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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Aug 08. 2023

선불의 법칙

고도를 기다리지 마

*이곳에 쓰는 모든 글은,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글이 아니다. 그 보다는 지난 내가 지금의 나에게 재차 전하고싶은 말이자,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고자 할 일,

그러든지 말든지 하고 싶을 일.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까?


난 어차피 슈퍼스타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계속하고자 하는가?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보아주고,

알아주고, 승인해 주고,

때로 호응과 작은 열광을 해주는 것,


그것을 위해 그것에 의해

나라는 존재와 그 생애를 소비할 것인가?

아니. 그런 길을 원치 않는다.


(2022.07.04 나의 메모장에서)“






받고 싶은 만큼, 내가 먼저 선불.


회당 30만원을 받았을 때, 회당 100만원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는 받아야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정성을 들여서 연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했다. 처음엔 30만원 ‘밖에’ 안 주니까, ‘딱 고만큼만‘ 연기해야지 ‘흥칫뿡’ 뭐 이런 마인드였다. 그러다가 웬 오기 아닌 오기 같은 것이 불쑥 찾아왔다.


‘30만원 줘도, 난 100만원 짜리 아니 더 줘도 아깝지 않을 연기 할 거야.’ 내가 대우받고 싶은 만큼을 ‘먼저’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 것이다. 과연 결과는 신기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5년이 지난 지금, 출연료가 세 배 이상 올랐다. 소위말하는 크게 ‘뜬’ 케이스는 전혀 아니지만, 최소한 우상향의 그래프를 그려 온 것이다. 그 정도 했으면 오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냥 버티기만 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주는 만큼 하는 마인드’에서 ‘받고 싶은 만큼 하자’는 마인드로의 전환이 없었다면 애당초 내가 여기까지 지속해 오는 것 자체가 가능했을까?


당장 받는 댓가에 상응하는 만큼만 내어놓는 게 아니라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내어놓고자 먼저 마음먹고 노력하면, 그 빈 공간은 분명히, 자연히, 채워지리라 여겼다. 바로 그 믿음이 이끌어낸 경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돈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것에 통하는 일이겠지 짐작해 본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건데? 무엇을 받지 못해 ‘뚱’해 있는 건데!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을 먼저 만들고, 주고, 제시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


그러면 그건 그 사람의 인생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선불의 법칙. 앞으로도 내게 지혜가 되어 줄 것 같다.




수단을 위한 수단은 그만 접어두자


“배우로 성공해서 선한 영향력을 펼쳐야지!” 이와 같은 생각이 자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이자 목표라 여기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 놀랐다.


글쎄,

선한 영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길래 지금은 펼칠 수 없는 걸까? 정말로, ‘유명’해지면 갑자기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저절로 거듭나는 걸까?


내가 나에게 집요하게 물었던 질문이다. 그 질문의 시간들 끝에는 ‘성공’이라는 미명하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떠벌려 ‘손쉽게 계몽‘하고 싶어 하는, 매우 야비한 마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당장 내가 변화시켜야 하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자신이 없으니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가치관에 ‘권력’을 부여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강요 및 주입을 하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과연 나는 무엇을 쫓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던 걸까?


내가 정말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솔직하게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기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원하는 것이 때로 다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고 달려들 때 생기는 부작용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꾸만 지름길 (short-cut)을 찾아 건너뛰려 (skip) 하게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니까.


또 다른 문제는,


그렇게 달려들어 지름길을 찾고 거쳐야 하는 것들을 건너뛰어버리다 보면, 잠깐 눈에 보이는 성취는 손쉽게 얻는 듯 보일지 몰라도 오래도록 유효한 성과, 특히 자신이 ‘애초에 의도했던 결과’를 이루기 어려울뿐더러 그 과정이 스스로에게 즐겁기는커녕 ‘진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략 때워서라도 빨리 해치워버려야 하는 숙제’가 되어버리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 내 속을 모른다


결국 아무도, 심지어는 ‘우주‘조차도 내가 먼저 제시하지 않는 이상 절대 내 속을 알 수가 없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너, 나 자신아, 너 슈스 (슈퍼스타) 가 안된다 해도, 계속 배우 할 거야?’ 라는 질문은 꽤나 냉정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슈스’가 되길 원한다면 그러기 위한 모든 것을 하며 온몸을 던질 각오를 하고, ‘슈스’가 아니어도 좋다면, 언젠가 남이 주는 자리에 적당히 올라탈 생각으로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그만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지 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을 할 테고 그것이 될 테니까.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어떤 사람이 A 라는 일을 하는데,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속으로 ‘아하 - ! 보아하니 저 사람은 B를 위해서 A를 하고 있는 거군, 그렇담 내가 B를 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하나? 안타깝게도.. 네버 (never). 오히려 ‘아하 -! 보아하니 저 사람은 A 라는 일에 뜻이 있나 보구나.’ 끝. 하지 않을까?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 함으로써 드러나게 해야 한다.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세우고 알아야겠다. 그게 아니라면, 모두가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각자 목표는 대체 누가 이뤄? 그러니까,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지 말기.


내가 먼저 그냥 그것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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