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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 우리랑 인사는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요. 우리 진짜로 엘라를 더 기다리게 하지 말자고요.”
폴리가 말했다. 오요라가 말꼬리를 물었다.
“어쩌면 엘라는 윈터 원더랜드에 처음 온 순간부터 지은 씨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지은이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기도 전에 폴리가 덧붙였다.
“방금 지은 씨가 말한 것처럼, 남은 질문은 엘라에게 직접 물어봐요.”
폴리와 오요라는 마치 쌍둥이처럼 지은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네!”
지은은 다시 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렸다. 한 걸음 앞에 바넘앤베일리, 이 여행의 목적지, 모든 질문의 답을 가지고 있을 퀸 엘라가 있었다. 오두막 뒤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은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등 뒤에서 오요라와 폴리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가요.”
다시 고개를 돌린 지은에게 오요라와 폴리는 손짓과 표정으로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지은은 문고리를 살짝 잡았다. 그런데 문이 왈칵 열리면서 지은은 중심을 잃고 오두막 안으로 넘어지듯 들어가게 되었고, 지은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마치 바넘앤베일리가 지은을 빨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깜짝 놀란 것은 문 밖에서는 인기척조차 없었는데 오두막 안은 드라마에서 봤던 80년대 신문사 같은 느낌으로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오두막 안쪽에 놓여 있는 사무용 책상 위에는 손가락으로 돌리는 다이얼이 있는 전화기가 카랑카랑한 벨소리를 울리고 있었고 책상 뒤에서는 팩스 머신이 신경질적으로 팩스 용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엘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모든 소음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은이 서 있는 위치에서 책상 반대편에 퀼트 커튼이 쳐진 공간이 보였는데 아마도 엘라는 그 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글쎄,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꿈을 못 사게 되었다고 우리 시에서 창작되는 모든 음원을 자기네 시민들이 스트리밍 할 때마다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거야. 새벽에 문자로 통보하더니 내 전화는 받지도 않으면서 하루 종일 관련 문서랍시고 팩스만 계속 보내고 있어. 아니, 다른 사람한테 팔린 것도 아니고 원래 주인이 가져가겠다는데 이런 횡포가 말이 돼? 응, 일단 거기서 들어오는 초콜릿에 대해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지 검토 좀 해줘.”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로 초콜릿 살라미를 가득 담은 접시를 손에 들고 몸으로 퀼트 커튼을 열고 나오던 엘라는 지은을 발견하자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손으로 전화기를 가리켰다. 전화를 받아달라는 것 같았다. 지은은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시장님!”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장님 지금 통화 중이셔서 대신 받았습니다.”
“이것 참... 큰일 났네... 진짜 급하거든요.”
지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여전히 통화를 하면서 지은을 스칠 듯 책상으로 다가와 접시를 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뿜어져 나오고 있는 팩스 용지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지은은 잠시 잊고 있던 ‘이지은 대리’를 소환해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통화가 어려우실 것 같아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지은의 친절하지만 단호한 어조에 상대방은 살짝 기가 죽은 것 같았다.
“파가니니 악장님 매니저인데요. 악장님께서 카덴차 문제 빨리 해결 안 해주시면 올해 송구영신 이벤트 무대에 못 서신다고 하셔가지고요.”
“알겠습니다. 시장님 통화 끝나시는 대로 전해드릴게요. 지금 전화주신 번호로 연락드리면...”
착신 번호를 확인하려던 지은은 흠칫 놀랐다. 하긴, 손가락으로 돌리는 앤틱 전화기에 발신자 번호가 뜨는 액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장님이 악장님 핸드폰 번호 알고 계시니까, 악장님께 직접 전화 부탁드릴게요. 꼭 좀 빨리요. 악장님 지금 본인이야 말로 칩거해 버리겠다고 난리도 아니세요. 평소에는 그러-엏게 한가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하셨으면서 진짜 바빠질 기세니까 진짜 미치려고 하시네요. 근데 악장님이 이러시면 다른 단원들도 들썩거릴 거 아시잖아요. 이 휴가 저 휴가 다 끌어 붙여서 1년에 9개월쯤 유급휴가 쓰시는 음악감독님은 지금 어딜 여행 중이신 건지 연락도 안 된다고요. 뭐, 연락드려봤자 악장님이랑 상의하라고 하실 게 뻔하지만요. 하여튼 정규직 분들 사이에서 저 같은 계약직만 고생이죠.”
지은은 매니저가 잠시 숨을 쉬는 틈을 파고들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지은 대리’가 갈고닦았던 유능한 직장인을 위한 소통법이 꽤 유용했다.
“큰일이네요. 비서님이 정말 힘드시겠어요. 그런데 악장님이 왜 그러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레이디버그 시인님이랑 버나드 작곡가님 때문이죠. 아시잖아요. 우리 송구영신 이벤트 다음 달인 거.”
지은은 ‘지금은 7월인데요’라고 할 뻔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윈터 원더랜드에서는 지금이 7월이 아닐 수도 있고 1년이 12개월이 아닐 수도 있을뿐더러,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비서의 입에서 ‘버나드’라는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작곡가 버나드’는 분명 1934년 <Winter Wonderland>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작곡가 펠릭스 버나드일 것이다.
“아니, 두 분이 왜 갑자기 죽이 맞으셔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이벤트 한 달 전에 갑자기 이러시면 안 되죠. 악장님이 미친 듯 화를 내시는 게 이해가 간다니까요. 아시잖아요, 음악 감독님 1년에 3개월쯤 유연근무 신청하셔서 주로 단원들 안 나오는 시간에 출근하시는 거. 그러니까 단원들 연습시키는 건 단장님 몫인데, 뭐, 사실 지금까지는 연습이랄 게 딱히 필요 없었으니까 그냥 모여서 시가 몇 번 연주해 보고 연습 수당 신청서 제출하시고 퇴근하시는 게 다였으니까 딱히 단장님이 힘드실 일은 없었는데... 아니죠, 그러니까 더 미치겠는 거죠. 창단 이래 이런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단원들한테 완전 뒤집어진 편곡을 연습시켜야 한다는 거잖아요. 이건 박봉에 계약직인 제가 봐도 악장님 연봉이 그렇게 고액인데 배부른 소리 하신다고는 못하겠거든요. 아니, 사람이 그렇잖아요. 평생 팽팽 놀고먹었던 사람한테 갑자기 나가서 돈 벌어 오라 그러면 그게 청천벽력이 아니고 뭐예요. 그니까, 우리 악장님이 그동안 놀고먹으셨다는 뜻이 절대 아니라요.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건데, 하여튼 뭔 말인지 아시죠?”
“그럼요, 그럼요. 비서님 무슨 말씀하시고 싶은지 잘 알죠. 그런데 시인님이랑 작곡가님이 대대적인 편곡을 요청하셨나 보죠?”
“근데요, 제가 악장님 편을 들자는 게 아니라요. 시가를 무슨 편곡을 해요. 사실 저 같은 사무직은 야구장에서 시구 전에 시가 부를 때 가수 분들이 애드리브 하는 것도 오그라들거든요. 근데 시인님이 갑자기 올해 새로 쓴 시에 기존 연주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시는 거예요. 악장님이 음악감독님 휴가 중이셔서 편곡이 어렵다 하셨더니 바로 버나드 님한테 연락을 하신 거예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버나드 님도 지금 여기 계신가요?”
“아, 뭐, 왔다 갔다 하신다는 것 같아요. 저도 말씀만 많이 들었지 직접 뵌 적은 없거든요. 윈터 원더랜드에 리처드 스미스 문학상은 있는데 펠릭스 버나드 음악상이 없는 거에 삐져서 떠났다는 소문도 있는데 진짠지는 모르겠고요. 그래서 리처드 스미스 문학상 1회 수상자인 레이디버그님하고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두 분이 지금 이렇게까지 의기투합하시는 걸 보면 헛소문이었나 봐요.
하여튼 두 분이 윈터 원더랜드 안팎에서 뮤지션을 한 46명쯤 모아서 합창이면서도 가수 한 명 한 명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스타일로 편곡을 하겠다는 거예요. 파가니니 악장님이 이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냐고 펄펄 뛰시니까, 버나드 님이 이미 이런 쪽에 일가견이 있는 퀸시 존스 님을 PD로 섭외했고 마이클 잭슨 님도 편곡 도와주러 오고 있으니까 곡은 걱정 말고 연습 준비나 잘하고 있으라고 하신 거예요.”
지은은 놀랍고 벅찼다. 레이디버그에게 송구영신 이벤트에서 시가를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We Are The World>처럼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서 <Winter Wonderland>를 부르는 장관이 펼쳐졌었는데, 그 상상이 그대로 레이디버그와 버나드에게 전달되어 이루어지고 있다니.
“저기요, 저기요, 제 말 듣고 계시죠?”
“그럼요, 그럼요. 저도 같은 사무직이라 파가니니 악장님이 왜 펄펄 뛰시는지 이해가 가요.”
“근데 엎친 데 덮친다고 말이죠. 오늘 아침에 또 이상한 공문이 온 거예요. 아니 무슨 윈터 원더랜드 창작자들 사이에 영감 바이러스라도 돌았나.”
“영감... 바이러스요?”
“왜, 그... 있잖아요. ‘영감님~’ 할 때 영감 말고요. 창작자들이 맨날 안 온다고 핑계 대는 그거요. 아니, 갑자기 시립 뮤지컬 극단에서 신년 이벤트로 뮤지컬을 올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시향이니까 연습을 해야 하거든요.”
“아, 송구영신 이벤트에 이어서 바로요. 똑같은 시가만 연주하시던 분들에게는 정말 청천벽력이겠네요.”
“그러니까요. 이건 단원들한테는 아직 말도 못 꺼냈어요. 파가니니 악장님이 일단 뮤지컬 단장님한테 직접 항의하러 가신다고 막 나가셔가지고, 제가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된 거거든요.”
“그... 뮤지컬이 혹시 로지 작가님이 쓰고 계신 거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러니까요. 아시잖아요. 로지 작가님 덕분에, 아니, 때문에 우리 뮤지컬 극단은 창단 이래 창작 뮤지컬 초연을 한 번도 못했거든요. 작가님이 딱 한 곡 남았는데 그게 안 써져서 대본도 악보도 못 보내고 있다는 말만 계속하시니까... 아무도 안 믿었죠. 설마 딱 한 곡 못 써서 저러겠냐고. 그래도 뮤지컬 단장님도 딱히 뭐라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창작 뮤지컬 초연 좀 못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아시잖아요. 마스터빌더가 와서 뮤지컬 극단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시장님 마음에 안 들어도 극단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거기 단장님은 자리는 뭐, 티타늄 그릇 같은 거니까요.”
지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떠 보았다.
“마스터빌더면, 리처드 스미스 작가님 말씀하시는 거죠?”
“뭐, 그렇다는 소문도 있고 아니라는 소문도 있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분이 마스터빌더면 여기 얼굴을 좀 비추셔야죠. 명색이 자기 이름으로 된 문학상도 있는데 시상식에 한 번을 안 오니까... 전 어릴 땐 엘라 시장님이 마스터빌더인 줄 알았는데 막상 시향에 취직해보니까 확실히 아니시더라고요. 어휴, 퀸 엘라가 마스터빌더셨으면 시향이랑 극단은 벌써 뭐... 아시잖아요.”
“네, 근데 이제 로지 님이 작품을 완성하신 거죠?”
“그러니까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정말로 단 한 곡 때문에 저러고 계셨던 거라니 진짜 놀랍죠. 그러니까 우리 악장님이나 음악 감독님처럼 진짜로 놀고 계신 건 아니셨구나 싶으니까 그동안 악장님이랑 같이 뒷담화 했던 게 좀 죄송하긴 했는데요, 아무래도 이게 또 너무 갑작스럽긴 하잖아요. 악장님은 그동안 그러-엏게 작가가 작품을 안 보내서 할 일이 없다고 불평을 달고 사셨으면서도 막상 작가가 내일 당장 작품을 보내겠다니까 단장님이랑 싸우러 나가시고... 하여튼 예술가 분들이란...”
“저희 같은 사무직들이랑은 좀 안 맞죠.”
“맞아요. 너무 잘 아셔가지고 제가 뭐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아휴, 자세한 상황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께 잘 전해드릴게요. 그나저나 비서님도 앞으로 바빠지시겠어요.”
“저요? 아니에요. 저 내일 그만둬요.”
“네?? 그만두신다고요?”
“네. 어제 5시 58분에 사직서 올려놨는데 악장님이 뮤지컬 극단 공문을 먼저 보셔가지고....”
“아... 근데 왜 그만두세요?”
“꼭 계약직이라 그런 건 아니고요. 사무직 자체가 너무 적성에 안 맞아가지고요. 실은 지난주에 보트하우스 뱃사공 면접 봤는데 합격해 가지고요. 다음 주부터 출근이에요.”
“축하드려요! 보트하우스면... 조니스 보트하우스 말씀하시는 거죠?”
“네. 한 동안 강을 건너는 사람이 거의 없어 가지고 직원을 안 뽑았는데 레이디버그님이랑 버나드 님 때문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거죠.”
“그 두 분이 어떻게 보트하우스랑 연결돼요?”
“아, 버나드 님이 윈터 원더랜드 밖에서 오시는 뮤지션 분들 항공권 지원 요청을 하셔가지고요, 송구영신 이벤트 관련 예산은 원래 시향이 집행하니까요, 제가 기안을 올렸거든요. 근데 그게 악장님이 전결로 불승인을 해버리셔 가지고요. 화가 난 버나드 님이 악장님한테는 ‘편곡하면서 6분짜리 카덴차 넣을 테니 각오하라’고 소리 지르고 난리였거든요.”
“아! 처음에 말씀하신 ‘카덴차 문제’라는 게 이거군요.”
“네, 맞아요. 악장님이 어제 시장님께 6분짜리 카덴차 죽어도 못하니까 시장님 권한으로 막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시장님이 뭐 이렇다 저렇다 반응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보트하우스는 버나드 님이랑 레이디버그님하고 어떻게...”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두서가 없죠. 어제 버나드 님이 악장님이랑 한바탕 하고 나가면서 바로 조니스 보트하우스 사장님한테 전화하셔서 쾌속 크루즈 빨리 준비해 달라는 걸 제가 딱 들은 거죠.”
“조니스 보트하우스에 크루즈가 있어요?”
“아, 아시는 줄 알았는데 모르시는구나. 거기 맨날 작은 보트 하나 동동 띄어놓고 문 닫고 있으니까 엄청 영세해 보이고 그렇긴 한데요. 사실 거기 사장님 엄청난 분이거든요. 가을만 있는 도시를 휩쓸고 다니면서 낙엽을 싹 쓸어 와가지고요, 아무래도 그쪽 동네에선 낙엽이 골칫거리니까요. 낙엽을 가공해서 화력발전소 연료로 쓰는 기술을 특허를 내셔 가지고, 노후 화력발전소들을 싹 친환경 발전소로 바꾸셨잖아요. 아, 이걸 어떻게 모르시지...”
“그러게요. 죄송해요.”
“아니요, 아니요. 워낙 우리 시 안에서는 활동을 잘 안 하고 밖으로 도는 분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요. 여긴 발전소가 없잖아요. 근데 이제 보트하우스가 난리가 날 거니까요, 당분간 여기 계시겠죠. 아시잖아요. 전 세계에서 톱 뮤지션 46명이 배를 타고 오는데 그 팬들이 비행기 타고 오겠어요? 그래서 바로 구직 사이트에서 보트하우스를 즐겨찾기 해놨더니 정확히 한 시간 후에 신규 채용 공고 알림이 뜨더라고요. 정규직인데 수습도 없어요.”
“와, 정말 좋은 기회를 잡으셨네요!”
“뭐, 아시잖아요. 워낙 일을 안 하셨던 악장님 덕분에 인수인계 할 것도 없어가지고요. 이 통화가 제 마지막 업무예요. 정말 마지막 업무 알차게 하고 나가네요.”
“진짜 축하드려요.”
“제 자랑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여튼 그래서 시장님께 사무실 말고 악장님 핸드폰으로 바로 연락 드려달라고 좀... 부탁드려요. 이제 여기 전화받을 사람 없거든요. 아, 근데, 지금 전화받으신 분은 시장님 비서세요?”
“음... 그건 아닌데요.”
“하긴, 칩거고 뭐고 이 사람 저 사람들이 계속 전화를 해댈 테니까 시장님도 임시직이 필요하시긴 하겠네요. 요즘 여기저기 분위기가 들썩이는 것 같더라고요. 뭔가 기운이 평소랑 달라요. 뭔가 좀 상서롭달까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임시직이라도 좀 계시다 보면 저처럼 좋은 기회가 곧 생기실 거예요.”
“네, 말씀 잘 전해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얼른 짐 싸서 마지막 퇴근 준비하세요. 진짜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지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엘라를 살폈다. 엘라는 한 손에는 뽑아버린 팩스 전원을 들고 한 손에는 대형 키친타월 두루마리처럼 말린 팩스 용지를 손에 들고 힘겹게 일어나려고 하는 중이었다.
“아, 그거 저 주세요.”
지은이 팩스 두루마리를 받아 들면서 엘라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요. 지은 씨.”
“저를 아세요?”
“그럼요. 지은 씨, 나한테 줄 거 있죠?”
“아! 네, 여기요.”
지은은 주머니에서 페이퍼 문 오르골을 꺼내 엘라에게 건넸다.
엘라는 팩스 전원선을 던지고 두 손으로 오르골을 소중하게 받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이제 윈터 원더랜드 문제는 마스터빌더께 맡기고 저는 제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요.”
순간 지은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엘라에게 묻고 싶었던 여러 질문들이 뽀얀 안갯속으로 흩어졌다.
“지금... 저한테... 마스터빌더라고 하신 거예요?”
엘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떻게...”
“회전목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던 윈터 원더랜드가 지은 씨가 와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잖아요. 뭐, 그러다보니 부딪히는 곳도 있긴 하지만요. 원래 변화란 게 그런 거잖아요. 도시를 바꾸는 건 마스터빌더만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죠? 마스터빌더들이 의도를 가지고 새로운 걸 만들고 낡은 걸 부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쌓인 상상이나 말과 행동들이 변화를 일으키기도 해요.
지은 씨를 만나서 바뀐 사람들을 생각해 봐요. 로이스는 맨날 바라보기만 했던 쇼콜라티에가 되는 꿈을 다시 가져가겠다고 해서 초콜릿 수출로 먹고사는 옆 도시까지 들썩이게 만들었어요. 로지는 지은 씨 덕분에 드디어 뮤지컬을 완성했고, 지은 씨에게 영감을 받은 레이디버그가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시를 쓴 바람에 우리 송구영신 이벤트는 국제 행사가 되었어요. 벌써부터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예약이 물밀듯 들어오니까 그동안 죽어도 지배인으로 승진 안 하겠다고 버티던 하운드 독이 드디어 테디베어에게 컨시어지를 양보하고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이며 웰컴 이벤트며 준비하면서 날아다니고 있어요. 지루한 호텔의 지배인이 돼서 하루 종일 지배인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기 싫다는 게 승진 거부 사유였거든요. 겉으론 무뚝뚝해도 하운드 독은 손님들 옆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하거든요. 어디 사람과 개뿐인가요, 방랑의 신 레그바까지도 지은 씨가 자아를 찾게 해 주었다면서요.”
“그건 다... 제가 뭘 어떻게 했다기보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노래들이 우연히 그분들 상황하고 잘 맞았을 뿐이에요. 저도 신기한걸요.”
“내가 무심코 스치고 만들어내는 것들이 모여서 우연이라는 얼굴로 나타나는 거예요.”
“근데요... 정말 제가 여기 마스터빌더라면... 너무 영광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결국 이 모든 게 다 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요. 이 모든 게 다 지은 씨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해요. 이 아름다운 도시와 멋진 시민들이 다 지은 씨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또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만들어질지 설레지 않나요? 설마 아직도 진짜가 아닐까 봐 불안한가요?”
“아니요. 안 불안해서 오히려 이상해요. 원래 저라면 불안한 걸 넘어서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조금 전에 오요라 님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제 마음이 아니라 꿈을 갉아먹는 벌레라고 하시면서 퇴마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게 다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요라 말대로라면 지금 이 모습이 원래 지은 씨인 거잖아요? 불안하고 믿지 못하는 건 지은 씨가 아니라 벌레인 거고. 지은 씨, 잘 생각해 봐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이 모든 걸 진짜로 만드는 딱 한 소절 말이에요. 부를 수 있죠?”
“불러요? 지금요? 제가요? 감히 엘라 피츠제랄드 앞에서요?”
“왜 이래요. 마스터빌더답지 않게.”
지은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엘라의 눈을 단단하게 바라보면서 <It’s Only A Paper Moon>의 한 소절을 불렀다.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날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진짜가 될 거예요).”
다정한 눈빛으로 지은을 바라보며 엘라가 말했다.
“자, 그럼 파가니니 악장 문제부터 해결해 보시겠어요, 마스터빌더?”
“제가요?”
“그 ‘제가요?’는 이제 좀 그만하시고요.”
“죄송해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있을 거예요.”
지은은 눈을 감고 열심히 머릿속 주크박스를 헤집었다. 더 이상 별 거 없는 현실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고 그 세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빚어내고 있는 주크박스를.
톡.
오래된 음반 위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엘라 피츠제랄드의 <You'll Have to Swing It>이 시작되었다.
Oh, Mr. Paganini
파가니니 씨
Please play my rhapsody
제발 제 광시곡을 연주해 주세요.
And if you cannot play it, won’t you sing it?
만약 못하겠으면 노래를 불러주시겠어요?
And if you can’t sing it, you’ll simply have to-- [scat]
노래도 못하겠다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스캣을 하면 되지요!
지은이 눈을 뜨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엘라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지은은 엘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파가니니 악장님 번호 알려주세요.”
스캣 - 가사 대신 의미 없는 음절이나 소리를 사용하여 목소리를 악기처럼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창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