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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존 Jul 22. 2023

‘제한’하는 기술

고통의 갈림길에서 만난 내 진심

“반짝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이다.


마음을, 에너지를, 흥분을 가라앉히고

즉각적인 피드백-자극 이 없는 시간을

즐기는 거까진 바라지도 않고

견디든 겪든 할 줄 아는 것이


나의 성장에 필요하겠다.

(2022.07.04. 나의 메모장에서 )“




지금 같은 정보 과잉 시대에
앞서가는 사람은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
잘 간파하는 사람이다.

그래야만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만큼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공포스럽다.

크리에이티브가 꽉 막혀버린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크리에이티브한 일에 있어서
'제한'은 '자유'를 의미한다.

….(중략)

시도도 안 하면서 핑계만 대지 마라.
당신이 가진 시간과 공간, 재료들만으로
바로 지금 뭐라도 만들 수 있다.”

발췌 :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 오스틴클레온 지음 / 노진희 옮김 / 중앙북스 ] - 147pg





열아홉의 나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이토록 경이로운 우주를 매일 바라보는 천문학자도 되고 싶었고,


세계의 평화를 진심으로 바라는 걸 넘어 한몫을 보태겠다는 영웅심에 외교관이나 국제관계 전문가, 최소한 통번역가는 꼭 되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뿐인가, 이미 많은 것들이 넘치는 세상을 바라보아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매일 같이 샘솟아, 해보고 싶은 사업들과 만들어보고 싶은 물건들을 기록하느라 메모장이 혼란해질 정도였다.





나는 그런 나 자신에게,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하나 제시했다.


 ‘네가 딱 100년을 산다고 쳤을 때, 직업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최대 60년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시간 동안 이 모든 걸 다 할 순 없을 거야. 동시에 하는 건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낮겠지. 그렇다면, 하지 않았을 때 가장 후회가 남을 것 같은 일 하나를 꼽자면 무엇일까? 그것’만‘ 하며 살진 않되, 그것을 ’먼저‘ 시작하는 건 어때?’


그러자 나의 답은 명확해졌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배우’들이 대체 어떤 삶을 사는지 정말 궁금했기에, 그들이 걷는 길은 꼭 한 번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왠지 그 경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고, 당시의 내 삶에 잘 어울린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연기를 시작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마치 불타는 축구공 같은 열정으로 연기와 무용, 노래를 배워 대학에 진학하고 쉼 없이 달려 졸업 후 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미련은 핑계가 되고


그래, 여기까진 생각보다 심플했다.

난생처음으로 ‘진로‘라는 것을 결정하고 거기에 온몸과 마음을 던지는 일.


그런데, 그 후 수년이 지난 뒤 내게 일종의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시도하지도 않으면서 ‘꿈’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있는 미련덩어리들을 거의 매일같이 메모장에 적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은 말 그대로 미련이 남는 일들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그것을 배우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핑계로 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애석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당시의 활동에도, ‘미루어 온 꿈’들을 이루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결국,
피해 갈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 목록들이 점점 내 마음속에서 부풀어 올랐는지,


공연을 하고, 오디션을 보고, 소속사와 계약을 하고,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속에 떠도는 물음표들이 자꾸 선명해졌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맞나?’

‘내 진짜 적성이 다른 데 있으면 어떡하지?’

‘과연 이토록 무한한 삶의 가능성 앞에서

나 스스로를 배우라는 직업으로만 정의 내리는 게

바람직한 걸까?’’ 등등.


애초부터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터라,


제한을 가지고 결정을 했음에도 ‘첫 번째 목표 너머의 세상‘은 잠시 유보되었을 뿐, 아주 사그라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나의 질문들은 언뜻 당장에 처리해버려야 하는 ‘잡생각’으로 치부되기 쉬웠지만, 그것들이 배우활동 자체에 대한 회의나 의심, 불만족에서 나온 것이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내 삶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애틋함, 즉 딱 한 번 유한하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잘 살고 싶다’라는 절실함에서 나온 질문들이었기에 나는 나 스스로 답하고 헤쳐나가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런 회의의 시간들은 정말로 유익했다.  


이렇게 질문만 하다가는 뭐라도 하나 해내고 치워버려도 충분할 에너지를 고민만 하는데 다 쓰는 꼴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만 빼면.


머릿속 챗바퀴를 팽팽 도는 것에 끝내 넌더리가 날 때까지 나 스스로를 물음표들로 숱하게 괴롭힌 후에야, ‘이럴 바엔 그냥 해보자!’라는 결심을 했더랬다





 끓다 못해 결국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그렇게 난, 몇 년을 메모장 속에서 삭혀왔던 미련한 ’꿈‘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생애 최초로 창업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사업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건축대학원 입시 학원에 상담을 신청하고, 실제 국제 갈등을 해결하는 일을 하는 기관은 어디인지 검색하기 시작했으며, 천문학자들이 일하는 방식이 담겨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몇몇 시도는 꽤나 근사한 결과물을 낳았지만,


사실 대부분 그 첫 번째 시도 - 거의 박치기 수준 - 에서 이미 내 호기심이 충족되어 더 이상 그것을 갈구하는 마음이 들지 않게 되거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노력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금세 나의 인생 직업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년간 메모장에서만 들끓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처음 배우의 길을 걷겠노라고 결정했을 때는 의도적으로 제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만, 또다시 진로에 대해 결정이 필요한 시기가 왔을 때는 실제 경험과 정보를 몸으로 받아들여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에게 ‘건축’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타 분야’ 즉 ‘취미’에 속하는 항목이 되었고


’천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날 설레게 하는 흥미로운 분야이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이 되었다.


’국제관계‘는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삶의 방향성을 잡을 때마다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가치지표가 되었고


‘창업’은 나의 미래에 또 다른 든든한 가능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선물도 받았다.


바로, 그렇게 ‘헤매는’ 동안에도 ‘연기하고 싶어 하는 나’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





무한한 가능성. 맞다. 그것은 아름답다.


나는 우리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또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한한 바다’가

‘망망대해’가 되지 않도록

방향을 정하고 현 위치를 점검하고,

하나의 지점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하는 것.

분류를 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생각을 넘어 체험으로 나아가 실제로 경험하고,

덜어낼 것을 덜어내고,

강화할 것을 강화하는 행동들은,


그 과정 속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뭐 하고 있나. 왜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나’ 하는 의심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잠재력‘을 ’추진력‘으로 바꾸어 내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며 그것을 ‘현실화’ 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밟아야만 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이 ‘진로의 기로’는 나이불문 직업불문 누구에게나 때가 되면 펼쳐지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세 번째 기로에 서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써보니 이제 더 또렷이 알 것 같다.


머리만으로 결정할 수 없을 때는,

잠깐일지라도 그 세계로 두 발로 직접 걸어 들어가 보는 게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는 것. 오래 꿈꾼 일일수록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계속 부풀어 오를 것이라는 것. 때로는 무한히 펼쳐질 거라 여겼던 세상이 한 발자국 만에 정리 돼버리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도착지가 어디가 됐든, 그 여정 자체가 뜻밖의 기회를 발견하게 하고 나를 새로운 성장으로 이끌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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