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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Aug 14. 2023

나를 지킬 책임

할말하않? 할 말 꼭 하!

“어쩌면 나는 고꾸라져도 한참 전에..

멘탈도 그렇고 배경도.. 외모도.. 실력도.

그런데도 계속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제자리걸음,

아니 ‘딱 한걸음’씩이라도 앞으로 갈 수 있었던 건..

그럴 때마다 보이지 않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벽을 넘어서게 했던

무언가들… 그건 아마도.. ’용기‘?!


(2022.08.24 나의 메모장에서)“





잘 들어갔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남이사 술을 먹고 혼자 욕지거리를 하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닐지도 모른다만,


내 엉덩이를?

만진다고?

당신이 뭔데?


난 분노했다. 뒤늦게.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왔어야 했고 왜 그러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더 분노했다.


다음 날 아침 내내 씩씩 거리다가,

그 자리에 날 초대했던 감독에게 연락해 아주 ‘젠틀’하게 여쭈어보았다.


‘그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냐고.

꼭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 연락도 드리고 싶어서 그렇다고.


딱히 번호도 없고 연락하는 용도로는 ‘텔레그램’만 쓰신단다. 외국 살기도 하고 워낙 큰 비즈니스를 하셔서.


그럼 텔레그램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했다. 텔레그램을 다운로드하고 가입했다.


- “안녕, 잘 들어갔죠?

어제 만나서 진짜로 영광이었어.

당신 같은 대단한 사람을 만나다니.

심지어 내 인생과 커리어에 대해서

조언까지 해주어서 진짜 도움이 되었어. 고마워.

근데 혹시 네가 안 불편하면,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 “


영어로 대화했다. 한국인이었지만 재미교포 수준이라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황스러웠으리라 생각한다. 누가 술자리 이후 다음날 아침 텔레그램까지 가입해 안부를 물었을까 싶다.


- “어, 나도 진짜 반가웠어! 당연히 괜찮지. 어떤 건데?”


- “아, 다른 건 아니고,

어제 네가 내 엉덩이 만졌거든?

나 그거 굉장히 기분 나빴고,

네가 기억 못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꼭 얘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연락했어.

이런 오해가 있으면 ‘친구’가 되기에 무리가 있으니까 ^^“


- “내가 그랬어? 정말 미안해.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 한번 미안해.

진짜 이 이야기 언급해줘서 고마워. “


- “응. 사과해줘서 고마워. 앞으로 어디 가서도 그러지 마.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뭐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정도로 충분치 않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참고 지나가자’

‘원래 다 이런 일 겪는 거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야’

등등

내가 스스로 나의 분노를 안전하게 포장하려던 생각들을 제치고 ‘용기’를 내서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하고 나니 속이 매우 시원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더이상 미안하지 않았다.


때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을 때일지라도,

내가 나를 지키고 치유하고 더욱 당당하고 강해지기 위해서,

그 일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 여느 지혜로운 성인분들이 말씀하시듯 - 언제나 내 손에 달려있다.





감수해야 할 것과 감수할 필요 없는 것


대박 흥행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영화를 감독한 사람. 그런 감독님을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그때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너무나 ‘나이스’하시고 ‘젠틀’하신 그 분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라고 느껴질 때는


‘몇몇 분들 같이 모여서 맛있는 거 먹어요’

라는 말이 더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워낙에 예체능이나 연예업계에 권위를 이용한 성적 희롱이 흔하다는 이야기를 익히 보고 들었기에,

어쨌든 성별이 다른 관계자가 업무용무가 아닌 다른 용무로 자리를 제안하는 경우 늘 긴장하고 경계하던 나였던 만큼,


그날도 그랬다.


친한 선배에게 농담조로 웃으며

‘혹시 나 연락 안 되면 여기로 바로 와줘요 ㅋ ㅋ ㅋ’ 라고 카톡을 보냈었다.


그리고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캐스팅 기회’에 투자한다는 철없고 막연하기 그지없는 상상을 품고 자리에 나갔다.


처음 가보는 ‘프라이빗 바’의 비주얼에 입이 떡 벌어졌고, 모두가 ‘오픈마인드’였으며 그 감독이 데려온 친구라는 사람들 또한 유쾌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앉았다는 점이 아주 맘에 들었었다.


이미 언급했기에 알겠지만 그건 초반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였고,

‘술’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가 들어갈수록 그 ‘물리적 거리’는 달라졌다.


어휴, 지금 생각해도 욕이 나온다. 아주 불쾌하다.


그 둘 중 끝까지 ‘젠틀’했던 사람도 기억난다.

나머지는 끝까지 ‘S word’를 입에 올리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날 한 ‘투자‘가 가치가 있었냐고?

글쎄, 어려운 질문이다.


인생에 한 면에 대해 또 배운 것만큼 가치 있는 게 어디 있겠냐만은 그 자리 자체가 내게 가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날 한 경험에 내가 늦게나마 원하는 대로 대응한 것,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고,

덕분에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커지지 않았을까?


기대해 본다.





대체 왜 ‘안 알려줌’?


또,

극히 일부이긴 해도 분명히 일어나는 다른 일들 중 하나는, 쉽게 말해

‘알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1 - 전화가 온다. 일정을 묻는다. 나름대로 역할의 ‘이름(학생 1이라던가 간호사라던가)’을 알려준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2 - 나는 설렌다. 결과가 나온다. 대본을 받는다. 그제야 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이 통화는 1분 내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무슨 역할을 하느냐’는, 내가 연기할 인물에 감독님 혹은 작가님이 붙여두신 ‘이름’이 무엇인지 아니라, 그 작품에서 아니면 최소 그 장면에서 말 그대로 무슨 역할을 수행하느냐, 즉 ’무슨 연기를 하느냐 ‘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신인 배우는 아니 무명 배우는 앞 뒤 따질 것 없이 들어오는 배역 다 해야지.’

라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그게 사실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의견이 달랐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배우로서 책임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돈을 받고, 잘 해내기로 약속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배우가 아닌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일을 의뢰한다면, 과연 그게 성립이 될까?


디자이너에게 ‘이러이러한 웹디자인 해주세요’ 라든가 ‘이런 의류 디자인 해주세요’가 아닌, ‘내일모레에 디자인, 가능하시죠?’ 하고 통화를 끝낸다고 생각해 보면 그 모순은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캐스팅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어떤 연기를 하는 역할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거나 곤란한 상황인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묻지 않아도 간략한 상황 설명과 인물 비중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그럴 때 캐스팅 담당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하든, 호흡이 들떠있든, 혹은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해서 다시는 내게 전화를 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올라오든, 내가 연기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역할이 대체 ’어떤 역할‘인지 묻는 것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니면 그 어떤 역할을 만나더라도 하루만에 잘해낼 능력을 갖추던지,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목표 또는 기준을 낮추는 방법 밖에 없을지도.






책임. 배우의 책임


맞다. 배우는 책임을 져야 한다.

여느 다른 일을 스스로 선택한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말이다.


책임이라는 말의 의미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배우의 기본적인 책임이라는 건 최소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내는 것’ 아닐까?


그런데 본인이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도 모른 체로 그것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과연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일까?


이런 의문을 스스로 품는 것은, 내가 그런 실수, 즉 내가 책임져야 하는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일단 하겠다’고만 하는 행동을 해보았고,


그런 후 실제 나의 역할을 알게 됐을 때 실망하거나, 누군가를 탓하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나를 속이고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비단 캐스팅이나 술자리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서 그러한 것처럼, 배우로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남을 탓하는 것’은 무효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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