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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미의 colorful life Sep 21. 2021

날카로운 층간 소음의 추억

노래 듣는 놈, 예민한 놈, 중간에 낀 놈

노래 듣는 놈



혼자 살기 좋은 소박한 방 세 개짜리 신축 아파트에도 치명적인 단점은 있었다. 바로 층간소음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어느 평화로운 주말 아침 9시 늦잠을 자다가 정체모를 음악소리에 눈을 떴다. 평범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흡사 클럽에서 사용하는 스피커처럼 전문적인 스피커가 분명했다. 울림이 엄청났다. 음악의 장르는 k-pop도 팝송도 재즈도 컨트리도 아닌 그 무엇이었다. 익숙지 않았으나 월드뮤직으로 들렸다. 작곡을 하는지 작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간헐적으로 같은 리듬을 반복하고 있었다. DJ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말 아침 9시였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디에서 나는 소음인지도 알 수 없고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넘어갔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일은 터졌다. 그 DJ가 파티를 하는지 음악을 몇 시간씩 틀어놓는 것이다. 친구들이 왔는지 여러 명의 발 망치 소리도 이어졌다. 평화롭게 예능을 보며 평일의 피로를 풀려고 했던 금요일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를 찾기 위해 방법을 찾았다. 아파트 입주민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잠입하는 것이다.


단체 채팅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체 채팅방은 불필요한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며 명랑해질 것을 강요받는다. 단체 채팅방은 소수의 인싸들의 아침인사로 시작해 저녁 인사로 끝이 나며 각종 띠별 운세, 그날의 뉴스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인싸들의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채팅방에서 각종 MBTI 검사부터 심리 Test까지 할 수 있다. 채팅방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MBTI를 하루 만에 알 수도 있다. 잠시 업무를 보고 카카오톡을 켤 양이면 잔뜩 신이 난 사람들의 궁금하지 않은 수다로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다.


그나마 지인들의 단체 채팅방이면 견딜 만 하지만 회사 단체 채팅방은 업무의 연장선 감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아파트 입주민 단체 채팅방은 어떻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다정하고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서 있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네이버 카페에서 채팅방 주소를 알아서 채팅방에 들어갔다. 공지글이 보인다.


- 입장하시면 인사하시고 아이디를 몇 동 몇 호 홍길동으로 바꿔주세요.


주소와 실명을 걸고 하는 채팅방이라니. 체질에 맞지 않아 말하기 전부터 힘이 들어갔지만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 안녕하세요. XXX동 1403호 XXX입니다. 주말 아침부터 월드뮤직이 들리는데요.

  어디서 나는 소린고 해서 채팅방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XXX동 1603호 XXX입니다.

  저희 아랫집에서 주말 아침이나 금요일 저녁에 큰 월드뮤직이 들리더라고요.


잡았다. 내 이놈. 14층과 16층 사이 15층에 그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 혹시 15층에 외국인이 살고 있나요? 주말 아침마다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 네 맞습니다. 아랍인이 살고 있어요.


- 아랫집에서 연락하는 것이라고 절대 이야기하지 마시고, 인터폰으로 좀 주의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워낙 무서워서요.


관리실에서는 그의 DJ time에 여러 번 인터폰을 걸었고 그는 인터폰을 받지 않았다.


관리실에서는 엘리베이터에 아랍어로 '층간소음 금지! 당신의 이웃이 고통받고 있습니다.'는 사뭇 글로벌한 경고를 내걸었다. 내부고발자인 나는 고발이 들키게 될까 봐 사뭇 긴장했다. 경고문 이후로도 가끔 아랍 음악은 들렸지만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랍인의 '네 놈이냐?'는 눈빛 레이저를 간혹 맞긴 했다. 집으로 먼저 들어가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예민한 놈



아무튼 평화를 찾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예민한 놈'이 나타났다. 범인을 찾고 미쳐 치고 빠지지 못한 단체 채팅방이었다. 슈퍼밴드 1 결승전 공연을 오프라인으로 보고 새벽 1시경 들어온 날이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얼굴을 씻은 후 잠옷을 갈아 입고 소파에 앉아 나 혼자 산다 재방송을 시청했다. 그 새벽 동안 거실-화장실 해서 20걸음이나 걸었을 것이다. 아파트 단체 채팅방 알람이 울렸다. 이 새벽에 카톡이라니. 귀를 의심했다.


- 안녕하세요. XXX동 1303호 사람입니다. 지금 1403호 분 많이 시끄러우시네요. 제가 이곳 말고 다른 곳에 거처가 있습니다. 업무시간이 제이신지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오는 시간 말씀해주시면 제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잠시 옮기겠습니다. 내일 시간 되시면 찾아뵙고 이야기하시죠.


새벽 1시에 발걸음이 울렸다고 바로 단채 채팅방에 주홍글씨 새기듯 채팅을 올리는 패기. 채팅방에 있던 주민 서넛은 깨웠을 것이다. 정중함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무례했다. 새벽에 귀가한 게 죄라면 죌까. 황당해서 답은 못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고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 신경질스러운 인터폰 소리에 잠을 깼다.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인터폰이라니. 인터폰을 자세히 보니 아랫집이었다. 기가 찼다. 내가 인터폰을 받지 않으니 인터폰을 서너 번씩 울렸다.


- 인터폰 안 받으시네요. 집에 계시면 집에 찾아가려고 합니다.


숨죽인 채 있던 다른 78명의 입주자들이 입을 열었다.


- 층간소음이 꼭 윗집이 아니라 옆집인 경우도 있어요. 1501호가 아닐 수도 있어요.


가슴이 두근거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1인 가구의 가장이고 집에는 다른 가족도 없지 않은가.


평일 업무시간 내내 회사에 가 있고 주말에도 자주 외출할뿐더러 반려동물도 없신선사는 집처럼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자부했다.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주로 집에서는 와식 생활을 즐겨하는 덕에 거의 소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말이다. 단체 채팅방에 시끄럽다고 층간소음으로 박제를 시키고 찾아온다고 이야기하다니.


다음날 새벽 몰래 감옥 같던 단체 채팅방을 빠져나왔다. 소음방지 슬리퍼를 샀다. 까치발을 하고 걸었다. 혹시 모를 대결에 대비해 층간소음중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정절차를 면밀히 살폈다. 물리적으로 마주하면 질 것이 분명하므로 나를 보호해줄 법과 제도를 찾아 헤매었다.


동거인이 있었다면 찾아오겠다는 결투신청에도 지금보다는 담대할 있을 텐데. 1인 가구의 생활소음은 아주 양호한 수준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강아지가 있어 하루 종일 집안이 붐비는 4인 가족보다는 아주 양호한 이웃을 만난 것이니 행운인 줄 알라고 쏘아붙일 수 없었다. 


아랫집이 갑작스럽게 집으로 찾아올까 봐 한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승산이 낮았다. 남편이 없는 게 아쉬웠다.


조금만 걸어도 인터폰을 울리는 아랫집은 그 후로도 부모님이 잠시 집에 저녁 11시경 도착해서 사과박스를 내려놓는 순간 인터폰을 미친 듯이 울렸고 아빠는 화가 났다. 인터폰을 받았으면 싸웠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마주쳤다. 마주치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50대 남짓 깡마른 체격에 요즘 것이 아닌 투버튼의 꽉 맞는 쓰리피스 양복. 끼도 입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과 나에게 둘러싸여 13층 버튼을 누르기를 주저했다. 그리고 누르고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 아파트의 층에는 2개 집 밖에 없는데 1303호가 아닌 1304호로 가는 척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나는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하여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그가 1304호에서 1303호로 몸을 트는 것을 목격한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 맞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엄마와 내가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는 서로가 마주친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차렸다. 이웃이 아니라 적이었다.



중간에 낀 놈


'호갱노노'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아파트 후기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생활 전반에 깔린 소음은 삶을 경직되고 불안하게 한다. 이웃을 미워하게 한다. 나는 비로소 이웃 간에 층간소음 문제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허술하게 아파트를 지은 시행사에게 칼을 겨누는 대신 우리는 서로를 저주하고 있었다. 다정한 인사가 오가도 좋을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결투장이었다. 내문 형식을 한 경고문으로 결투를 신청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적의 등을 노려보았다.


나는 윗집 청년의 여가생활을 응원해줄 수 없었고 아랫집 아저씨는 우리 집을 방문한 부모님의 사과박스를 반겨줄 여유가 없었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중간에 낀 놈이자 예민한 놈이며 노래 듣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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