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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Jun 02. 2019

여전히 성장 중...

The color of peace.(저에게도 외삼촌이 계십니다. 두 번째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과연 이 나라에서 또 한 번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확률이 극히 작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도 아니며, 역사의 흐름을 올바르게 인식하며 살고 있는 지식인(남북관계 분석가)도 아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다시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옛날처럼 총과 칼을 들고 서로 싸우는 전쟁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온갖 최첨단의 무기들을 개발해왔고 또 보유하면서 서로 간의 힘겨루기를 여전히 하고 있지만 어느 한쪽이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마음만 아니라면, 내가 경험한 북한은 전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기에 나는 (전적인 나, 개인의 의견이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의 아픔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외삼촌을 만나 뵈러 가는, 아직은 쌀쌀한 겨울 날씨가 지속되던 2월의 어느 날, 남한 가족들은 대형버스에 몸들을 실은 채 초조한 마음으로 휴전선을 넘고 있었다. 적십자 관계자분의 설명과 함께 우리 모두는 휴전선을 넘어 비무장 지대를 지나 마침내 북한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관계자분께서는 이제 곧 북한 영토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들어가는 즉시 바로 북한 군인의 검문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포장 도로가 보이고 드문드문 양 길가에 서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결코 겁이 나거나 긴장해서 굳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의 말문을 막히게 한건 바로, 양 길가에 보초를 서고 있던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15-16살 정도의 소년들이, 그리고 나의 덩치의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마르고 어린 소년들이 본인들의 키만큼이나 큰 소총을(키들이 대체로 작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어깨에 메고 아무 표정 없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남한 가족들과는 정반대의  어느 색도 더할 수 없는 회색 종이 같은 표정의 얼굴들과 초점 없는 시선들로 그저 뿌연 먼지가 이는 길가를 멍하게 바라보고들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길 중간에 멈춰 서자 그중 그나마 덩치가 크고 무서운 표정의 군인 한 명이 우리 버스로 올라와 우리들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자기의 업무로 돌아갔다. 잔뜩 움츠러든 그 짧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움직이는 버스 안의 우리 모두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남측 식구들 모두가 같은 생각들을 했었을 것이다. 우리의 아들들보다도 어린 청년들이, 저렇게나 마르고 연약한 모습으로 이 추운 겨울에 두꺼운 군복도 아닌 얇은 전투복을 입고 그 모진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모습들에 다들 마음 한편이 무겁고 쓰린 기분들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서있던 거친 도로 주변 산들은 나무들도 딱히 보이지 않던 민둥산들이었다. 관계자분의 설명에 의하면 아마도 산의 모든 나무들은 동네 사람들의 겨울 땔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어린 군인들에겐 (하루종이 길가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어린 소년들에게는) 눈에 담을 푸른빛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들을 가득 실은 우리 버스는 어느 한적한 동네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고만고만한 주택들은 있었으나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사람들이 단체 노역에 동원되었거나 아니면 남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다들 집에서 나오지를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를 가로지르는 작은 강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강가에 모여서 무언가들을 하고 있었다. 버스 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살펴보니, 그들은 강에 다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고 나를 놀라게 한 건 모든 사람들이 그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강가에 커다란 돌들을 나르고, 얼음을 깨고 그리고 다리를 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마르고 연약한 모습들이었으며 역시나 얼굴들은 아무 표정들이 없었다. 혹여나 지나가는 내가 보이지 않을까 해서 몰래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북한 방문 주의사항 중에 절대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는 말을 걸거나 손을 흔들지 말라는 규정도 있었습니다.) 우리 쪽을 주시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세계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지만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했을 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북한은 내가 배우고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고 어려운 나라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한편으로는 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북한이 아닌 남한에 태어난 것이,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꿈을 꾸고 살아갈 수 있음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기분이 들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북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미안한 기분이 그리고 저들도 어서 빨리 편해지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정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복잡한 마음들을 실은 우리 버스는 얼마 후, 북측 가족들을 만나는 장소에 도착했고 우리 모두는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연회장에서 북측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연회장 밖의 넓은 주차장으로 버스가 들어서고 그 버스에서 여성분들은 여성분들대로 그리고 남성분들은 남성분들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옷들을 입은(색상만 조금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긴장된 표정들로 연회장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곧이어 여기저기에서 기쁨과 회한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신기하게도),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우리의 외삼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진 오빠와 여동생은 물론이고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는 언니 부부와 나 또한 입구를 들어서는 등이 굽은 한 노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핑'돌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외삼촌도 무언가에 이끌리시듯이 단번에 우리 자리로 오셔서는 엄마의 손을 냉큼 잡으셨다. 그리고 조용히 엄마의 이름을 부르셨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리고 손을 마주 잡고 그렁그렁한 눈길로, 작은 끄덕거림으로 우리는 모두 그렇게 우리가 가족임을 확인하고 있었고 그런 슬프고도 따스한 인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리 가족을 비롯한 다른 모든 가족들도 어느 정도 안정들이 되었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그 긴 세월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물론, 그 한두 시간의 시간 동안 (3일간 이루어진 상봉 기간 동안 계속 같이 지내는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만남의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 외의 남한 가족은 따로 시간을 보내며 관광을 했었습니다.) 헤어져있던 엄청난 세월의 이야기들을 다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짧은 시간마저도 다들 너무 감사하고 소중했기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남측과 북측의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들을 가득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우리 외삼촌께서도 우리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 동네 이웃들부터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물어보시느라고 엄마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시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아련한 마음으로 그리고 가끔은 너무나 슬픈 감정들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너무나 쌩둥 맞게도 그리고 우습게도 금방까지도 엄마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던 외삼촌께서 옆에 앉아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농담인 거 같은 진담을 하시는 것이었다.

 "남조선 청년들은 다 너같이 하얗고 살집이 있는거이? (욕은 아니시겠지?) 보기 좋구마이.."

"외삼촌, 다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좀 통통한 편입니다. 하하..."

"우리 북조선에는 너 같이 하얀 아이는 별로 없구마이."

"네, 남한에서도 전 좀 통통한 편입니다. 하하하.." (역시, 살은 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나서 외삼촌께서는 나에겐 역시 너무 어려운 질문 하나를 '훅' 던지시는 것이었다.

"너는 위대한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이루신 평화선언문을 어더렇게 생각하고 있니? 남조선 청년들의 생각이 어떤지가 궁금하구나."

순간. 나는 '6.15 공동선언문 말씀하시는 건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던가? 대답을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 그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들을 했었던 거 같다. 잠깐의 망설임 후, 나는 그저 두리뭉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남한 청년들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평화가 오겠다고요."

"그러니? 너희 남조선 사람들도 김정일 위원장님께 감사하고 있는 거이지?"

나는 그저 외삼촌께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념이란 거리는 그저 숫자의 불과한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우리는 분명 가족이지만, 그리고 우리 엄마와 외삼촌은 같은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헤어져 살아온 이념의 거리와 무게는 너무도 깊고 무거웠다.  '위대한 김정일 위원장님께 감사하라'는 외삼촌의 말에 그저 "네"라고 대답하고 무시해버려도 그만인 것을 우리가 떨어져 살아온 그 사상과 마음의 거리는 너무 야박해서 아무 의미 없는 그 말 한마디조차도 허락지 않고 있었고 어린 꼬마와 소년의 얼굴들이 이제는 등이 굽고 하얀 머리가 성한 모습들로의 안타까운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가까워지지도 그리고 손을 맞잡을 수도 없는 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늦은 오후의 잠깐의 만남 후, 남측 가족들과 북측 가족들은 다음날의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처소들로 돌아가야만 했다. 연회장 밖 주차장까지 북측 가족들을 배웅을 하는데, (같이 남측이 준비한 저녁을 드시면 좋으련만 이유는 모르겠으나 북측 가족들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외삼촌과 엄마, 그리고 큰언니 부부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옆에서 촬영을 하고 있던 남측 기자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게 되었다.

"기자님! 우리 숙소는 여기 현대호텔인 거 알겠는데요. 북측 가족들의 숙소는 어딘지 아세요?"

그러자 그 기자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현대호텔 맞은편 위쪽을 가리키셨다.

"저기요? 저 폐가 같은 건물이요?"

기자님이 가리키신 건물은 딱 봐도 덜 지어진 것 같았고 페인트칠도 하다 말은, 불도 제대로 켜져있지 않은 (이미 어두컴컴한 저녁이 되었는대도 말이다.) 너무 추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순간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추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셔야만 하는 외삼촌이 눈에 밟혀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외삼촌은 가만히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나의 갑작스러운 울음의 의미를 다 알고 계신다는,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본인은 괜찮으시다는 그런 미소를 지으시면서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시고는 버스에 오르셨다.  버스가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있었고 외삼촌을 그런 나를 버스 창밖으로 끝까지 바라보셨다.

북측 가족의 버스가 떠난 후, 남측 가족들이 하나둘 연회장으로 들어갈 때 까지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펑펑 울고 있었다. 그렇게 꺼이꺼이 울면서 나는 옆에 서있던 그 기자님에게 울음소리 때문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야기를 건네게 되었다.

"흑..기자님! 찍지 마세요....엉엉.. 저 텔레비전 나오면 안 돼요... 엉엉.. 이렇게 울면서 부탁하잖아요.. 저 TV 나오면 기자님을 영원히 미워할 거예요. 엉엉"

그러자 기자님은 말씀하셨다.

"저 때문에 우시는 거 아니잖아요.. 어차피 그림 안 이뻐서 뉴스에 못 나옵니다."

"엉엉!! 더 슬프네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나의) 이산가족 상봉 첫날은 나의 아름답지 못한 울음으로 마무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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