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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Nov 20. 2024

수국의 계절을 그리워하다

        


  우리집 베란다에는 5월경부터 파란색 수국과 분홍색 수국이 환한 빛을 밝힌다. 함께 지낸 지 벌써 몇 년은 훌쩍 넘은 것들이다. 그동안의 세월을 지내면서 자그마했던 가지는 높고 넓게 뻗어나갔고, 그만큼 꽃송이는 더 많이, 탐스럽게 열렸다.

  분홍색 수국은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히 마음을 쓰지 않아도 연한 분홍색을 아름답게 보여주지만, 파란 수국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먹으면 붉은색에 가까운 홍매색 빛깔로 변해버렸다. 모란시장에서 데리고 올 때의 그 파란색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수국 재배 정보를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수국이 뿌리내리고 있는 흙의 성분에 따라 꽃잎색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국이 파란 꽃을 피우게 하는 특수 원예용 약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로 수국을 키우는 나로선 약물을 구한다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마침내 손쉬운 방법을 찾아냈다. 집에서 청소용으로 쓰는 구연산을 물에 아주 조금 타서 이른 봄부터 수국에게 주면 토질이 바뀌고 파란색 수국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구연산 때문에 수국이 몸살을 앓지 않을까 조심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구연산 물을 수국에게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늦봄, 우리집 베란다 화단에는 분홍색 수국과 푸른색 수국이 아주 탐스럽게 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기뻐서,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픈 마음에 베란다 난간 밖에 있는 화분대에 놓아두었다. 내 마음을 안 것처럼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1층 우리집 베란다의 수국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집 안에서 보일 때면 ‘제가 사랑으로 키운 수국이예요!’라며 마음속으로 기쁘게 외쳤다.

   장마철 비가 많이 오면 꽃잎에 스며든 빗물 무게로 가지가 꺾일까, 해가 너무 쨍한 날이면 잎이 타진 않을까, 나는 내내 염려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수국의 상태를 확인했고, 그것은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었던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수국도 여름이 깊어지면 바래진 꽃잎색으로 헤어질 시기를 알려온다. 꽃봉오리가 큰 만큼 꽃이 시들어 쳐지면 가지에도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시든 꽃봉오리를 잘라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내년 봄에 꽃을 또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다. 그 큰 봉오리를 싹둑 잘라내는 건, 몇 년이 지나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꽃봉오리가 없는 베란다 풍경은 무언가 아쉬웠고 쓰레기통에 담긴 그 큰 꽃을 바라보는 것은 늘 민망하고 슬픈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감상했던 꽃인데, 빛이 바랬고 시들었다고 쓰레기로 취급하다니. 시든 꽃이 맞이한 그런 상황이 잔인하게까지 느껴져서 마음이 저렸다.

   학창시절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처음 접할 때, 나는 시인의 감성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특유의 역설법으로 국어 문제집에서 자주 만났던 시였지만, 뭔지 모를 ‘감정의 과잉’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꽃이란 피면 당연히 언젠가는 지기 마련이고, 내년에도 그 꽃은 필 텐데 꽃이 진다고 이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부모님과 어른들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모란 잎이 뚝뚝 떨어지는 그 봄날 김영랑이 느꼈던 그 아쉬움과 슬픔을 어설프게라도 알 것 같다. 내가 시든 수국을 잘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마음, 그것이 김영랑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죽음과 삶은 그 경계가 가장 명확한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죽음과 삶은 공존했고 내가 아직 경험하지 않았을 뿐이지 죽음은 모두가 겪고 있는 흔한 일이라는 걸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알게 됐다. 시든 수국을 자르는 것과 사람의 생명을 비할 것은 아니지만, 살뜰히 가꾸어야 하는 것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리고 그 뿌연 경계는 나를 참 슬프게 한다.

   수국이 우리집 베란다 화단을 떠난 지는 벌써 여러 달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수국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분홍빛과 푸른빛으로 우리집이 가득 찰 수국의 계절은 아직 나에게 요원하고 그리운 시간이다.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진’ 수국을 그리워하며, 내년 나의 봄과 여름이 수국과 함께 찬란하길 겨울 한복판에서 꿈꾼다.



24년 겨울 <에세이 2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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