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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글 Sep 13. 2024

멀어지는 연습

동네 똥개같던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남편, 우리 이렇게 차에 나란히 앉아 같이 달린 시간이 평생 몇 시간쯤 될까?”

며칠 전 큰 딸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문득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지루한 고속도로 위에서 간만에 신선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수만 시간은 되지 않을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수만 시간 중 어느  날

그렇다. 우리는 유학생 부부였던 이십대부터 학기가 끝나면 지도 한 장 들고 낡은 중고 캠리를 몰며 미국 땅을 달렸다. 끝없이 주 경계를 넘고 나라도 넘으며 달리다 피크닉 공간을 만나면, 보라색 꽃이 그려진 법랑냄비에 우동을 끓여먹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길 잃은 남편을 위해 멀미를 참아가며 지도를 읽었고, 졸다 깨보면 내 눈 앞에 캐나다 밴프의 엄청난 바위산이 펼쳐지기도 했다.


요즘 기안84의 태계일주에도 나오는 그 멋진 콜로라도의 로키산맥도, 뉴욕의 밤거리도 다 함께였다. 멋진 순간들도 많았지만 시카고에서 콜로라도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기장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비행기가 추락할 뻔한 사고도, 첫 아이를 낳다 내가 죽을 뻔한 위기도 함께 넘기고, 각자의 부모님도 한 분씩 떠나보내며 그렇게 우리는 이십일 년을 함께 달렸다.


이 또한 우리의 기억이 되리니

남편이 며칠 전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 게이요 대학에 안식년을 보내러 갔다. 수만 시간의 동행을 잠시 멈추었다. 출장은 잦았지만 결혼하고 떨어져 산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엔 진짜 6개월을 따로 살아야 한다. 주변에선 은근 많이들 부러워한다. 나도 휴가 받은 느낌으로 잘 지내면 되는데, 왠지 떠나기 전날, 같이 짐을 싸주고 싶진 않았다. 자주 들어올 거니까 금방 보자며 출장 가듯 남편은 떠났다. 나는 자다 일어난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가 가자마자 무거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막힌 변기를 뚫어야 했다. 무엇보다 아침밥을 꼭 먹는 남편을 위해 쌀을 씻어 안치던 밥통의 온기가 사라지자 그의 빈자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집에 혼자 자는 것도 무서워한다. 그래서 혼자 불 끄고 자는 밤을, 나는 연습 중이다.




큰 딸은 기숙학원에서 재수중이다. 햇빛이 잘 안 드는 늘 추운 동네라 양지면이라 이름 지었다는 용인의 어느 학원에서 아침 6시면 기상점호를 하며 8개월째 지내고 있다. 요즘은 군대도 핸드폰을 쓰게 한다는데, ‘재수’하는 자들은 ‘죄수’쯤 되는 건지 핸드폰은 한 달에 한번 휴가 나올 때만 주어진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낯선 번호로 걸려오는 15분정도의 통화로 딸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기엔 턱도 없이 모자란다.

개늑시의 하늘

한 번도 부모와 떨어져 산 적 없던 큰 딸은 나보다 훨씬 빨리 감정적인 독립을 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직까지 엄마가 보고 싶어 운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휴가 받아 집에 올 때면 그녀의 가방 속엔 가족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동생주려고 아껴둔 간식들로 가득 차 있다. 지난  달에는  매점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파란봉지의 오예스를 거금 칠천 원이나 주고 사왔다. 슈퍼를 들러 아이스크림도 가족 수대로 사 넣고 내가 좋아하는 아침햇살과 동생의 잠 깨워줄 게토레이까지 검은 봉지에 달랑달랑 들고 장군처럼 들어온 그녀, 오빠라 불러도 괜찮을 포스였다. 가방이 무거워 안아줄 팔도 없고 사실 숫기는 더 없는 그 아이가 일단 머리부터 들이밀며 나에게 안기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파란 오예스가 특히 맛있음

나는 찔끔 흐르는 눈물을 꾹꾹 숨기려 서둘러 뒤돌아서 갓 지은 밥을 섞었다. 생각만큼 쉽게 오르지 않는 성적에 내 속은 타지만 내 속보다 그녀 속은 더 타겠지. 저렇게 많은 과자 선물들은 아빠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두 달 뒤에는 진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빈 손’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물론 멋진 성적을 들고 말이다. 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보이지 않아도 잘 지내겠거니 하는 믿음을 하루하루 연습중이다.




지난 달 초 아빠가 하늘로 떠났다. 가는 길이 무더운 여름인 걸 미리 알았던 걸까. 예전부터 준비해 놓은 멋진 삼베옷을 입고 떠났다. 원래도 성질이 급했는데 너무 급히 가느라 남은 자식들이 뒤처리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다. 세무사도 만나야 했고 각종 서류도 정리해야 했다.


글을 한 톨도 쓸 수가 없었다. 앞으로 6개월쯤 그렇게 바쁠 예정이다. 글을 못 쓸 핑계는 너무도 많았다. 마침 브런치를 시작하자마자 일어난 일이라 이렇게까지 이 공간을 버려두는 게 마음 아팠지만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글을, 일기 쓰듯 조용히 쓰고 싶었다.


아빠는 지난 2월, 사위의 양복을 굳이 사주고 싶다고 지팡이를 끌고 서울에 올라와 백화점을 갔다. 걷기도 쉽지 않아 몇 번을 주저앉는 아빠를 부축하느라 온 가족이 진땀을 흘리며 투덜거렸다.

“왜 렇게까지 양복을 사주고 싶으신 거야?”

“아, 몰라. 아니 다음에 사주시면 되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또 우리 집에 소파를 사주고 싶다고 우기며 빨리 사라고 재촉을 했다. 작년에 떠난 막내 삼촌의 산소에도 가보고, 또 다른 삼촌에게는 고백도 했다.

“그동안 너의 형수에게 정말 보살핌 많이 받고 살았다... 참 좋은 삶이었어.”


아빠는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마음들을 남겨주고 가버렸다. 그게 떠날 준비였던 모양이다. 아빠는 급하게 떠난 것 같았지만, 그렇게 떠날 연습을 아무도 모르게 하나씩 했던 것 같다. 물론 남겨진 자들은 아직 어떻게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엄마가 가자미 말리는 방법

봄이면 알이 꽉 찬 가자미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제일 좋은 놈들로 주문해 친정으로 보내드리곤 했다. 엄마는 그 가자미들을 잘 손질해 옷걸이에 꿰어 베란다에 걸어놓고 살짝 말렸다. 그렇게 했다가 구우면 풍미가 더 올라왔다. 더 이상 그 가자미들을 볼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그 반질반질한 가자미의 풍채가 생생하다. 내 추억도 그렇게 하나씩 늘어놓다보면 예쁘게 말라서 잘 정리되지 않을까?


원래부터 나는 동네 똥개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아이였다. 그래도 살다보면 늘 예고 없이 이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멀어지는 날들 속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이 여름으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아빠로부터 멀어지는 연습 중이다. 미련은 이 무더위처럼 내 피부 아래 깊은 곳에 끈적거리며 달라붙어 있지만 언젠가 우리는 다 멀어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 큰 딸을 기숙학원에 데려다 주던 날, 그 건물에 있는 화장실을 쓴 적이 있다.

“엄마, 변기에 앉으면 문을 봐. 화장실 문짝마다 시가 하나씩 적혀 있어. 앉아서도 공부하라고 매번 그거 바꿔 걸어놓나 봐. 그래도 모의고사 보는 날 아침에 본 시가 시험에 나온 적 있다? 그래서 그 문제 맞췄어. 너무 좋았어.”

나는 경건히 변기에 앉아 문짝을 바라보았다. 그 곳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아...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학교 다니던 시절에 김춘수 시인의 명예교수 퇴임식에 꽃을 대표로 전달한 적이 있다. 김춘수 시인은 키가 몹시 작았다. 나는 키가 몹시 크다. 그래서 꽃을 드리면서도 어색해했지만 그 분은 환하게 웃으셨다. 그 땐 우리 중 그 누구도 몰랐다. 그 분의 시가 내 딸이 다니는 기숙학원 문에 붙어서 외롭게 공부하는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을 줄은.

아무리 이별이 찾아와도 인연은 돌고 돌아 그렇게 오랜 기억으로 내 곁에 머무를 것이니 그리 서운해 할 것은 없지 싶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오늘도 나는 즐겁게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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