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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Jun 06. 2019

여전히 성장 중...

The color of peace(저에게도 외삼촌이 계십니다. 마지막)

"제 마음이 무겁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남한 국민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아무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수백만 가족, 친척들이 여전히 북한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이제는 헤어짐의 고통을 냉엄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이 겨우 수백km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엔 북한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며 가슴이 아프고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은 비극을 겪은 듯 눈물 흘립니다. 의장님, 이제 저는 안보리를 떠나며 북한에 있는 무고한 형제, 자매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합니다.  훗날 우리가 오늘을 돌아볼 때, 북한 동포를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그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던 오준 유엔대사의 연설문이다. 오준 대사의 연설 발표 영상을 보면서 나는 이산가족상봉 당시의 외삼촌의 옷매무새가 (북측 가족들 모두의 옷차림새가) 떠올랐었다.

상봉장의 나온 북측 가족들은 모두 같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TV로 보았을 때는 북한 사람들의 똑같은 차림새에 그저 어느 집에나 있는 전통 한복 같은 경우인가 보다 생각했더랬다. (여성분들은 벨벳 비슷한 소재의 한복이었고 남성분들은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모두 쓰고 계신다.) 그래서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장소에서 북한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입는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외삼촌을 뵈었을 때, (역시 외삼촌께서도 긴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나오셨다.) 외삼촌은 너무 큰 옷을 입고 계셨다. 구두마저도 맞지 않아 자주 벗겨지기 일쑤였다. '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셨을까? 혹, 최근에 부쩍 살이 빠지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바로, 모자에서 구두까지 외삼촌께서 몸에 걸치신 모든 것에 번호가 매겨져 있었던 것이다.

 

상봉행사 둘째 날, 북측 가족들을 다시 만났을 때, 외삼촌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괜찮으냐고 물으셨다. 전날 헤어지면서 그렇게 울어댔으니 걱정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었다.

"내 니가 생각나서리 잠을 잘 이루지 못했지비. 길바닥에서 하얀 에미나이가 그리 울고 있는 게 맘에 걸렸구마이."

"죄송합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잊어주세요. 외삼촌." (역시 가족은 가족이다. 이제 외삼촌이란 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남측 가족들과 북측 가족들 모두는) 함께 북한 서커스 공연도 보고 같이 식사도 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들과 앞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될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었다.  

둘째 날 점심은 북측의 초대를 받아 북측이 마련한 곳에서 모두들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쁘게 한복들을 입으신 여성분들의  안내로 우리는 가족마다 배정된 둥근 테이블을 두고 식사와 여러 가지 음식들을 맛보게 되었다. 평양냉면을 꼭 먹어보고 싶었으나 시기가 겨울이었기에 우리는 다른 요리들을 맛보았고, (사실 희한하게도 어떤 요리가 나왔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조금 있다 벌어질 나의 흑역사 때문에 음식들은 잊혀진듯 합니다.) 나는 요리보다는 테이블위에 있던 술과 그릇들이 더 눈에 들어왔었다. 술은 역시나 예상대로 도수가 엄청 높았으며 (아마도 47도 이상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중에서도 들쭉이라는 이름의 술이 나의 궁금중을 불러일으켰었다. (나중에 북한 물건들을 쇼핑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 알게 된 바로는 들쭉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블루베리 종류였습니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여러 술들을 보면서 나는 엄마에게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엄마, 아빠를 데려오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리고 그릇들은 오랜 역사와 세월을 품은 듯 하나같이 색이 바래져 있었으며 이가 듬성듬성 나간 것들도 꽤 여러 개였다. 남한이라면 빈티지라 할 만도 했지만 그 당시 나에겐 그런 별거 아닌 것들조차도 마음을 찌릿하게 하곤 했었다.

그렇게 남측과 북측 가족들이 즐거운 식사자리를 가지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큰 음악소리가 들려왔고 그 음악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산가족 상봉식에 절대 빠지지 않는, 그리고 뉴스 장면으로도 어김없이 나오는 '반갑습니다'였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북측 가족들이 하나 둘 일어나 서로 어깨를 맞잡고 연회장을 돌기 시작했다. 뉴스 장면으로 보았을 때는 그저 정말로 저들이 기뻐서 그리고 감격스러워서 얼싸안고 춤을 추는 걸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목격한 그 장면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우리 가족이 속한 이번 이산가족 상봉식에 참여한 남한 측 식구들이 점잖으신(소심하신) 분들이 많은 것일 수도 있지만 뜬금없는 (밥 먹다 말고) 춤판에 남한 가족들은 적잖이 당황들을 했었고 선뜻 나서는 이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다 어깨동무를 한  무리들이 우리 가족 테이블로 다가왔을 때 불현듯 내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기차 대형으로 어깨를 맞잡은 북측 가족 중 한 분께서 우리 옆을 지나가시면서 우리 외삼촌을 향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남기셨다.

"동무, 얼른 일어나시라우."

'혹, 이 모든 것도 정해져 있는 것인가?' 생각을 하던 그 찰나에, 외삼촌께서는 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시고 일어나셔서는 그 춤판에 합류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서로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당연히 안 하실 것이고 큰언니 부부도 딱히 마음이 없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래, 외삼촌을 위해 얼굴에 철판쯤이야..) 눈물을 머금고 나는 벌떡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청난 몸치임에도 불구하고 (외삼촌 눈에는 또 하얗고 튼실한 에미나이가 덩실거리고 있는 걸로 보일게 뻔했지만) '반갑습니다'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는 전날 만났던 그 남측 기자분에게 레이저를 쏘고 말았다.

'절대 저를 찍지 마십시오. 뉴스에 제가 나오면 기자님을 평생 저주할 겁니다.'

그리고 기자님의 눈길을 역시나. '어차피 안 이뻐서 뉴스에 못씁니다' 였다. 

민망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한 기분으로 점심을 마친 우리는 (그리고 나는) 다시 북측 가족들과는 헤어져 남측 가족들만의 관광을 하기로 했고 버스에 오른 나는 남측 가족들의 아낌없는 박수세례를 받았다.

"어이, 학생 춤을 잘 추더구먼" "우리 대신해서 수고했어" 

'에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난감하냐.. 대학 다닐 때도 안 추던 춤을 북한에 와서 추고 칭찬받을 줄이야..'

그렇게 거짓말 같던 외삼촌과의 짧은 3일이 지나 우리가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고 마지막 시간은 북측의 허락으로 감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남측의 숙소로 북측 가족들이 방문을 하게 되었다.

각자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우리는 가장 귀한 선물인 서로의 사진을 주고받았다. 외삼촌께서도 본인의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건네주셨으며 우리도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우리들의 사진까지 빠짐없이 외삼촌께 전해드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외삼촌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북한 화장품 세트를 우리들에게 선물해 주셨는데 내가 너무 놀랬던 것은 바로 우리 형제들, 그러니까 우리가 딸이 다섯인 것을 미리 아시고는 5세트의 화장품을 준비하셨다는 것이었다. (아드님이 화장품 회사에 다니신다고 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대체 북한의 정보력은 어디까지인가를 잠깐 의심하기도 했었다. (남측 적십자에서 미리 알려준 건가?)

우리 가족이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자 외삼촌께서는 숙소 벽에 걸려있는 김일성, 김정일 위원장 사진을 (현대 호텔이었는데도 사진은 걸려 있었습니다. 북한 영토이니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향해 인사할 것을 권하셨다. 분명, 북한을 오기 전 남측의 관계자들이 북한 사람들이 시키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말 것을 주의시켰지만 외삼촌의 단호한 의지에 나는 생각했다

 '그래, 소원이신데 그거 못 들어드릴까? 당연히 다시 뵈어야 하겠지만 그 시간을 기약할 수 없으니... 이곳 북한에서, 그리고 북측 가족들에게는 이것이 평생의 살아온 삶이고 신념이고 자존심인 것을.. 그렇게 이곳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분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생각이고 행동인 것을 나까짓 것이 뭐라고 이분들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생각할 수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세계인 것을..'

북측 가족들과 헤어져 남한으로 돌아온 남측 가족들의 얼굴들에는 수많은 표정들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으며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북측 가족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안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어느 것이 정답이고 어느 것이 오답인지 알지 못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의 차이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그저 각자의 주어진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한때 가족이었으며 여전히 가족이길 바라는 동포라는 사실만을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 집 장롱 한켠에는 여전히 (16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북한 화장품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겉 케이스에는 '살결물' '물크림' 등 생소한 이름들이 쓰여져 있고 '살결물' 안에는 인삼 한뿌리가 덩그러니 들어가 있다. (처음 케이스를 열었을 때 인삼주가 잘못 들어와 있는 것인가 착각을 했을 정도로 인삼의 자태는 영롱합니다. 그러니 이 화장품들을 어찌 쓰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외삼촌께 다시 달라고 부탁드리면 될 터이니 그때까지는 전시용으로 갖고 있겠습니다.)

나는 여느 사람들이 쉬이 겪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그 경험 속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과의 (외삼촌과의) 기억들을 평생 안고 살아갈 것이다. 많이 다르지만 그리고 이해할 수도 그렇다고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족이고 동포이며 아무나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나중에 오늘을 돌아볼 때 절대 부끄럽지 않은 모습들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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