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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두막이 퀸 엘라의 별장 바넘앤베일리예요.”
폴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지붕 위에 하얀 종이 달을 올려놓고 있는 오두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은은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바넘앤베일리가.... 바로 뒷집이네요?”
지은의 뒤로 나가온 폴리가 부드럽게 지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맞아요, 달링. 이번 여행의 목적이 퀸 엘라를 찾는 거라면 지금 바로 앞에 와 있는 거예요.”
지은은 그제야 ‘초콜릿 만드는 이발사’ 로이스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국도를 따라 걷다가 숲으로 들어가셔요. 별장이 가까워지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놓칠 수가 없죠. 엘라가 지붕 위에 커다란 종이 달을 띄어 놓았거든요.’
엘라 피츠제랄드의 <Misty>에 이끌려 안개에 싸인 숲으로 들어올 때는 이 숲이 그 숲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이지 '놓칠 수가 없는' 종이 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겐스토어 뒤 편으로 언뜻 보이긴 한 것 같은데 아기 태양처럼 생긴 노란 장미들이 뿜어내는 빛 때문에 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언제부터인가 윈터 원더랜드에서 경험하는 신기함에 푹 빠져 엘라를 찾는 미션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버렸다니.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꼭... 제가 바넘앤베일리를 찾아온 게 아니라 저 오두막이 저에게 와 준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는 중에 여기 계관 시인이신 분을 만났는데...”
“오 마이 갓, 레이디버그를 만났군요? 괜찮았어요?”
“네?”
“쉬지 않고 말했을 텐데, 그 사람.”
“아하하, 네. 그렇지만 다 너무 좋은 이야기었어요. 특히... ‘걷다 보면 가야 할 곳이 나오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사실 여기에 와서...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퀸 엘라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고, 막상 찾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걱정도 했었는데요. 저한테 주어진 깜짝 선물 같은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즐겨보기로 했거든요. 여기로 들어오게 해 준 바리스타 분이... 정확히 말하면 ‘바리스타 겸 컨시어지’라고 하셨는데... 그분도 ‘퀸 엘라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윈터 원더랜드를 충분히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그냥 즐기고 있었어요.”
“딩동! 그게 바로 정답이죠! 케 세라세라!”
새로운 목소리에 지은도 폴리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Que Sera, Sera>를 부른 도리스 데이가 서 있었다. 그러나 윈터 원더랜드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그랬듯 그는 도리스 데이가 아니었다.
“로지! 깜짝 놀랐잖아.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푹 빠져 있길래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할 수밖에. 안녕하세요? 저는 로지 애디라고 해요. 폴리 친구고, 로지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니 근데, 이 분이 바로 엘라가 찾고 있던 분인 거야?”
윈터 원더랜드에서 만난 모든 도플갱어들과 마찬가지로 로지는 아마 아주 높은 확률로 직업이 가수가 아니겠지만, 이번에는 도리스 데이의 대표곡 제목을 외치면서 등장했기 때문에 지은은 혹시나 하여 운을 띄워봤다.
“안녕하세요? 케 세라세라... 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제 좌우명인걸요. 지금 그쪽에게 딱 필요한 말이기도 하고요.”
폴리가 끼어들었다.
“그쪽이 뭐야, 지은 씨야. 이지은 씨.”
“미안해요. 지은 씨. 그런데, 지은 씨도 케 세라세라가 무슨 뜻인지 아는 눈친데, 맞죠?”
지은이 ‘아는 노래예요’라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머릿속 주크박스가 지은의 목소리를 장악해 버렸다.
“Que Sera, Sera (일어날 일이 일어날 거야)
Whatever will be will be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지)
The fu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란다)
Que Sera, Sera (일어날 일이 일어날 거야)”
폴리와 로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로지가 폴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넌 이런 귀인을 혼자 만나고 있었단 말이야?”
“난 처음엔 우리 엄마가 보낸 영매인 줄 알았다고. 근데 알고 보니까 엘라가 찾던 사람인 거야.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 네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그러니까 말이야! 지은 씨, 송라이터예요? 나랑 같이 일 좀 할 수 있어요?”
지은은 갑자기 노래가 튀어나온 것도 당황스러운데 폴리와 로지가 덮칠 듯 흥분을 뿜어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송라이터요? 제가요? 아, 아니요.”
“그럼 방금 그건 뭐예요?”
“이건... 제가 도대체 왜 노래를 불렀는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제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게 아니라...”
로지는 지은이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오 마이 갓, 폴리, 들었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대. 오 마이 갓, 지은 씨, 제가 지금 뮤지컬을 만들고 있거든요. 제목이 <Que Sera, Sera> 예요. 제 모토랑 같다는 건 인생작이라는 거겠죠? 맞아요, 그런데 주제가가 안 써져서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지은 씨 머릿속에서 제 인생작 주제가 코러스가 튀어나온 거잖아요! 폴리 이걸 어쩌면 좋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엘라가 지은 씨를 기다리고 있어서 네가 길게 붙잡고 있을 순 없어.”
“잠, 잠깐만요. 엘라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당연하죠. 지은 씨도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바넘앤베일리가 지은 씨에게 와 준 것 같다고요.”
“그건... 그냥 제가 그렇게 느꼈다는 걸 말씀드린....”
“게다가 엘라가 맡긴 꿈도 찾아냈고요.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해요?”
로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잠깐! 곡 이야기 좀 먼저 끝내자고. 내 인생작의 주제가의 코러스가 탄생했다고, 지금!”
폴리와 로지가 디바의 도플갱어답게 높은 데시벨로 지은의 정신을 흔들었다. 지은은 지금 여기에서 <Que Sera, Sera>의 저작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도리스 데이가 원하는 바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저... 사실 제가 만든 노래는 아니지만요... 정말 좋은 노래니까요. 로지 님이 쓰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은은 도리스 데이도 분명히 하늘에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멜로디와 가사가 마치 제 안으로 푹 파고든 것 같아요. 단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완전히 제 몸속에 들어온 것 같다니까요!”
지은이 ‘원래 거기 있던 거예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데 폴리가 로지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 너, 너 또 그 표정이다.”
“무슨 표정?”
“빨리 집에 가서 곡 쓰고 싶다는 표정. 아까는 지은 씨한테 같이 하자더니, 눈이 벌써 문 밖으로 튀어 나가고 있는 걸.”
“아, 저는 괜찮아요. 당연히 로지 님이 쓰시고 싶은 대로 쓰셔야죠.”
“고마워요. 그럼 저 좀 지금 가 봐도 될까요? 지금 도입부가 막 떠오르고 있어서... 근데 제가 지금 녹음기도 없고 폰도 안 들고 와서...”
“하여간 창작자들이란....” 폴리가 눈을 흘겼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영광이죠. 제가 영감을 드릴 수 있어서요.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뭔데요? 귀인이 여쭤보시는데 당연히 괜찮죠!”
“혹시 가사도 지금 떠오르셔요?”
“아직요. 왜요? 혹시 지은 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음... 혹시 괜찮으시면 말이죠... 내가 커서 도대체 뭐가 될까, 엄마한테 보채듯 물어보는 소녀를 떠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오 마이 갓... 지금 제 머릿속에 송골송골 떠오르고 있는 멜로디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지은 씨, 너무너무너무 고마워요! 꼭 좋은 노래 만들어서 제일 먼저 들려드릴게요!”
“네, 영광입니다.”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로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은은 곧 탄생할 명곡을 머릿속에서 플레이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내가 어렸을 때
I asked my mother
엄마한테 물어봤어
What will I be?
난 뭐가 될까?
Will I be pretty?
예뻐질까?
Will I be rich?
돈 많이 벌까?
Here’s what she said to me
엄마는 이렇게 말했어
Que Sera, Sera
일어날 일이 일어날 거야
Whatever will be will be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지
The fu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란다
Que Sera, Sera
일어날 일이 일어날 거야
머릿속 주크박스는 뮤직비디오까지 띄웠다. 페이퍼문에서 손님이 없는 틈을 타 혜원에게 칭얼대던 지은의 모습이 보인다. 하고 싶은 게 맨날 바뀌어서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어린 지은에게 혜원은 좋아하는 걸 조금씩 찾아보고 좋아하게 된 걸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했었다.
지은이 처한 현실과 맞지 않아서 완전히 도려내고 살았던 혜원의 말들과 페이퍼문의 추억이 왜 자꾸 슬금슬금 떠오르는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을 것 같은 이 이상한 여행의 끝에서 뭘 만나게 되려는 건지 지은은 다시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은 씨, 괜찮아요?”
지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폴리가 다시 부드럽게 어깨를 안아 주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어요.”
“괜찮아요. 더 쉬었다 가도 돼요. 엘라도 좀 더 기다릴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잘만 기다렸는데요, 뭘.”
지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근데요, 엘라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엘라는 제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요? 저는 그냥 어떤 카페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거기 계신 분이 여기로 보내주신 거예요. 저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을 뿐이고요.”
“아닐걸요. 엘라는 오랫동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넘앤베일리로 오기 전부터요. 리처드가 여기로 들여보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지은 씨가 엘라가 기다리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엘라가 맡긴 꿈도 바로 찾아냈죠. 오늘따라 이상하게 한산한 거지 평소 우리 가게에는 손님이 많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많은 손님들 중에 단 한 명도 찾아낸 사람이 없었다고요. 그러니까 지은 씨 같은 사람을 바로 ‘더 원(The One)’이라고 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제가 만났던 바리스타 겸 컨시어지 분 이름이 리처드예요?”
“네, 맞아요. 리처드 스미스.”
“리처드 스미스...라고요? 그분이요? 정말이에요?”
레이디버그는 리처드 스미스가 윈터 원더랜드의 마스터빌더라고 했다. 그런데 지은이 알고 있는 리처드 스미스는 지은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Winter Wonderland>의 ‘실제’ 작사가이다. 창백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땐 전혀 떠올리지 못했지만, 리처드 스미스도 (둘이 같은 사람이라면 ‘도’는 부적절한 조사겠지만) 펜실베이니아의 요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았다. 요양원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공원의 모습을 보고 쓴 시(詩)가 북반구에서 가장 많이 커버된 캐럴 <Winter Wonderland>의 가사가 되었다. 그리고 첫 녹음 후, 그는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바로 그 리처드 스미스가 지은을 을지로 뒷골목에서 윈터 원더랜드로 이동시킨 창백한 남자였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