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sh or a Monkey?
“나는 어쩌면 그냥 ‘나’가 되고 싶어서 자꾸만
이 길에서 한걸음 한걸음 무너져도 걷고
부딪쳐도 걷고 가로막혀도 걷는 건데,
-너 쫌 꾸미고다녀!
-너는 립이 이 색깔이 어울려.
-여배우가 다크서클이 있으면 어떡해~
이런 말들을 들으면 잠시동안 어딘지
나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기분이 든다.
몇몇은 정말 나를 사랑해서
내 매력이 그들 눈엔 보여서,
그걸 세상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칭찬 혹은 제안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 테고,
몇몇은 정말 나를 자기가 생각하는
‘배우’라는 틀 안에서 외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그 기준에 맞춰보려는 기도를 한 것일 테다.
어느 쪽이든 백 퍼센트 이해하고 또 감사하다.
왜냐하면 그런 의견들은 수용해서
내게 해가 되긴커녕
플러스될 여지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주는 사람의 돕는 마음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떠나서,
나는 나의 그 ‘어리둥절한 느낌’에
주의를 좀 더 기울여보고 싶어 졌다.
(2021.01.14. 나의 메모장에서)“
같은 얼굴, 다른 현실
만약, 영화 ‘위대한 쇼맨’, ‘스파이더맨’, ‘듄’ 등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활동해 온 ‘젠데이야 (Zendeya)‘ 가, ‘해리포터’를 보고 자라며 ‘엠마왓슨 (Emma Watson)’을 동경하여 그녀의 외모, 말투, 연기의 특성등을 따라 하려고 했다면, 과연 오늘의 젠데이야는 어땠을까? 지금의 젠데이야가 여기에 있었을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Leonardo Dicaprio)’가, ‘조니 뎁 (Johnny Depp)’을 질투하여 그의 외모와 연기의 특성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면?
나는 우리가 그들을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이름을 안다는 것, 즉 ‘유명세‘가 그 사람의 가치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만, 적어도 이러한 가정을 해보는 것은 유익한 깨달음을 주는 것 같다.
내가 ‘김태희 (혹은 수지라던가) 처럼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키가 160cm (어디서 온 ’최소한‘의 기준일까) 도 안된다‘는 이유로, 더더욱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매일 거울을 보며 ‘그녀들의 얼굴과는 거리가 먼 내 얼굴’을 비난해야 하나?
아니, 그런다고 내가 김태희 혹은 수지가 되나? 어쩌면 그들처럼 예뻐질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외형을 가꾸고 다이어트를 하고 의술의 힘을 빌리는 등의 행위는 외모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치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스칼렛 요한슨 (Scarlet Johansson)’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지만 어떤 아우라도 풍기지 않는 미국 배우를 본 적이 있다. 난 지금도 그녀의 이름도 모르거니와 그녀는 내게 어떤 영감도 주지 않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예쁘다’,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그 사람의 히스토리(history)와 추구하는 것들, 말하는 방식, 생각의 구조, 하루를 채우는 방식들 등등이 먼저 조화를 이루고, 그것이 ‘외모’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을 때이지 않은가?
원숭이의 수영솜씨, 물고기의 나무 타기 실력
만약 원숭이가, 옆 동네 강에 사는 물고기의 화려한 수영솜씨를 보며 평생을 부러워하면서 산다면 어떨까?
그 물고기는 반대로, 물 밖에서 능숙하게 숨을 쉬고 나무 위에 올라가 매달리기까지 하는 원숭이를 보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산다면?
거기에 더 나아가 원숭이는 이를 악물고 매일 같이 강물로 뛰어들고, 물고기는 한껏 숨을 참고 매일 같이 나무를 향해 튀어 오른다면?
활동을 하다 보면, 또 살다가 보면, 이러한 ‘원숭이’도, ‘물고기’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나’ 일 때가 가장 많다는 건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어떤 동료는 독립 작품들을 많이 하는 행보를 보이고
어떤 동료는 광고 쪽에서 매우 선호하며
어떤 동료는 뮤지컬을 끊임없이 하고
어떤 동료는 연극무대에서 활약한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원했던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일부는 자신이 원했던 분야와는 정작 인연이 좀처럼 닿지를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자꾸 일을 하게 되는 걸 경험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차이는,
어떤 동료는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곳에 마음도 담아서 그저 그것을 최상 (Best)로 만드는데 힘을 쓰고,
어떤 동료는 몸은 여기에 담았지만 마음과 시선은 다른 곳에 두고 계속 결핍과 실망을 느끼는데 힘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학교에서 3년 내내 무대(연극 혹은 뮤지컬 등)에서 연기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졸업 이후엔 무대가 아닌 매체 (카메라를 매개체로 연기하는), 그중에서도 정작 꿈꾸거나 상상해 본 적이 가장 적은 매체인 드라마를 통해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얼굴이 딱 영화야’ 라는 소리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선호’하는 대로 삶이 펼쳐지진 않지만 내게 펼쳐지는 것을 ‘선호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온전히 나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을 다시 새기게 된다.
물론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나의 영화’는 어디에 있나, ‘뮤지컬 주연’은 언제 하나, 하며 그것만이 의미 있다는 내가 만든 하나의 기준을 부여잡고 내가 이루어 낸 것들, 내게 주어진 것들에 기뻐하거나 감사할 틈도 없이 초조해하기만 했던 날들이 있었다.
동경하는 것을 향한 도전과 실천은 성장을 동반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교훈을 얻게 하는 것은 사실이며 원숭이의 수영실력과 물고기의 숨 참기 실력은 아마도 향상될 것이기에, 그 도전 자체는 아름답기만 하고 어떤 문제도 없다만, 비극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외부의 기준과 결과를 쫓다가 내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잊는 것 말이다. 그저 잊은 거면 되새기기만 하면 되지만 ‘시작점‘부터 옆동네 물고기만을 ‘기준’으로 삼았던 경우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런데, 배우활동을 하다 보니 위 이야기가 꼭 내 모습 같을 때가 있다.
우리는 ‘진짜로’ 다 다르다
어떤 직업보다도 ‘사람 자체가 결과’로 드러나는 직업, 그중에서도 ‘외적인 요소’들이 빛을 받는 직업. 그게 ‘배우’라는 직업이 제3자에게 드러나는 특성들이다 보니, 연기를 전공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SNS 피드는 어플을 클릭함과 동시에 화려한 사람들의 화려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뿐인가,
누군가가 작품에 ‘출연을 한다’는 소식은 그게 누구인지, 과정은 어땠는지 등의 앞 뒤 내용을 불문하고 즉각적인 인정과 부러움을 받는다. 예쁘고, 멋지고,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나도 가지고 싶다/ 닮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누가 잘되면 가장 먼저 마음이 하는 반응은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도 열심히 해서 얼른 저렇게 돼야지!‘ 하며 자동적으로 그 사람의 결과와 유사한 결과를 내려고 노력해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해 ’나는 왜 안 될까‘ 하는 자괴감과 자만심의 고리를 뱅뱅 돌곤 했다.
바로 여기에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수영을 잘하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인가, 물속에선 서툴지만 나무 위에 올라감은 물론 식사까지 가능한 원숭이인가?
내가 쫓고 있는 것은
물고기의 수영실력인가,
원숭이의 나무 타기 스킬인가?
양쪽 다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렇게 묻는 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나는 더 이상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 해쉬태그를 활용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그저 선약이 없으니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생각만으로 작업이나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부족한 배우라서 그렇다는 모호한 결론으로 멈춰 서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일을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 의견을 전하지 못해 끙끙 앓지 않는다.
내가 뭘 원하고 나는 어떤 특성이 있는 사람이며 배우인지 부딪치면서 얻은 데이터들을 토대로 내게 맞는 방식들을 찾아가고 있다. 내게 중요한 건, 얼마나 커리어를 쌓아서 부러움을 자아내는가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하는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