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를 눌러 음악을 들으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퀸 엘라!”
수화기를 뚫고 나오는 엄청난 데시벨이 지은의 귀를 강타했다. 첫 번째 신호음이 미처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걸로 봐서는 파가니니 악장은 아마도 폰을 계속 들고 있었나 보다. 파가니니는 상대방이 지은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채 <왕벌의 비행>을 속주하는 것처럼 엘라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물론, 목소리가 너무 커서 수화기를 뚫고 나와 엘라도 다 들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요. 공연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시가를 편곡한다는 건 시향에 대한 도전이라고요. 우리가 말이죠,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땐 연습도 안 하면서 연습 수당만 타먹는 것 같겠지만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연주 스타일도 확실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들인데 시가 밖에 연주할 게 없으니까 나름 그 한 곡에 혼을 담느라고 하고 싶은 것도 다 접고 자기 연주 스타일도 무시하고 단 한 곡만 단 한 가지 스타일로 연주해 온 사람들이라고요. 그런 사람들한테 이제 와서 완전히 다른 연주를 하라니. 게다가 여기저기서 모인 마흔여섯 명인지 예순네 명인지도 모르겠는 가수들 한 명 한 명의 스타일을 살리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연주라니... 결국 우리더러 갑자기 모여서 제 멋대로 노래할 가수들 입맛에 맡게 반주나 하라는 거잖아요. 게다가 시향을 대표하는 연주자인 나한테는 가수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6분짜리 카덴차를 하라니, 이건 그냥 엿 먹으라는 건가요? 아시죠? 6분이면 <보헤미안 랩소디> 보다도 길다고요. 정말이지 과장 조금 보태면 '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라고 따지고 싶을 정도라고요.
아무래도 버나드 그 인간이 시향에 복수를 하려고 레이디버그를 들쑤신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야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우리 연주에 불만은커녕 관심도 없던 레이디버그가 왜 갑자기 자기 시랑 우리 연주가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하겠어. 솔직히 그 사람한텐 열한 시 오십구 분 사십구 초에 맞춰서 시 낭송 끝내는 것만 중요하잖아요. 자기 할 일 끝나고 나면 우리가 뭘 연주하던 아니, 연주를 하든 말든 상관도 없을 거라고요.
버나드 그 인간, 그렇-게 음악감독 하라고 할 때는 고고한 척 고사하고는 리처드 스미스 따라 윈터 원더랜드 밖을 떠돌더니 이제 와서 다시 음악감독 자리를 노리는 거야 뭐야? 하긴, ‘리처드 스미스 문학상’이 생길 때 ‘펠릭스 버나드 음악상’도 생길 줄 알았겠지. 그런데 음악상은커녕 기념사업회 만들어보자는 이야기조차 안 나오니 충격이긴 했겠죠. 그러니까 여기저기 떠돌면서도 계속 기웃기웃하면서 시향을 흔들어서 다시 돌아올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맨날 비슷비슷한 시만 쓰던 레이디버그한테 가서 새로운 것 좀 해보자고 바람을 넣은 걸 거라고요.”
지은은 이쯤에서 레이디버그에게 ‘바람을 넣은’ 장본인으로서 파가니니 악장의 독주를 살짝 끊어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악장님?”
“누구... 누구세요? 누구신데 시장님 번호로 전화를 하신 거예요?”
“안녕하세요, 파가니니 악장님. 저는 이지은이라고 합니다. 악장님 말씀 잘 들었는데요,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고요.”
“아니, 당신 누구냐니까!”
지은은 한숨을 푹, 쉬고 엘라를 쳐다봤다. 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는요. 설명을 드리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짧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여기 윈터 원더랜드의 마스터빌더예요.”
“...”
“일단, 악장님도 단원 분들도 그동안 하고 싶은 게 많으셨을 텐데 십여 년을, 아니, 어쩌면 몇십 년일까요? 하여튼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음악만 연주하게 해 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 전화받으신 분이... 마스터빌더시라고요? 정말로요? 아니... 제가 펠릭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리처드도 마스터빌더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베일에 쌓여 있던 마스터빌더가... 당신이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요, 지금 중요한 건 악장님 문제니까, 거기에 집중하도록 해요. 일단,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요. 버나드 작곡가님이 시향에 복수를 하거나 파가니니 악장님을 엿 먹이려고 6분짜리 카덴차를 요청할 리는 없다는 거예요”
“...”
“악장님? 듣고 계세요?”
“네, 아... 네, 제가 마스터빌더님하고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얼떨떨하네요.”
“그럼요, 저도 악장님 못지않게 얼떨떨해요.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제가 누구냐는 게 아니고요. 악장님이 누구냐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방금 전에 악장님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악장님은 ‘시향을 대표하는 연주자’라고요.”
“네...”
“그러니까 버나드 작곡가님은 시향을 대표하는 연주자이신 악장님께 곡 전체 길이와 맞먹는 시간을 드린 거예요. 시향의 역할을 단순히 반주로 봤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
“모르시겠어요? 악장님은 무려 마흔여섯 명의 솔로 아티스트들 전체와 같은 비중의 역할을 맡으신 거라고요.”
“아니... 마스터빌더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막... 영광...이라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근데 말이죠... 버나드 그 인간이 저에게 막중한 역할을 맡길 리가 없잖아요.”
“악장님, 펠릭스 버나드 님이 <윈터 원더랜드> 작곡가인 걸 잊으셨어요?”
“아, 그거야 그렇죠...”
“설마 작곡가가 자기가 아끼는 곡을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망신 주는 데 쓰고 싶어 할까요? 버나드 작곡가님에게 중요한 것은 글로벌 아티스트들을 모아서 화려한 이벤트를 하는 게 아니라 <윈터 원더랜드>를 가장 멋지게 편곡하는 거 아닐까요? 어쩌면 생전에 들어보았던 그 어떤 버전보다도 대단하게요. 그러니까 <윈터 원더랜드>를 커버한 적이 있는 아티스트들을 불러 모으시는 거고요. 그런데 그런 대단한 이벤트에 악장님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무려 6분이나 배치하신 거예요. 모든 가수들의 파트를 합친 것과 비슷한 시간일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이건... 최고의 예우 아닐까요? 자신의 작품에 헌정된 도시에서 창단 이래 오로지 <윈터 원더랜드>만을 연주해 왔던 오케스트라에 드리는 시간인 거죠.”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지은에게는 파가니니의 머리가 ‘딩—’ 하면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엘라는 지은에게 살며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자, 악장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전 6분이 악장님 개인만을 위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윈터 원더랜드> 단 한곡만 연주하느라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참아 왔던 단원들과 함께 그 6분을 멋지게 만들어보시면 어때요?”
“저희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윈터 원더랜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연습해 오신 분들이잖아요. 먼저 악장님이 하시고 싶은 것부터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늘 그래오셨든 단원들을 이끌어 주세요.”
“저... 마스터빌더님. 이게... 말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뭐든 제가 하고 싶은 거라면 말이죠... 아니, 근데 이게 너무 많이 안 돼서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악장님. 지금 무려 마흔여섯 명이나 오고 있다면서요. 어쩌면 버나드 작곡가님한테는 이게 시작일지도 몰라요. 매년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부르실 수도 있어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자기답게 <윈터 원더랜드>를 부를 텐데 악장님이나 단원 분들이라고 못 할게 뭐예요.”
“마스터빌더님. 그렇다면 제가... 꼭 바이올린을 연주해야 할까요? 아시다시피 바이올린 파트가 인원수도 제일 많고, 저 하나 정도는... 아... 아닙니다. 제가 미쳤나 봐요. 죄송합니다.”
“악장님, 연주 대신 다른 거 하고 싶으시죠?”
“네?”
“악장님, 연주 말고 스캣을 하고 싶으신 거죠?”
“아니, 그걸 어떻게.....”
“마스터빌더니까요.”
머릿속 주크박스가 다시 <You'll Have to Swing It>을 플레이했다.
Oh, Mr. Paganini
파가니니 씨
Please play my rhapsody
제발 제 광시곡을 연주해 주세요.
And if you cannot play it, won’t you sing it?
만약 못하겠으면 노래를 불러주시겠어요?
And if you can’t sing it, you’ll simply have to (scat)
노래도 못하겠다면, 그냥 스캣을 하면 되지요!
지은은 엘라를 향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엘라는 양손 엄지로 화답했다.
“자, 악장님. 그럼, 카덴차 문제는 이제 해결된 거죠?”
“마스터빌더님... 정말 이런 파격적인 일은 제가 처음 겪어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점은 마스터빌더로서 죄송하게 생각해요. 더 이상 악장님도 단원 분들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저도 노력할 거예요. 그럼 올해 송구영신 이벤트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해피 뉴이어!”
“해피 뉴이어!”
“원더풀! 원더풀!”
수화기를 내려놓는 지은에게 엘라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역시 마스터빌더는 혜원 님께 들은 그대로네요.”
이번엔 지은의 귀에서 ‘딩—’ 소리가 울렸다.
“저희 엄마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날 여기로 보낸 사람이 바로 혜원 님인걸요. 내가 다시 가야 할 곳도 혜원 님 옆이고요.”
“거기가 어딘데요?”
“어디긴 어디겠어요. ‘페이퍼 문’이죠.”
“‘페이퍼 문’은...”
“알아요. 지은 씨가 알고 있는 ‘페이퍼 문’은 혜원 님이 지은 씨와 살던 세상을 떠날 때 문을 닫았으니까, 음... 편의상 지금 혜원 님이 계신 곳을 ‘페이퍼 문 버전 2’라고 하면 이해가 좀 쉬울까요? 지은 씨가 가져온 오르골이 바로 ‘페이퍼 문 버전 1’이고요.”
지은은 엘라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오르골을 덥석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오르골 위에는 엄마의 카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만든 미니어처가 놓여 있었다.
“이걸 이렇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건... 페이퍼 문이 깨진 꿈이라는 거죠? 근데 좀 이상해요. 엄마는 정말 이거랑 똑같은 걸 만들었던 거잖아요. 그럼 이뤄진 거 아닌가? 아... 근데 죽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깨져버린 거네요.”
“아니요. 꿈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들은 죽는다고 그 꿈이 깨지지 않아요. 다른 차원에서 삶과 꿈을 이어갈 수 있게 되죠. 더 자유롭고 더 많은 꿈을 꾸고 살게 돼요. 지금의 혜원 님처럼요.”
“거긴 제가 가볼 수 있는 곳인가요?”
“아직은 못 가요.”
“역시... 제가 죽은 다음 에야 갈 수 있는 곳인 거죠?”
“그것도 알 수 없어요. 혜원 님이 계신 곳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태가 중요한 곳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의 삶을 완성하고 또 다른 단계를 맞이했느냐가 중요한 곳이니까요. 앞으로 지은 씨가 혜원 님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은 씨가 지금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느냐에 달려 있어요.”
“엘라 님.”
“네, 지은 씨.”
“엘라 님은 누구세요?”
“글쎄... 그동안 지은 씨도 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제가 그동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건 뮤지션 엘라 피츠제랄드인데요.”
“그것뿐인가요?”
“네?”
“저는 뮤지션 엘라 피츠제랄드였기도 했죠. 그런데 정말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에요?”
지은은 엘라의 질문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지은 씨는 어떻게 뮤지션 피츠제랄드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나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상 들었으니까요, 엘라 피츠제랄드는 페이퍼문의 기본 BGM이었고 엄마의 뮤즈였어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난 혜원 님의 뮤즈예요.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만 하는 사람이라, 말로 설명하는 건 쉽지가 않네요. 자, 내가 혜원 님과 어떻게 만났는지 한 번 볼래요?”
“뭘... 어떻게 봐요?”
“자, 오르골을 보고 있어요. 지금부터 ‘페이퍼 문 버전 1’ 아래 숨겨져 있는 ‘꿈꾸기 전의 혜원 님의 이야기’를 보여 줄게요.”
엘라가 오르골을 톡 하고 건드리자 오르골 위에 있던 미니어처 페이퍼 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암막 커튼으로 꼼꼼히 빛을 가린 병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