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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Jul 25. 2023

무명의 가치, 무명의 특권

단역? 오히려 좋아

“나는,

‘연예인은 돼 보고(만) 싶구요,

배우는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다.  

(2021.09.25. 나의 메모장에서)“





 바로 이럴 때 쓰는 말, ‘케바케’


나는 단역으로 00개 이상의 작품에 출연했다. 매번 벅찼고 즐거웠고 자랑스러웠다. 한 작품 한 작품이 소중했다. 두 줄 분량의 대사를 한 달 내내 연습했다. 그게 즐거웠다.


분량이 어떻든, 내가 하는 연기의 잠재력을 낱낱이 뒤져내 밝히고, 이 드 넓은 세상에서 오직 나에게만 맡겨진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있게 할 것인가 하는 ’합법적인 상상‘을 하고,

뻔하디 뻔한 나 자신으로부터 숱한 변주를 거쳐, 매번 대본을 들여다볼 때마다, 연습하고, 상상하고, 고민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더 진실해진다는 믿음에 다다르는 것.


그게 좋아서, 그러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단역이라서 딱히 나의 연기를 하기도 애매하다’ 라거나, ‘정보 전달용 역할이니 내가 캐릭터를 넣으면 투머치(too much)일 것 같다’는 몇몇 배우들의 걱정 내지 생각은 내게 되려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 생각들은 반은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이해가 되지만, 어쩌면 나머지 반은… 다시 생각해 볼 가치는 있는 것 같다.


물론 단역이기 때문에 단역에 ’맞는 연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일단 단역에 ’맞는 연기‘라는 것부터가 현장에 따라, 작품에 따라, 감독님의 그림에 따라,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케바케 (case by case)‘, 즉 변수들과 또 다른 가능성을 늘 염두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단역? 오히려 좋아


게다가 사실 단역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혜택들도 있다.


가장 명확한, 또 우리가 좋아하는 ’돈‘만 보더라도, 주조연들과는 격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회차 페이를 하루 촬영하고 받는 일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아싸 개이득!’ 이라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받는 페이만큼 혹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연기를 하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임해왔다.


또, 작가 연출님의 의도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비교적 자유로운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다. 주조연들과는 다르게, ‘전사’와의 연결이 필요하다거나 뒷 스토리에 재 등장한다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단역에서도 어떤 배역이냐에 따라 만들어내주어야 하는 극적 기능이 다르겠지만, 대사가 있는 단역이라면 대부분 언뜻 ‘정보전달용’ 장면으로만 보기 쉽지만 그 정보전달조차도 살아있는 연기로 해내고자 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주연보다 그 인물이 더 눈에 띄게 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게 전체 작품의 방향상 바람직한 선택인지는 스스로 검토해보아야 할 일이겠지만)


작은 디테일이 가장 큰 차이를 만든다는 말처럼, 결국 놀라운 일들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하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딱 한 장면 출연했던 작품 촬영 현장에 계셨던 조감독님이 다음 작품에 들어가실 때 내게 해당 작품의 다른 역할을 제안해 주셨던 것 같은 일들 말이다.





무명이라 다행이야


“나는 딱, 연기는 많이 하는데 밖에 나가면 아무도 이름은 모르는 그런 배우 되고 싶어.“


친한 친구가 한 때 픽 하면 했던 말이다. 무명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뭔지 빠르게 눈치챈 케이스다.


“실력이 쌓이고 나서 유명해진 게 다행이지, 시작하자마자 운 좋게 잘돼서 유명해졌어 봐요. 사람들이 나 한번 보고 더 이상 안 불렀을 걸요“라고 말씀하시던 한 강사님의 말씀에서는 무명의 필수성, 즉 그 가치를 꿰뚫어 보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대학교를 다니는 걸 참 좋아했다. 배우가 되려면 꼭 대학을 가야 하냐는 어느 후배님의 질문에 필수는 아니지만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애초에 유명이든 무명이든 그저 연기의 세계에 대해,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내게 대학교란, 프로(professional)의 세계에 당당하게 입성하기 전에 내게서 솟아나는 궁금증을 실제 실험해 봄으로써 풀어내고, 한 술 더 떠서 이상한 걸 섞어보고. “마음껏 틀리고 저질러보는 게 의무이자 ‘업’인 하나의 관대한 놀이터”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명은 공짜지만 유명은 값이 있다.


무명은 유명해질 수 있지만 한 번 유명인은 무명이 되지 못한다.


특강차 모교를 방문해 주셨던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도 기억이 난다. 가장 그리운 것이 바로 그 ’뭣도 없었던‘ 나날들이라는 말. 진심이라며, ‘잘 새겨들으라’고 힘주어 말하셨더랬다.


왜 우리는 훗날 가장 그리워할 날을 빨리 벗어나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었던 걸까. 참 아이러니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명은 유명해지지 못해 괴로워하고 유명해지면 무명일 때를 그리워하는 모순.


무명일 수 있을 때, 유명해진 미래의 내가 한없이 그리워할 이 날들을 깊이 음미하고 만끽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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