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young May 24. 2019

여전히 성장 중...

Cherry  red (가끔은 돌 + I  라도 괜찮아.)

나는 늘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로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그다지 모나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떤 무리에 속하더라도 그냥저냥 아무 문제없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유별나게 두드러지지도 그렇다고 아주 뒤처지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균치의 삶을 살아왔다.

이런 무난의 성격의 소유자인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나는 주변 지인들의 "너는 사교력도 괜찮고 어느 누구 하고나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좋은 거야.." 혹은, "성격 좋은 네가 참아라! 넌 이런 일 다 이해할 수 있잖아?"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들은 간혹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때도 적지 않게 많다.

이를테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챙기고 편안하게 만들어 줘야 하는 일이 당연히 나의 몫으로 배당되곤 했으며 (저 또한 그런 임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기도 합니다.. 일종의 직업병인가?) 사람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해야 하는 일들 또한 주로 나의 책임으로 돌려질 때가 종종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도 가끔은 사람들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더라도 그저 그 분위기를 즐기며 외딴섬이 되어 보고 싶을 때도 있으며, '저 사람 뭐야? 돌 + I 인가? 왜 저러고 있어?'라는 평가도 가끔은 들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비록, 그게 진정한 나의 모습은 아닌 그저 연기일 뿐이라도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 (다른 아이들보다..) 홍역을 앓게 되었다. 예방접종을 받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나는 붉은 반점들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는 집에서 두문 분출하며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일주일을 홍역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홍역은 한 3일 만에 치유가 되었고 나머지 며칠간은 그저 집에서 좌로 뒹굴 우로 뒹굴거리며 학교에서 고생하는 친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저 마냥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홍역이 더 오래 나에게 머물러 그 다음 주도 학교를 안 가길 바랬었던 같기도 하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만은..) 투병생활이 한 4일쯤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부모님은 출타를 하시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넷째 언니와 집에서 온갖 장난을 치며 놀고 있던 그 순간, 우리 집 담벼락 뒤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형제가 많은 관계로 늘 있는 힘껏 고함을 쳐야지만 알아듣는 척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서 듣기 싫은 소리는 못 들은 척할 수 있는 고수들입니다.)  우리는 놀던 것도 잠시 멈추고 대문 밖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담벼락 위로 얼핏 보이는 실루엣은 바로 그 당시 우리 학교로 처음 부임을 해오신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다. (남자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사생활을 처음 시작하신 분이었기에 열정과 사랑이 넘치셨고 (선생님은 나중에 내가 6학년일 때도 담임을 맡으셨는데, 그때는 뭐 그냥 선생님이셨습니다. 세월이 사람을 길들인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며칠째 학교를 나가지 못하는 내가 걱정스러워서 음료수를 직접 사시고는 우리 집을 방문하셨던 것이었다. 순간, 우리는 적잖이 당황들을 했었다. 왜냐하면 어렸었던 언니와 나는 그 상황이 마치 우리가 무언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느껴졌었던 것이었다. 이미 몸은 다 낳았는데..., 그러니 학교를 나가도 되는데..., 꾀병을 부리며 집에서 무단결석을 하고 있는 모양새로 보일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어렴풋이 우리들을 발견한 선생님께서 집안으로 막 들어오시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언니가 배운 적도 없던 유도 동작으로 나를 패대기를 치더니 두꺼운 이불을 나의 머리까지 덮어 씌우고는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아픈 척 해! 절대 일어나면 안 돼. 그러면 너도 나도 엄청 혼나는 거니까.. 무조건 죽은 척을 하라고."

내가 병이 다 나은 게 뭐 그렇게 죽을죄라고 우리는 돌아이 짓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이미 여름이 시작된 그 시기에 두꺼운 이불속에서 아픈 척을, 그리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어설픈 연기를 펼치고 있었고, 선생님은(당연히 눈치를 채셨겠지만 그저 언니와 나의 돌아이 짓을 그저 걱정스러운 연기로 맞받아 쳐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6학년 때 나를 다방면으로 늘 놀리셨던 것인가?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단추가 맞춰지는 듯한 느낌은 기분 탓인가?) 나에게 그리고 언니에게 잘 쉬고 잘 먹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무조건 학교에서 보자며 (역시 선생님은 눈치를 채신 것이었다.) 음료수를 주시고는 우리 집을 떠나셨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는 우리의 돌아이 짓이 완벽했다며 자랑스러워했고 연기를 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며 잠시나마 되지도 않는 자만심에 빠져들었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해하세요. 어렸잖아요..)

지금의 나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돌아이 짓은커녕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웬만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순응하며 묻혀 지내고자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른이 되었기에 당연히 어린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고 배운 사람으로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아니면 말고요.) 사회의 여러 가지 법들과 규범들을 그리고 보이지 않더라도 서로 간의 예의와 배려를 지키고 살고자 노력하며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가끔은 우리 어른들도 '돌아이 짓을 (범죄가 아니라면 말이다.)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린아이들처럼 그저 스스로의 삶이 가장 중요한, 그런 행동들이 가끔은 용납이 된다면 이 힘든 인생이란 길에서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몇 년 전 고3 아이들 세 명이 함께 수업을 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단어를 외우게 하고자 조건을 걸게 되었다. 바로 단어시험을 볼 때, 단어 하나당 100원의 상금을 걸었던 것이다. 혹 아이들이 틀리면 그 아이들이 틀린 개수대로 벌금을 내고 세 아이들이 맞춘 단어들의 평균치의 금액은 내가 돈을 적립해서 일정 금액이 될 시 치킨파티를 하자고 제안했었던 것이다. 그 방법은 효과가 뛰어났었고 아이들은 쉬이 만점들을 받으며 나의 지갑에서 피 같은 돈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개월, 우리는 엄청난 닭들을 아작을 냈고 치킨 쿠폰은 쌓이고 쌓여서 무료 치킨을 받을 수 있는 시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치킨이 먹고 싶었던 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이었기에 늘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머리를 써서는 치킨 두 마리를 먹자며 나에게 조심스레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무료 치킨을 먹고자 하면 쿠폰이 12개가 있어야 하는데 수중엔 9개의 쿠폰이 있었고, 나는 9개의 쿠폰으로 어떻게 닭을 주문할 수 있겠냐며 몇 번의 단어시험을 더 본 후에 먹자고 하였으나 아이들은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차분히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두 마리를 시키면 쿠폰을 또 두 개 주잖아요."

"야들아, 그래도 11개잖아. 하나가 모자란다고..."

그러자 한 아이가 주머니에서 자랑스럽게 쿠폰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반 친구에게 얻었다는 같은 브랜드의 치킨 쿠폰이었다.

"선생님, 얼른 전화해주세요. 두 마리! 호레이!!!"

그렇게 나는 치킨집에 전화를 해서 두 마리의 치킨을 주문해 놓고는 잠시 후 아이들을 데리고 치킨을 찾으러 가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친구에게 받아왔다는 치킨 쿠폰을 살펴 보았는데.... 헉! 그 브랜드는 매장별로 별도의 쿠폰을 발행하고 있었고 오로지 같은 매장의 쿠폰만이 무료 치킨의 혜택이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에게는 11장의 쿠폰만이 쓸모가 있다는 것이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후 나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쩔 것이여!! 닭은 이미 튀김옷을 입으셨을 터인데... 이 상황을 어쩔 거냐고!"

순간 당황한 아이들은 황당한 이야기들을 나의 차 뒷자리에서 쏟아내고 있었다.

"야, 일단 그놈을 내일 학교 가서 패주자."

"니들이 잘못하고 왜 엉뚱한 애를 잡아!!"

"그럼 급히 쿠폰을 보고 그려볼까요?"

"야! 그건 공문서 위조야.." (맞나? 나도 모르겠다.)

그중, 가장 황당한 것은... 바로 다음 대사였다.

"야, 우리 둘이 들어가서 닭을 찾는 동안 너는 가게 밖에 쓰레기통을 뒤져! 분명, 쿠폰 하나는 나온다." (어? 참신한 것 같기도 한데..)

'저런 돌아이들을 봤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결국 나는 지갑에서 또 나의 피 같은 돈을 꺼내게 되었고 떨리는 손으로 그 돈을 아이들에게 쥐어 주었다. 치킨집 앞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세 명의 아이들은 치킨집을 나와 내차로 쏜살같이 뛰어오더니 차에 타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선생님!!! 튀어요..."

결국, 아이들은 11장에 쿠폰만 바쁘신 사장님께 전해드리고는 냉큼 가게를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에라이, 돌아이 같은  넘들.. 치킨이 그렇게나 좋았던 것이냐?'

그 다음날 (바로 가서 수습하기엔 아이들이 민망해할 것 같아서 다음날 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의 담임선생님께서 언니와 나의 돌아이 짓에 동참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그래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치킨집에 가서 상황을 설명드리고 값을 치르려고 했으나 너그럽고 훌륭하신 사장님께서는 껄껄 웃으시면서 자주 시켜 드시는데 괜찮다며 아이들을 혼내지 말라며 용서해 주셨다.

이제 그 아이들도 다들 성인들이 되었고 그 시절 그들의 황당한 일들은 기억 속에서 어렸기에 할 수 있었던 일들로 남아있겠지만, 언젠가 그들이 모여서 과거를 회상할 때, 그 돌아이 짓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다 괜찮고 모든 일들을 무조건  다 참고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드물다. (정말 있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 속에 속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참고 인내하며 괜찮은 척, 다 이해하는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살아가라고 배웠기에, 남을 배려하며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이해하라고 숱하게 들으면서 자랐기에 우리는 나보다 남을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이 세상은 아름답게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끔은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아프지 않더라도 아픈 척해가며 그리고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황당한 일들을 꾸미며 돌아이들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나도 그 돌아이 짓에 (너무 티가나지만) 모른 척 동참해서 얼굴 붉어지는 창피함을 누려보고 싶기도 하다.

이전 25화 여전히 성장 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