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미의 colorful life Oct 01. 2021

집주인이 실거주한대요

임차인은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방 세 개짜리 신축 아파트에서 해먹에 누워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것도 잠시, 2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그 사이 전셋값은 2억이 넘게 뛰었다. 임대차 보호법이 생겼기 때문에 당연히 2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적의 한마디, '실거주'
카드로 치면 조커.
조커로는 임차인 카드야 가볍게 막을 수 있다.


집주인이 실거주하겠다며 집을 빼 달라고 연락이 왔다. 집주인은 미혼의 40 여성으로 근처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실거주 할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실거주는 무슨. 나는 분노했다. 부쩍 오른 시세대로 세입자를 다시 받으려는 요량이 분명했다. 임대차 3 법에 따라 집주인을 처단하리라. 허공을 향해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보낼 법한 분노의 눈빛을 보냈다. 당연지나가는 개미도 해치지 못하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임대차 3 법에 따라 임차인이 실거주한다고 임차인을 내보내고 실거주하지 않은 경우 대응방법에 대한 폭풍 검색이 시작되었다. 법이 실효화된 지 1년 남짓인데 그렇다 할 성공담은 없었다. 초록창에 검색을 해보아도 소송을 거쳐야 하며 소송 결과도 장담은 할 수 없다는 전문가의 응답만 빼곡했다.


소송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소송을 강행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실질적으로는 관할 동주민센터에 가면 이사 후 2년간 전입신고가 있었는지 여부를 조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어떤 성공스토리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명무실한 제도로 느껴졌다. 복수를 재빠르게 포기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았다.


부쩍 오른 전셋값 때문에 빠듯한 예산으로는 회사 근처의 신축 아파트에 살 수 없었다. 넓지만 빌트인이 없고 회사와 먼 구축 아파트에서 사느냐? 회사가 가깝고 빌트인이 있지만 좁은 오피스텔에서 사느냐의 선택이었다.


이동하는 시간, 기름값도 돈이다. 직주근접성을 위해 후자를 선택했다.


25평 아파트에 살며 세포분열을 거듭한 가구 가전들을 정리해야 했다. 4년은 살 수 있을 줄 알고 새것로 구입했었다. 중고를 살 걸.


자가가 아니면 좋은 가구 가전을 살 필요가 없다는 건 몸소 깨달았다. 남의 말을 들어서 알아도 될 것을 꼭 경험으로 깨닫곤 한다.


새로 산 2 in 1 에어컨, 4년 동안 혼자 썼기에 깨끗한 통돌이 세탁기, 무설치 식기세척기, 옷장 2짝. 당근 마켓과 중고나라에 팔아야 할 물건들을 올렸다. 파는 것도 시간과 에너지를 요했다. 찔러보고 맛보고 흥정하고 잠수 타는 잠재적 고객들과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반값도 못한 헐값에 살림살이들이 팔려나갔다. 이사하기도 전부터 상실감에 휩싸였다.



악담이 가득한 호갱노노



원룸에 부엌 겸 거실이 있는 오피스텔을 골랐다. 전셋값이 계속 올라 전세가 씨가 말랐기에 길거리에 나 앉을까 봐 불안이 극에 달하던 날이었다. 바닥 난방이 안 되는 북동향의 오피스텔이었는데 근처보다 시세가 저렴했다. 물건 없다는 부동산 아저씨 말에 퇴근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서 한번 보고 계약한 것이 화근이었다.  계약금을 입금하고 들어간 '호갱 노노'에는 온갖 저주의 말들이 가득했다.


입지가 좋은데 세가 싼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쪄 죽습니다.

화장실이 너무 좁습니다.

이중창이 아니어서 도로 소리가 시끄럽게 다 들립니다.

2년 겨우 살고 나갑니다


추위에 취약한 동남아적 인간이기에 춥다는 말에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4월까지 보일러 돌리며 변온동물 같은 온도 조절력이 약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계약을 한 것을. 이사가 시작되었다.



돈 받으면 입 쓱싹입니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출동한 큰 이사였다. 아침부터 당근 마켓을 통해 판매한 2 in 1 에어컨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1톤 트럭에 실려 나갔다. 파를 비롯한 짐들이 사다리차에 일렬로 실려 내려가고 아저씨 3분 주방 아주머니 1분 엄마 아빠 나까지 총 7명의 사람이 투입됐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1인 가구에 짐이 얼마나 있다고. 좀 오버였다.


잔금을 치르러 부동산에 도착했다. 처음 집을 보여줄 때와 달리 부동산 아저씨의 말투의 온도는 묘하게 싸늘해져 있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집주인 분이 전문직이시라며 좋은 집에 좋은 집주인과 계약하는 거라며 묻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집주인 직업이 좋은 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부동산 아저씨는 집주인 편으로 노선을 확실히 했다.


법정 최고 복비를 부가세까지 붙여 계좌에 입금하라는 말에 현금영수증을 요구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한마디 하려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입을 닫았다.


오후 2시인데, 벌써 복비. 이사비. 수백만 원이 물쓰듯 나갔다. 웬만한 좋은 노트북 가격이었다. 7년째 액정에 줄이 간 노트북을 쓰고 있는데 노트북을 길바닥에 뿌린 기분. 내 이사지만 돈이 아까운 기분. 아무튼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 기사님들이 집을 떠나시고 이삿짐들과 함께 오피스텔에 남겨졌다.



이사 첫날, 다른 집으로의 이사를 꿈꾸다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집은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았다고 했다. 아직 4월이라 완연한 봄은 아녔기에 시범 삼아 켜보기로 했다.


전기패널은 총 3개로 나눠져 있었다. 거실은 2구역으로 나눠 부엌 쪽이 거실 1, 소파 쪽이 거실 2, 안방까지 였다. 3개 전기 패널을 켰는데 탁. 두꺼비집이 내려갔다. 바닥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럴 리가. 당황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는데 마찬가지였다.


그래. 소파 쪽 거실이랑 안방만 난방이 되어도 겨울에 지내는데 문제는 없지.


거실 2와 안방 전기패널 스위치를 on을 눌렀다. 두꺼비집이 꺼졌다.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이 집은 집의 1/3만 난방할 수 있는 집이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을 구경하러 왔을 때에도 안방에만 난방이 되어 있었다.


불완전 계약이었다. 1/3짜리 계약이었다. 부동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금 후 냉담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연락을 하겠는가.


"집이 1/2도 아니고 거의 난방이 안되네요. 처음에 설명하신 거랑 달라요"


"그럴 리가요. 냉장고 가져오셨던데 냉장고 켜서 그런 거 아니에요? 냉장고가 전기 많이 먹어요. 냉장고를 끄세요."


냉장고를 끄라니. 듣던 중 황당한 소리였다. 게다가 부엌과 거실의 두꺼비집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하니 부동산 아저씨 왈


"그건 난 잘 모르겠고, 그럼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건데요. 다시 이사 갈 거예요? 어쩔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대거리도 못하고 벙이 쪘다. 전화를 툭 하고 먼저 끊는다. 이쯤이면 어디서 배운 전화예절인지 슬슬 궁금해진다. 다시 전화가 온다. 받았다.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이런 이야기는 집주인이랑 하는 거예요."


내가 졌다. 이사한 첫날 이사 가고 싶어졌다. 아니 지쳐서 이사는 못 가겠고 주저앉아 울고 싶어졌다.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4화 날카로운 층간 소음의 추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