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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중에서 제일 쿨한 할머니

by 소리글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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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2월 내 브런치 매거진에 쓴 ‘77세 중에서 제일 귀여운 할머니’ 글의 속편이다. 그 글은 친정엄마의 방광수술 후 간병 중에 쓴 글이었다. 잠든 엄마 옆에서 1시간 만에 쓴 글이 어쩌다 브런치 에디터픽이 되고 다음(daum) 포털에 올라가자 최고 조회수가 25000이 넘었다. 브런치 새내기인 나에게는 심장이 보디빌더의 근육처럼 펌핑 되어 터질 것만 같던 최고의 날이었다.


그 후 엄마는 무사히 퇴원해서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퇴원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다리 한쪽도 움직이지 말라던 병원 측은 퇴원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제 환자 아입니데이. 일어나서 함 걸어보이소.”하며 갑자기 걸으라 했다. 물을 많이 마시고 걸어서 소변이 잘 나오는 걸 확인해야 퇴원을 시켜주겠단다. 엄마는 급히 목구멍을 열고 물을 콸콸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병원 복도를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물 한 모금도 체할까봐 나뭇잎을 동동 띄우던 선조들의 지혜를 나는 왜 잊었던가. 엄마는 갑자기 물을 다 토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몬하겠으요. 슨생님, 저 집에 보내주이소.”하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더니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소변을 성공하고 퇴원했다.


집은 고요했다. 드디어 휴식이다. 푹 쉬기만 하면 되었다. ‘저녁은 간단히 시켜먹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엄마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형제자매가 꽤 많다. 그리고 더 많은 성당 자매님들이 다. 서로 반찬을 해 온다고 난리였다. 그중 가장 행동이 빨랐던 건 엄마의 큰언니, 내게는 하늘같은 88세의 큰이모였다. 택시 타고 반찬 몇 개 가져 갈 테니 아파트 정문으로 잠시 나오라는 전화였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큰 재래시장에서 속옷장사를 했다. 큰이모는 근방에서 이불 장사를 했다. 큰이모 가게에 놀러 가면 주변이 다 엄마의 시장친구들 가게였고, 서로 음료수를 사준다고 성화였다. 큰이모는 눈을 찡긋하며 슬쩍 돈을 쥐어주고 얼른 가서 고르라고 했다. 누가 돈을 내든 나는 행복했다. 음료수가게에서 마음껏 음료를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유리에 코를 박고 뭘 먹을까 가슴 뛰는 고민을 했더랬다. 내 키를 키운 건 그 때 시장 곳곳에서 얻어먹던 간식들과 국수들, 음료수들, 그리고 그 속에 묻은 정(情)이었다.


큰이모의 집은 내가 살던 집에서 멀지 않았다. 큰이모네에는 오빠, 언니들이 있었는데 어린 나와 잘 놀아주었다. 빈집에 있기 심심한 나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아파트 쪽문을 나가 흙담을 넘고 피아노학원 옆으로 양옥집들이 가득한 골목으로 향했다. 이모네 집은 골목을 몇 번 꺾으면 나왔다.

언니가 국물이 자작하게 끓여진 짭조름한 라면에 계란까지 풀어주면 밥까지 말아먹고 나무가 삐걱대던 계단을 묵찌빠하며 올라가던 날들을 기억한다. 당시 위층에 살던 외삼촌 집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눈이 유달리 크고 예뻤던 그 아기가 먹던 분유도 한 숟갈 떠먹어보면 그 달큰한 맛에 내 작은 눈도 같이 커지곤 했다. 이모부는 안방에 앉아 금복주 한 병에 김치를 놓고 늘 화투를 쳤다. 나를 보고 웃으며 “미야 왔냐?”했는데, 이모부의 그 큰 체구와 술냄새가 나는 참 좋았다.      


이런, 추운데 서서 큰이모를 기다리다보니 이모부가 마시던 소주냄새까지 가버렸다. 추억은 발이 빠르다. 어느 틈에 잡을 수 없이 멀어져서 그리운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든다. 멀리서 큰이모가 탄 택시가 다가왔다. 도대체 뭘 가져 오기에 카트까지 끌고 오라 하냐 투덜대며 가방을 받아들었는데, 이거 예사롭지 않다. 커다란 대형마트 가방 두 개에 반찬통들이 가득했다. 내 몸이 휘청했다. 이게 다 뭐냐는 내게 이모는 쿨하게 답했다.


“그거 함 열어봐라. 물(먹을) 거 하나도 읍다.”


참, 요즘 말로 칠(Chill)한 이모다. 쿨하다 못해 춥다. 열 개는 족히 넘을 반찬통들을 두고는 먹을 게 없단다. 역시 어른들의 공력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집에 가서 뚜껑을 열어보니, 곰국과 고명, 시래기국, 시금치나물, 콩나물, 불고기, 씻은 상추쌈, 총각김치 등등 한 눈에 봐도 잔칫상이다. 동생을 생각하는 이 언니는 심지어 88세다. 이걸 종일 부엌에 서서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코가 매웠다. “에헤이, 진짜 먹을 게 하나도 없네!” 같이 농담을 하는 수밖에.

그 중에 최고는 보리막장이었다. 보리에 물을 부어 계속 끓여 완전 죽처럼 만들어 두고, 쌈장 만들 때 먹을 만큼 꺼내어, 양파, 파, 청양고추, 견과류 등을 가득 다져넣어 만든다고 했다. 매콤한데 구수한 게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도대체 이런 음식 만들 기운이 어디서 나오냐 물으니, 평소 유튜브를 보며 음식을 만들어본단다. 유튜브? 이모가?


평소 하는 본인의 방식에 유튜브 검색에서 발견한 마음에 드는 방식을 섞는단다. 분량도 기본 레시피에서 몇 배로 계산해 불려서 본인방식대로 만든다고 했다. 베짱이처럼 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그런 생각으로 숟가락을 놓기엔 쌈장이 너무 맛있었다. 그새 귀가 어두운 이 할머니자매는 계속 서로 다른 말을 했다. 내가 없으면 엉뚱한 대화만 하고 헤어질 판이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이모에게 그릇 비워줘야 된다며 선반에 있는 그릇을 꺼낸다고 난리고, 나는 엄마는 그만 앉아있으라고 소리 지르고, 점점 난장판이 되어갔다. 나는 얼른 그릇들을 비우고 설거지해서 가방에 담아 이모를 배웅했다. 이모는 “간다!” 한마디 남기고 쿨하게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이제 막 개학, 개강을 해서 집을 나서는 손주뻘 아이들보다 더 열정적인 88세 할머니가 세상에 있었다. 한 가지 음식을 만들 때도 자기만의 방식을 창조해내는 88세 매일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멈추지 않는 세월이고 잠들지 않는 마음이었다. 몸의 젊음은 결코 마음의 젊음을 따라가지 지만  나도 이모의 보리막장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나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아! 큰이모가 가고 난 후에 성당 자매님이 손수 끓인 전복죽과 나물을 들고 왔다. 정말 세월이 쌓이면 의리가 더 농익어 가나보다. 엄마를 이토록 사랑하는 든든한 주변이 있다는 걸 확인한 나는 다음날 아침,  서울로 맘 편히 도망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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