 볼 때, 대개가 그러하듯 당일 오디션장에 계셨던 조감독님께서는 나에게 ‘9월부터 11월에 스케줄이 어때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답했었다. 촬영이 9월부터 시작이지만 내가 오디션을 본 배역은 거의 10월 말이나 11월쯤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9월 말에 잡혀있던 공연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다.


‘고작 3일인데, 겹치는 게 더 이상하지’

‘어차피 한참 뒤에 우리 배역 촬영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러한 아주 안일하고 철없고 무책임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더 솔직하게 돌아보면, 이런 마음도 있었다.


‘겹치는 일정이 있다고 하면, 오디션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 일단 없다고 하는 게 답이야’라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짧은 생각. 어떠한 큰 것을 잃는지도 모르고 작은 것을 탐하는 순간.


물론 내 일정이 없다는 한마디에 모든 일정이 정해진 건 전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렸었더라면 일어난 일이 같더라도 최소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떳떳했을 것이다.


그렇게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도 오직 내 것을 더 취하고자 하는 동기로 내린 선택, 뱉은 말, 한 행동들은 결국, 취한 것보다 더 큰 손실을 야기하는 것 같다. 마치 기반공사가 부실하게 된 건물이 무너지듯.


‘욕심’에 대한 정의가 아래와 같이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저장된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욕심 : 내가 더 가지려고 하는데 더 가지려고 하는 그것 자체가 날 괴롭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욕심





몸으로 배운 ‘신뢰‘의 중요성


그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감각’을 느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게 무섭고 괴로운, 죄송스러움의 끝을 경험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지금까지 내 배우생활에 아주 본질적인 에너지원이자 근간이 되어 주었다.


‘에너지원’이나 ‘근간’이라는 거창한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내가 ‘신뢰’와 ‘책임’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나의 태도의 일부가 되고, 그로 인해 결국 실제로 좋은 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말로 배운 ’신뢰와 책임의 중요성’은 감흥이 없지만 온몸으로 배운 ‘신뢰와 책임’에 대한 배움은 매우 귀하고, 앞으로도 계속 내가 보살피고 갈고닦아야 하는 것으로 남았다.


그 후에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이것을 진정하고 싶은가’ 만큼이나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책임질 수 있는가’이다.


감정적, 실력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시간적, 물리적으로도 말이다.


드라마 촬영의 특성상, 특히 단역을 맡은 상황상 일정이 언제 바뀔지 누구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정이 미리 정해지고 공유되긴 하지만 실제로 그 일정이 몇 번에 걸쳐 수정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뮤지컬 공연의 특성은 드라마 촬영과 사뭇 다르다. 공연 일정은 물론 해당일자마다 어떤 캐스트가 무대에 올라가게 될지도 사전에 정해지고 공지되어 관객들과의 ‘약속’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변동이 있을 시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공지를 하는 편이며, 그마저도 한 배역에 두 명 이상이 캐스팅되는 ‘더블캐스트’이거나 그 이상이 아니면 제작진도 배우진도 그 일정을 ‘절대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무대와 매체를 한 시기에 병행하는 배우들이 흔치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공연을 하던 중에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하고 세명의 배우가 더 있는 무려 ‘쿼드러플 캐스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출님과 상의 끝에 서로의 신뢰와 관객과의 약속을 위해 나만 조금 일찍 막공(마지막 공연)을 올리기로 결정한 일도 있다.


결국 기존 공연기간 내에 촬영이 겹치지 않았음에도 후회되지 않았다. 신뢰와 책임이라는 배움을 갈고닦고 실천하는 데에 지불하는 수업료이자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러한 나의 배움이나 태도, 방식이 꼭 답이라거나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키워주며 상대방과 일에 대한 정직성을 지켜주는 가치인 것 같다.





2년간의 경력과 2년간의 공백, 그리고 다음 단계


그 공연 이후로 나는 2년 가까이 한 회차 이상 진행되는 무대 공연을 하지 않았다.


무대를 사랑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기회의 문이 열렸을 때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욕심’ 같아서는 둘 다 하고 싶었지만,

나는 촬영팀이 스케줄을 맞춰줄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고

다시는 어떤 공연팀에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다.


공연 오디션을 보지 않는 대신에

약 8개 정도의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해 연기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매체 연기란 무엇인지, 드라마를 하는 배우란 어떤 것인지,

연기적/ 시간적/ 관계적/ 실력적 등등의 여러 면에서 경험하고 배우고 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약’, 즉 ‘먼저 이루어진 약속’의 무게와,

앞서 언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한치 더 멀리 내다보는 것의 가치 또한 느끼고 배웠다.  


시간적인 신뢰는 물론 현장에서 내가 하는 연기 자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나의 노력이 타인으로부터 신뢰가 되어 돌아오는 감사한 일들도 많았다.


또한 무대에 직접 서지는 않았어도 내 소리와 발성을 더 내밀하게 연구하고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2년이 지난 시점인 작년(2022년)부터 다시 서게 된 뮤지컬 무대는 사뭇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때때로, 욕심을 낸다.

하나라도 더 하고 싶고, 내게 한 번 주어진 일은 도저히 놓치고 싶지가 않다.

일이 겹치면, 상대에게 양해를 구해서라도 다 내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게 가능할 때에는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정의했듯,

그렇게 하는 과정이 나 스스로를 괴롭게 할 때에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Let it go’ 하는 지혜가

앞으로도 점점 더 깊어져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많은 경우,

‘그럴듯한 열 가지’보다 ’자명한 한 가지‘가

더 멋진 건 물론, 더 강력하고,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습관처럼 선택해 왔던 방식은 열 가지를 다 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하나를 하더라도 열 가지를 하는 것처럼 정성과 에너지를 다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울 때가 온 것 같다.


+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의 일들을, 책임과 신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전 11화 그만두고 싶다면, 그때가 시작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