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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많지도 드물지도 않은 길목에 실금이 간 것 같은 좁은 골목이 있었다. 빨리 걷는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좁은 그 골목 안에는 일부러 몸을 숨긴 듯한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터덜터덜 발끝을 내려 보며 천천히 걷다 보면 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올드 팝송과 마주치게 된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추억의 노래 같기도 하고 생전 처음 듣는데도 왠지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 같기도 한 멜로디는 바싹 마른 시멘트 바닥을 천천히 적시면서 잠시 지친 발걸음을 멈춘 사람의 발끝 앞까지 다가오곤 했다. 그러면 잠시 후 숨어 있던 작은 카페 ‘페이퍼 문(Paper Moon)’의 문이 열렸다.
좁은 공간에서―심지어 삼면이 LP와 CD로 꽉꽉 채워져 있는데―답답하기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올드 팝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노래는 배경이 아니라 공간의 주인이었다. 주인은 낯선 손님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예민한 손님이라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말을 최대한 아끼고 주문을 받았던 카페 사장이 약간은 심각한 얼굴로 다음 곡을 위해 음반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마치 팝의 역사 속에서 환생을 거듭한 것처럼 확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사장에게 자기가 고른 음반을 건네기도 했다. 턴테이블에 놓인 음반이 바뀔 때마다 낯선 손님은 마치 페이퍼 문이 말을 거는 것 같아 놀라게 된다. 왜 지쳐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알고 있다고. 이대로도 괜찮다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된다고. 쉬어 가도 된다고. 놓아 버려도 된다고.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음악은 언제나 달랐지만 페이퍼 문을 처음 찾은 손님이 가게를 나설 때는 모두 사라 맥클라인의 <Ordinary Miracle>의 세례를 흠뻑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When you wake up everyday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Please don’t throw your dreams away
꿈을 버리지 마세요
Hold them close to your heart
가슴속에 꼭 끌어안고 계세요
Cause we are all a part of the ordinary miracle
우리는 모두 평범한 기적의 한 조각이니까요
Ordinary Miracle
평범한 기적 말이에요
Do you want to see a miracle
기적을 보고 싶지 않나요?
It seems so exceptional
너무나 특별한 것 같아요
That things just work out after all
결국은 다 이뤄진다는 게 말이에요
It’s just another ordinary miracle today
그게 바로 또 다른 평범한 기적이에요
내 집 드나들 듯 자주 오는 손님도, 몇 년에 한 번씩 들르는 손님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 페이퍼 문은 삶에게 지고 있다고 느끼던 순간에 만난 ‘평범한 기적’이었다고. 그 작은 기적이 지금 지은의 손바닥 위에 있는 오르골 위에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윈터 원더랜드에서 맞닥뜨린 모든 일들을 합친 것보다 더 믿을 수 없었지만 오르골은 계속해서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믿기만 하면 진짜가 된다니까요)”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달링, 왜 그래요?”
얼음처럼 멈춰 있는 지은을 보고 놀란 폴리가 물었다.
“이거... 뭐예요?”
“그건... 오 마이 갓. 역시. 지은 씨가 아무리 영매가 아니라고 해도, 아니, 영매가 아닐 순 있는데, 확실히 보통 분은 아니네요. 그걸 찾아내다뇨.”
“그러니까... 이게 뭔데요?”
“그건 퀸 엘라가 맡긴 꿈이에요.”
“퀸 엘라의 꿈이라고요, 이게요?”
“엘라가 시청에서 나와서 바넘앤베일리 별장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에 맡겼어요. 잘 숨겨 놓고 있다가 이걸 찾아내는 사람을 자기한테 보내달라고요. 그래서 다른 꿈들처럼 진열해 놓지 않고 제 친구의 초콜릿 상자 뒤에 숨겨 두었던 거예요. 보시다시피 눈에 띄는 꿈이 아니라 구경 오는 손님들이 잘 집어 들지 않거든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게 어떻게 누군가의 꿈일 수 있는지... 여긴 제가 너무 잘 아는 곳이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오르골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페이퍼 문 미니어처에는 심지어 지은과 닮은 아주 작은 사람의 인형도 있었다. 인형은 테이블 위에 타로 카드를 펼쳐 놓은 것처럼 음반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게 여기에 있다는 건... 이것도 깨졌다가, 그분... 미세스 글로리아 노스트럼이 수리하셨다는 거죠?”
“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 모습 그대로 엘라가 가지고 왔어요. 저도 정확한 사정은 몰라요. 원래 꿈의 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묻지 않거든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수리가 필요한 지 확인했는데,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찾아내는 사람을 바넘앤베일리로 안내해 달라고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요. 그러니까... 이게 퀸 엘라의 꿈인가요? 그런데 아까 꿈은 깨져야만 이렇게 형태가 생긴다고 했는데, 이건 또 깨진 적이 없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스스로 느끼기에도 따지는 것 같은 말투에 지은은 흠칫 놀랐다. 어쩌면 이 모든 윈터 원더랜드 세계관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엉망진창의 어설픈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몰려오고 있었다.
“달링, 우리 아주 살짝만 흥분을 가라앉혀 볼까요? 자,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저리 가서 앉자고요.”
폴리는 페이퍼 문이 놓인 오르골을 들고 있는 지은의 어깨를 감싸고 가게 반대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데려갔다.
“자, 앉아요.”
“죄송해요, 제가 좀... 혼란스러워서.”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따뜻한 차 한 잔 가져올게요.”
지은은 오르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음반으로 둘러싸인 벽 안에는 지은을 닮은 아이 인형 말고도 작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 신기한 것은 오르골이 한 바퀴씩 돌 때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맨 구석 테이블을 차지한 지은을 닮은 인형은 바뀌지 않았지만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음반은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바뀌지 않는 인형이 하나 더 있었다. 한 손에는 드립포트를, 다른 한 손에는 음반을 들고 턴테이블 앞에 서 있는 혜원을 닮은 인형이었다.
페이퍼 문은 지은이 잃어버린 유년의 공간이기 이전에 혜원의 왕국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꿈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내가 속한 곳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페이퍼 문을 찾아냈고, 혜원은 왕국을 찾은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앤썸(anthem)을 하사했다. 혜원이 내리는 음악의 은혜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이 편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어린 지은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이 음악 때문이 아닐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혜원의 모토는 ‘후회하지 않는 삶’이었다.
‘엄마는 진짜 후회가 없어?’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글쎄, 앞으로 어떻게 나도 모르지. 그래서 매일매일 후회가 없도록 살고 있는 거야. 후회 없는 오늘이 쌓이면 후회 없는 삶이 되는 거 아닐까?’
혜원의 장례식에서 단골손님들은 장례식을 주도한 혜원의 법적 가족들의 차가운 태도에 밀려 빨리 자리를 떴지만 배웅하는 지은에게 혜원과 페이퍼 문에 대한 추억 한 마디씩을 건네어주었다. 그중에는 ‘페이퍼 문에서 후회를 떨쳐 냈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후회 없이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후회를 떨쳐 낼 수 있게 해 주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가 없었을 뿐이었다.
“달링, 페퍼민트 차예요. 향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마셔봐요.”
“감사합니다.”
과연 페퍼민트 향은 콧구멍을 타고 호흡을 확 트이게 만들더니 어수선해진 머리를 시원하게 정리해 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좀 이상했죠?”
“아니요. 엘라가 이걸 알아보는 사람은 무조건 바넘앤베일리로 데려오라고 했을 때부터 이게 보통 꿈은 아니다 싶었는데, 뭐, 꿈은 다 보통이 아니긴 하지만요. 그래도 뭔가 엄청난 사연이 있는 건가 보다 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찾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라고 하지는 않을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이게 엘라의 꿈이라고 하셨죠?”
“아뇨, 엘라가 맡긴 꿈이라고 했죠.”
“그럼... 누구의 꿈인지도 아세요?”
“그건 몰라요. 엘라도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저도 묻지 않았고요.”
“그렇죠...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는 건 이것도 한번 깨졌던 꿈이라는 뜻인가요?”
“미안해요, 달링. 그것도 모르겠어요. 보시다시피 부서진 곳도 고칠 곳도 없는 상태이고, 우리 시스템을 통해 수거되고 수리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요. 그런데 왜, 어떻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은 없거든요. 그렇지만 꿈이라는 건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니까, 제가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게 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죄송해요, 모른다고 하신 것을 제가 자꾸 물어서...”
“뭐가 미안해요. 알고 싶은 게 당연하죠. 그런데 곧 알게 될 테니까, 일단은 차부터 마셔요.”
“곧 알게 돼요?”
“이제 그거 가지고 엘라한테 가야죠. 아마 지은 씨가 궁금한 걸 엘라가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네요.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네요.”
“뭘요?
“원래 저는... 퀸 엘라를 찾으러 여기에 온 거였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까맣게 있고 있었어요.”
“거 봐요. 역시 지은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니까. 퀸 엘라를 찾는 미션이 아무한테나 주어지겠어요?”
“바넘앤베일리는 여기서 먼가요?”
“바로 뒤에 있어요. 저기 창 밖에 보이는 하얀색 종이 달 보이죠?”
폴리는 지은의 등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은은 뒤를 돌아보았다. 창 밖으로 지붕 위에 동그란 달을 올린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