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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Jan 05. 2024

빨간 원피스

이귀복의 수필


모든 것은 빨간색 때문이었다. 한 남자는 내가 입은 빨간 원피스를 보는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고, 한 여자는 그 빨간 옷을 저주하며 갈기갈기 찢었다.

무의식 속의 여자는 삼십 년의 세월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흙 마당에 퍼질러 앉아 내 원피스를 찢고 있다. 그 옷을 걸쳤던 몸의 기억은 참으로 질겨 아직도 내 몸엔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옷을 찢어도 분을 삭이지 못한 여자가 이번에는 붉은 천 조각들을 움켜쥐고 흙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친다. 그때 여자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붉은 천 조각이 흩어진 자리마다 꽃잎 찢긴 칸나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빨간색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내가 싫어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빨간색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절 때도 그 흔한 다홍치마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자랐지만 엄마는 끝내 나의 여성성 말살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를 여성으로 존재하게 한 우주의 질서에 무슨 수로 엄마가 맞짱 뜰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엄마의 완전패배를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내 안에 바윗돌 같은 죄의식을 심는 데는 엄마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심리 저변에는 여성성을 극도로 혐오하는 기저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엄마의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천재성을 지닌 여자란 곧 팔자 드센 여자의 동의어였다. 평소 엄마는 여자로 태어나 집안에서부터 억압당한 채 인간으로서 펼치고 싶었던 큰 꿈을 펼칠 수 없었노라 한스러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가 말한 꿈이란, ‘사회적 성취를 이룬 남자들과 대등한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는 주어진 운명과 불화했고, 끝내 자신의 여성성까지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몸은 여성으로 살면서도 정신은 여성을 부정하는 아이러니. 나는 그런 엄마의 ‘첫딸’이 아닌, ‘첫 자식’으로 자랐다.


그런 내가 엄마를 상대로 첫 반란을 일으킨 것이 바로 빨간 원피스 사건이다. 어느 날 양장점 주인이 지나가는 나를 불렀다. 늘 칙칙한 옷만 걸치고 다니는 내가 보기 딱했다며 자신이 입으려고 지어둔 빨간 원피스를 내게 입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환할 수가. 내 얼굴이 아름다웠고 세상이 눈부셨다. 그날은 죄의식까지 힘을 쓰지 못한 채 나를 외면해 주었다. 빨간 원피스를 가방 깊이 감추어 들고 나오는 발걸음이 비로소 휘청거렸지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땅을 밟았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엄마 몰래 그 옷을 입고 경주의 가을을 찾아 떠나버렸다.


며칠 후부터 남자 하나가 대문간을 지키기 시작했다. 경주에서 돌아오던 날 밤, 만원 버스 안에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빨간 원피스만 눈이 빠지게 바라보던 그 사내가 분명했다. 사내의 존재를 알아버린 엄마는 귀신처럼 내 옷장을 뒤져 빨간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발기발기 찢으며 소리쳤다. “이렇게 시뻘건 옷을 입고 댕기니까 저런 놈이 쫓아오지. 나쁜 년, 나쁜 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엄마는 역시 천재였다. 그렇게 여성성을 부정하면서도 빨간색에 내포된 성적 이미지는 또 언제 터득했던 것일까. 그러나 엄마는 빨간색에서 섹스 이미지만 떠올릴 줄 알았지 절망의 이미지를 떠올릴 능력은 없었다. 흙 마당에 내던진 옷 조각에서 꽃술 찢긴 칸나가 피어날 때 나는 그 꽃이 흘리는 핏방울에 영혼을 적셨다. 그리고 절망의 바닥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불행했던 사나이 뭉크는 아마도 자신의 억압된 내면이 아닌, 나의 불안과 고통을 자양분으로 하여 ‘절규’를 창조했을 것이다.


밖은 봄이 한창이었다. 대상포진 끝에 찾아온 심한 한기를 다스릴 수 없어 겨울 솜바지를 구하러 백화점에 나간 날이었다. 내가 솜바지를 찾자 그때까지 벗지 못한 내 겨울코트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가씨는 짚이는 데가 있었는지 조금 기다리라 하고는 겨울 의류창고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저만치 걸어오고 있는 아가씨의 손에 빨간 바지가 들려져 있었다. 겨울 바지를 찾아낸 스스로가 대견한 듯 아가씨는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를 보았다. 붉은 원피스 조각을 흔들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아가씨가 아닌 엄마가 분명했다. 꿈에서 만나도 무서운 엄마를 백화점에서 맞닥뜨리다니. 나는 매대 위에 올려둔 손가방을 급히 챙겨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빨간 옷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엄마는 분명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육십 먹은 딸년의 머리채를 홱 낚아채어 사람 많은 백화점에서 망신을 시킬 것이다. 이럴 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다. 비상구를 향해 뛰어가는 내 발목을 빨간 바지를 든 아가씨가 붙잡는다. “고객님, 다른 색깔은 다 팔리고 빨간색 밖에 없어요. 이 빨간 바지 입고 벚꽃 앞에서 사진 찍으면 얼마나 예쁘게 나오는데요.” 이번에는 엄마가 비아냥거린다. “춘삼월에 솜바지 입고 꽃구경 가는 년도 있나. 빨간 옷을 입으면 넌 영락없는 부엌데기라니까. 그래, 뒤돌아보지 말고 빨리 가버려.”


잰걸음 때문에 바람이 일었는지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자 종아리가 시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한기가 온몸을 훑었다.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솜바지가 절실할 뿐이다. 한기를 이기려면 그것이 빨간 바지 든 노란 바지 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빨간 바지, 아니 엄마를 피해 달아나는 자신이 미웠다. 겨우 마흔아홉을 살고 세상을 떠난 주제에 당신보다 십여 년을 더 살아낸 딸을 이렇게 구속하다니. 나는 엘리베이터에 걸쳐놓은 한 발을 거두어 아가씨가 서 있는 매장으로 몸을 돌렸다. 분노한 엄마가 내 뒷덜미를 잡기 전에 내가 먼저 소도蘇塗에 닿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엄마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엄마가 쳐놓은 붉은 울타리를 걷어낼 것이다.



남편이 오랜만에 눈을 빛내며 묻는다. “당신이 웬일이야? 빨간 바지를 다 입고. 봄은 봄인가 봐.”

이 주책없는 남자가 바로 빨간 원피스에 정신을 빼앗겨 나를 따라왔던, 삼십 년 전의 그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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