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 8살 정도의 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밤을 알리는 잔잔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으로 까만색의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두 명의 아저씨가 엄마를 찾아왔었다. 똑같은 정장에 똑같은 가방을 가지고 계시던(일명 007 가방으로 불리던 네모난 가방이었습니다.) 그 두 분은 거침없이 집으로 들어오시더니 엄마와 아빠께 명함들을 건네주셨다.
순간, 어린 나의 눈에도 엄마와 아빠께서 잔뜩 긴장들을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그러자 그 두 분은 긴장하실 거 없다며, 문제가 있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며 엄마와 아빠를 안심시키셨다. 그러고 나서야 그 두 분께서는 우리 집을 찾아온 이유를 조용히 설명하시기 시작하셨다.
두 분은 나라일을 하시던 분들이었고 해외 출장차 유럽을 갔다가 거기에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났다고 하셨다. 그런데 공적인 임무를 끝내고 자유시간을 갖던 중, 북한 관계자 중 한 분이 조용히 개인적인 부탁을 건넸다고 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고 그 여동생은 아마도 고향에 있을 것이라며 동생의 이름과 고향 주소를 그 두 분께 알려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두 분은 우리 엄마의 행방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 집을 찾아오시게 된 것이었다.
나는 어렸기에 네 분의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이야기들이 무슨 내용인지를 곁에서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다만, 그 두 분이 우리 집을 떠나신 후, 엄마와 아빠가 웃으시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이야기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외삼촌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데. 결혼도 하셨고 자녀들도 여럿 낳아서 잘 살고 계신다니 안심이다."
태어나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외삼촌'이란 단어를...
엄마는 이산가족이시다. 전쟁통에 엄마의 가족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것은 아니고 반대로 엄마의 큰 오빠께서 어느 날 갑자기 북으로 올라가셨다고 했다. 동네 친구와 함께.. 나는 엄마께 여쭤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외삼촌은 왜 북으로 넘어가신 거냐고... 혹 사회주의의 이념을 가진 분이셨던 것인지, 뭐 그런 질문을 했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항상, 엄마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외삼촌의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 외삼촌께서 북으로 넘어가실 때 (엄마 말씀으로는 그때의 외삼촌의 나이는 15-16세 이었다고 하셨다.) 엄마의 나이가 3-4살였었다고 하니 그 어린 여동생이 오빠의 월북의 이유를 알리가 만무했다. 그저 큰 오빠가 있었지만 그 큰오빠는 어린 여동생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었다는 것, 막연히 그저 서로에게 한때 오빠였었고 동생이었다는 사실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간에 어마 무시한 세월의 거리와 이념의 거리에서 헤어진 채 성장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월의 무게와 쉽사리 말도 꺼내지 못했던 사연들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끈은 끊어지지 못한 채 길게 이어져 있었고 다시금 남매의 연을 그 오랜 세월을 지나 새롭게 연결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외삼촌이 계심에, 비록 남과 북이라는 엄청난 이념의 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의 외삼촌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살아계심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나도 외갓집이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2003년의 시작,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말이었고 2002년 월드컵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였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20대 중반에 막 들어서던 시기였으며,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뇌하던 시절이었다.(있어 보이고자 고뇌라 하였으나, 사실 백수였죠. 하하..) 아직은 한창 겨울이던 그때, 우리 집으로 전화한 통이 걸려왔다. 그리고 전화 속의 여자분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머님!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어머님이 참여하시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계시는 오라버니께서 어머님을 찾으셨어요. 남측 가족으로는 최대 5명까지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결정하시면 저희에게 연락 주세요. 축하드립니다."
그 당시 이산가족 상봉은 교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번은 남측의 가족들에게 신청을 받아 북측 가족을 찾게 되고, 또 한 번은 북측 가족들이 신청을 한 후, 남측 가족을 수소문하여 연락을 하는 것이다. (상봉 장소는 늘 현대 기업이 운영하던 금강산 호텔이었습니다.) 그런 과정 후, 찾게 되는 가족은 혼자만이 상봉식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만나러 가는 가족들은 최대 5명까지 참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늘 마음은 있었으나 쉽사리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먼저 나서서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감사하게 북한에 계시는 외삼촌이 우리를 먼저 찾아 주신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우리 가족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외삼촌을 만나러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과연 이 많은 식구들 중에서 5명을 추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즉, 당사자인 엄마를 제외하고 4명을 누구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아빠는 당연히 본인께서 가야 한다고 하셨고 엄마는 아들내미를 데려가고 싶으셨으며 언니들도 다들 참여하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듯했다. (상봉 날짜가 절묘했죠.)
일단 남동생은 그 당시 군대를 제대한 후 학교 복학을 준비하는 시기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둘째 언니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집을 비우기가 힘들었으며, 셋째 언니는 공무원 신분이라 (뭐,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냥 부모님들께서는 걱정이 되셨던 것입니다.) 제외가 되었으며, 넷째 언니는 자신의 일을 막 시작한 시점이라 너무 바빴기에... 결국, 백수였던 나와 너무나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큰언니 부부가 당첨이 되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아부지가 큰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아부지는 뼛속까지 보수진영이셨다.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일명 빨갱이라 칭하던 그런 사상을 가지셨던 분이셨던 것이다. 가족인 우리들은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그저 그러려니 하겠지만, 북한에 가서도 그런 소리를 하신다던가 빨갱이의 'ㅃ'만 나오더라도 어쩌면 북측에 억류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내심(식구 모두들에게)걱정들이(두려움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빠께서는 본인이 왜 북한에 가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겠냐며 장담을 하셨지만 우리 아버지의 또 다른 약점인 술이 있지 않은가? 익히 알고 있듯이 북쪽 지방 술들은 도수가 높기로 유명하기에 북한 술을 조금만 드시더라도 아빠께서 실수를 하실 확률이 농후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술 드시고 실수가 다반사였는데, 그 독한 술에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리하여 근 1년을 가는 아빠의 삐지심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우리는 아빠를 제외 시켜야만 했었고, 그렇게 엄마와 큰언니 부부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북한을 가게 되었다.
상봉 날짜 하루 전, 먼저 남측 가족들은 강원도 고성에 모여 교육을 받았다. 모든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늘 있는 일이었지만, 조금 특별했던 이유는 그때가 바로 역대 이산가족 상봉행사 중에서 최초로 육로를 통해 북으로 가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늘 배를 타고 동해상을 통해 휴전선을 넘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6.15 공동 선언문 이후, 육로를 통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우리 가족이 역사적인 그 행사에 최초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남한 쪽 적십자 관계자분들께서 나오셔서 북한에 가서 주의해야 할 점, 일정, 그리고 북한 가족들에게 전해줘도 되는 물건들과 아닌 물건들, 그리고 북측 가족에게서 받아도 되는 물건들과 아닌 물건들,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이 끝나고 다시 남측으로 내려올 때 신고해야 하는 일들 같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 교육을 받는 동안, 나는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멀미가) 나의 뱃속에서 일렁거림을 느꼈다.
분명,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북한과 남한은 한민족이라고 배워왔다.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고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고 말이다. 언젠간 통일을 이룰 것이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언어가 같고 같은 역사를 겪으며 살아왔으니 별반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그렇게 우리 모두는 동포라는 이름 아래 하나라고 배우고 인식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북한으로 가기 전 사람들이 전해준 이야기는 너무 낯설고 약간 무서운 기분도 들게 했다. 언어만 같을 뿐이지 모든 게 달랐다. 우리나라 화폐도 외삼촌께 전해드릴 수 없으며 우리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대통령의 이름과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이름도 쉬이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고 심지어 사람을 함부로 부를 수도 그렇다고 북한의 경치를 사진으로 담을 수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도 없었다.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데, 나는 목구멍까지 꽉 막힌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고 외삼촌을 만나러 가는 이 짧은 길이 (고성에서 1시간가량밖에 안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여행길보다도 멀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고 어지러운 느낌 속에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다음날 엉망인 기분으로 생전 처음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절대 마지막이길 바라지 않는 휴전선을 넘고 있었다. 더불어, 최초로 육로를 통해 북으로 향해가던 그때,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적십자 관계자분께서 차로 이동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남측 가족들의 여러 가지 기기들 (핸드폰이라던가 카메라, MP3 플레이어 같은 것들)을 수거하시다가 나에게 (잠을 설쳐 초췌한 나에게)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학생! (감사합니다. 학생으로 봐주셔서..) 그거 알아요? 이번 상봉가족 중에서 학생이 최연소예요. TV 카메라가 잡으면 환하게 웃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