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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금치된장국

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겨울의 끝자락 오후. 느슨해질 데로 늘어진 햇볕에 온기가 슬쩍 남아있지만 바람은 여전히 칼칼한 2월 말. 무거운 겨울옷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얇게 차려입고 나가면 꼭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옷깃을 여미는 해질녘이면 불현 듯 찾아오는 기억. 나는 시금치를 캤다. 아 그랬지 시금치 캘 때가 그랬어. 해를 등지고 앉은 등짝과 머리통은 따뜻한데 손가락이 시렸다.      


2백 평쯤 되었던 우리 집 울타리 안에는 노는 땅이 있었다. 그냥 비어있는 땅 말이다. 이 땅은 새 집 짓고 나서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토끼를 키우는 토기장이 만들어질 만큼 널찍했다. 토끼를 키우기 전에는 빨래 줄이 있기도 했다. 겨울에 넌 빨래는 동태처럼 얼어붙어 널 때 모양 그대로인 것을 부러지지 않게 집 안으로 가져와 난로가에서 녹인 적도 있었다. 그 때가 더 추웠던 것일까. 우리 집의 겨울이 추웠던 것일까.      


나한테야 노는 땅이었지 사실은 노는 땅은 아니었던 셈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때 맞춰 시금치 씨를 뿌려두셨으니까 늦겨울이자 초봄에 내가 시금치를 캘 수 있었겠다. 집에 굴러다니는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와 작은 과도 하나가 준비물이다.      


땅에 있는 시금치는 ‘켄다’기 보다 뽑는 것이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칼은 오른손으로 쥐고 준비.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시금치 이파리를 왼손으로 한꺼번에 모아 잡고 뿌리를 약 1센티미터 정도 아래에 닿도록 칼을 땅에 비스듬히 찔러 넣는다. 동시에 왼손에 살짝 힘을 주어 시금치를 뽑는다. 금속성 칼날이 땅에 들어 기며 작은 모래나 돌들과 부딪힐 때 내 손까지 전돨 되던 서걱거리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시금치를 뽑는 일은 초등학생 때나 했던 심부름이다. 봄방학 때 쯤. 수십 년 전 일인데 매년 기억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시금치는 시금치 무침이 있다. 할머니는 시금치 무침은 쉽게 상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김밥에는 시금치 대신 오이가 들어갔다. 시금치 무침은 제사상에 올라가는 나물이기도 했는데 추석 때 만든 시금치나물은 정말 가끔 쉰내가 나기도 했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나물이든 한번은 꼭 만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딱 한번. 나물반찬을 직접 만들어 보면 밥상에 올라오는 나물은 주시는 데로  다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수많은 나물의 재료가 있지만 나는 시금치를 추천한다. 싱크대 앞에서 시금치를 씻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니까.      


수경재배를 한 것이 아니라면 시금치에는 무조건 흙이 달려온다. 빨간 철끈으로 묶여있는 단으로 사든, 투명 비닐봉지에 담긴 소량으로 사든 뿌리까지 파는 시금치에는 흙이 있다. 


그나마 신속하고 완벽한 세척을 위해 나는 뿌리를 포기했다. 시금치의 단맛은 이 뿌리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볼그스레한 뿌리에 영양분도 많다는데, 하나하나 이파리 사이사이의 흙을 흐르는 물에 씻을 마음의 여유가 아직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뿌리를 싹둑 잘라 잎만 모아 잠시 물에 담가 놓는다. 나만의 미신 같은 것이다. 혹시 흙이 더 잘 떨어져 나가길 비는 마음.      


찬물에 불린(담가두었던) 시금치를 헹구기 시작한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씻은 시금치를 체에 넣고 시금치를 담갔던 통 바닥을 손으로 훑는다. 흙 알갱이가 느껴지면 다시 씼는다. 이렇게 헹구기가 다섯 번째를 넘어가기가 일쑤다.      


나물은 데치고 나면 더 허망하다. 이번에 구입한 시금치는 ‘한끼’라며 시금치 120그램을 팔았다. 데치고 나니 정말 한 움큼 나온다. 눈물 난다. 이래서 나물반찬은 다 먹어야 한다.     


나물로 양이 줄어드는 무상함을 몇 번 겪고 난 후 시금치는 어지간하면 국으로 만들어 먹는다. 나물보다는 몇 번에 나눠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나물을 씻을 때의 수고로움이 보상되는 기분이 들어서다. 또 국으로 만들어 먹으면 나물로 먹을 때 보다 시금치가 더 부드럽고 고소한 느낌이다. 시금치는 주로 된장국으로 먹는데 운이 좋으면 다슬기 맛이 날 때도 있다.      


시금치로 하는 나름의 스페셜 요리는 시금치새우카레다. 다진 양파를 볶다가 물을 잡고 카레 가루를 넣어 적당히 국물을 만들고 새우 넣고 먹기 직전에 시금치를 넣어 카레를 만든다. 두고 먹는 카레는 아니다. 그날 해먹고 치우는 카레다.      


이번에 구입한 시금치에는 유난히 흙이 많아 열 번도 넘게 헹궈야 했으니 시금치된장국을 꼭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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